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백제(대륙백제)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15. 01:08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백제(대륙백제)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송서 백제국전(宋書 百濟國傳)

 

  백제국(百濟國)은 본래 고(구)려(高驪)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다.
  후에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한다.
  의희 12년(A.D.416) 백제왕 여영(餘映:전지왕)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봉했다.
  고조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작위를 올려 봉하였다.
  소제 경평 2년(A.D.424) 여영이 장사 장위를 파견하여 대궐에 조공을 바쳤다.
  원가 2년(A.D.425) 태조가 조서를 내려,
  "황제가 말하노라,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은 대대로 충성하고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 정성을 다하였다. 먼 지방의 왕위를 계승하고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의를 사모함이 이미 드러났고, 가슴에는 붉은 정성을 품어,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보물과 폐백을 조정에 바쳤다. 
  왕위를 계승하게 하여 그 지방을 맡기노니 동방에서 우리 조정의 번병이 되어 정사를 부지런히 하여 선대가 닦아놓은 업적을 허물어뜨리지 않도록 하라.
  지금 겸 알자 여구은자와 겸 부알자 정경자 등을 보내 칙지를 펴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니 짐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그 후 백제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지방특산물을 바쳤다.
  원가 7년(A.D.430) 백제왕 여비(餘毗: 비유왕)가 다시 수교하고 조공을 바쳐 영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였다.
  원가 27년(A.D.450) 여비가 지방특산물을 바치며, 글을 올려 사사롭게 대사(臺使) 풍야부를 서하태수(西河太守)로 삼는다고 하는 것을 추인해 주고, 표문으로 역림(易林), 식점(式占), 요노(腰弩)를 요구하자 태조는 모두 들어주었다.
  여비가 죽고 그의 장자 여경(餘慶: 개로왕)이 세습하여 왕위에 올랐다.
  세조 대명 원년(A.D.457) 사신을 보내 벼슬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여 조칙으로 허락하였다.
  대명 2년(A.D.458) 여경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보내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문무의 훌륭한 신하들이 대대로 조정의 관작을 받았습니다.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지위를 높여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가엾게 여기시어 모두 관직을 내려주십시오" 하였으므로,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餘紀)를 관군장군으로 삼고,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餘昆)과 행정로장군 여훈(餘暈)을 모두 정로장군으로 삼고, 행보국장군 여도(餘都)와 여예(餘乂)를 모두 보국장군으로, 행용양장군 목긍(沐矜)과 여작(餘爵)을 용양장군으로, 행영삭장군 여류(餘流)와 미귀( 貴)를 모두 영삭장군으로, 행건무장군 우서(于西)와 여루(餘婁)를 모두 건무장군으로 봉했다.   
  태종 태시 7년(A.D.471) 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남제서 백제국전(南齊書 百濟國傳)

 
  "...... 공에 보답하고 열심히 노력한 것을 위로하여 그 이름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합니다.
  가행영삭장군 신 저근(姐瑾) 등 네 사람은 충성스럽게도 온 힘을 기울여 국난을 없앴으니 그 뜻의 강직함과 과감함이 명장의 등급에 오를만하며, 가히 나라의 간성이요 사직의 튼튼한 번병이라 할 만합니다. 
  그들의 노고를 헤아리고 공을 논한다면 의당 현격하게 나타나는 지위에 있어야 마땅하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가행직에 임명했습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은혜를 베푸시어 임시로 내린 관직을 정식으로 인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영삭장군 면중왕 저근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을 겸비하였으니 이제 가행관군장군 도장군 도한왕이라 하고,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는 젊은 시절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이제 가행영삭장군 아착왕으로 하며, 건위장군 여력(餘歷)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소박하며 문무가 뛰어나므로 이제 가행용양장군 매로왕이라 하고, 광무장군 여고(餘固)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국정을 빛나게 했으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불사후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모대(牟大: 동성왕)가 또 표문을 보내,
  "신이 파견한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高達)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楊茂)와 행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會邁) 등 3인은 지조와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심이 일찍부터 드러났습니다.
  지난 태시(A.D.465∼471) 중에 나란히 송나라의 조정에 사신으로 갔었고, 지금 신의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으니 그 지극한 공로를 따진다면 벼슬을 마땅히 올려 주어야 하므로 선례에 따라 가행직을 내렸습니다.
  천자의 은혜는 신성하고 아름다워 만리 밖에까지 미치는 것인데, 하물며 스스로 천자의 뜰에 이르렀으니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바라오니 특별히 살피시어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고달은 변경에서의 공로가 이미 뚜렷하고 공무에 부지런하여 이제 가행용양장군 대방태수라 하고, 양무는 마음과 행동이 깨끗하고 한결 같아 항상 공무에 임하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광릉태수라 하며, 회매는 생각이 꼼꼼하고 빈틈이 없어 여러번 근무의 성과를 나타내 이제 가행 광무장군 청하태수라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림과 동시에 장군의 호를 내리고 태수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백제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복야 손부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책명으로 모대(동성왕)를 죽은 그의 할아버지 모도(牟都: 반도백제의 왕)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봉하며 말하기를 "아 기쁘도다. 그대들은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대대로 이어받아서 그 정성이 먼 곳에까지 이르니 바닷길이 고요하고 맑아져 조공을 끊이지 않았다. 법전에 따라 귀한 관작을 계승하게 하노라.
  삼가 아름다운 업을 지켜야할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동성왕)에게 조서를 내리고, 모대를 그의 할아버지 모도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는다.
  왕위에 오름에 장수(章綬: 인장과 끈) 다섯과 옥(玉), 동(銅), 호(虎), 죽(竹) 네 개의 부절을 내리니 왕이 이를 공손히 받는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해에 위(북위)나라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역으로 쳐들어가니 (백제왕) 모대가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의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
  건무 2년(A.D.495)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봉작을 받은 이래 대대로 조정의 왕화를 입었고, 또한 절부와 부월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앞서 저근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 받아 온 백성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A.D.490)에는 험윤(북위)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침입했으나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하게 하여 한밤중의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북위)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쓸려가듯 붕괴되었습니다. 그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예기가 꺾여 고래처럼 사납던 그 흉포함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사실은 사법명 등의 꾀에 의한 것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야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가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하고, 찬수류를 가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하며, 해례곤을 가행무위장군 불중후로 하고, 목간나는 과거에도 군공이 있으며, 또 성문과 배를 쳐부수었으므로 행광무장군 면중후라 하였습니다.
  부디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와 겸 참군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신 장색과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운 것을 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 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파도를 건너 그의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관작을 올려주어야 하겠으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성조에서 특별히 관작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하고 장군의 호를 내려 주었다.   

 

 

 구태 주서 백제전(周書 百濟傳)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가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로소 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
  옛날에는 그 땅의 경계가 동쪽으로는 신라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까지였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 리이며, 도읍은 고마성(固麻城)이다.
  그 외곽으로는 다시 5방(五方)이 있는데, 중방은 고사성(古沙城),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북방은 웅진성(熊津城)이다. 
  왕의 성씨는 부여(夫餘)씨로서 어라하(於羅瑕)라 하고, 백성들이 부를 때는 건길지( 吉支)라 부르는데, 중국말의 왕과 같은 의미이다.
  처는 어륙(於陸)이라 부르는데, 중국말의 비(妃)와 같은 의미이다.  
  관직으로는 16품계가 있는데,

  좌평(左平)은 5인으로서 1품이고,

  달솔(達率)은 30명으로서 2품이며,

  은솔(恩率)이 3품,

  덕솔(德率)은 4품,

  한솔( 率)은 5품,

  나솔(奈率)은 6품인데, 6품 이상은 은꽃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장덕(將德)은 7품으로서 자주색 띠를 하고,

  시덕(施德)은 8품으로서 검은색 띠를 하고,

  고덕(固德)은 9품으로서 붉은색 띠를 하고,

  계덕(季德)은 10품으로서 청색 띠를 하고,

  대덕(對德)은 11품,

  문독(文督)은 12품인데 모두 누런 띠를 하고,

  무독(武督)은 13품,

  좌군(佐軍)은 14품,

  진무(振武)는 15품,

  극우(克虞)는 16품인데 모두 흰색 띠를 한다.
  은솔 이하는 정해진 인원이 없고, 각각 부서가 있어 여러 가지 사무를 나누어 관장한다.
  내관으로는 전내부, 곡부, 육부, 내략부, 외략부, 마부, 도부, 공덕부, 약부, 목부, 법부, 후관부가 있고,
  외관으로는 사군부, 사도부, 사공부, 사구부, 점구부, 객부, 외사부, 주부, 일관부, 도시부가 있다.
  도성에는 1만 호가 살고 있으며, 5부로 나누었는데,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로서 거느린 군사는 각 5백 명이다.
  5방에는 각각 방령 1인을 두는데, 달솔로서 임명하고, 군에는 장(장수) 3인이 있는데, 덕솔로 임명한다.      
  방에서 거느리는 군사는 1천 2백 명 이하 7백 명 이상이었다.
  도성 주변의 백성들과 그 외 작은 성들이 모두 여기에 속했다.
  그들의 옷이 남자는 대개 고(구)려와 동일하였다.
  조회 또는 제사 때는 관의 양쪽 곁에 깃을 꽂았으나 전쟁시에는 그렇지 않는다.
  배알하는 예는 두 손을 땅에 짚어 공경을 나타낸다.
  부인의 옷은 도포같이 생겼으나 소매가 약간 넓다.
  시집가지 않은 처녀는 편발을 머리 위로 틀어 올리고, 뒤로 한 가닥을 늘어뜨렸고, 시집간 부인 네는 이를 두 가닥으로 늘어뜨린다.
  병기로는 활, 화살, 칼, 창이 있다.
  그들의 풍속은 말 타고 활쏘기 잘하는 것을 숭상하고, 겸하여 경전과 사서를 즐겨 읽으니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지을 줄 안다.
  또한 음양오행도 이해한다.
  송 원가력을 채용하여 인월(寅月)을 그해의 시작으로 삼는다.
  의약 복축과 점치고 관상 보는 법도 알고 있다.
  투호와 도박 등의 여러 가지 놀이가 있으나 바둑이나 장기를 더욱 좋아한다.
  중과 비구니, 절, 탑 등은 매우 많지만 도사는 없다.
  세금은 포, 비단, 삼베, 쌀 등으로 부과하는데,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따져 차등 있게 바치도록 한다.
  그 나라의 형벌은 모반자, 전쟁에서 후퇴한 자 그리고 살인을 한 자는 사형에 처했다. 도둑질한 사람은 유배를 보내고, 도둑질한 물건의 배를 징수한다.
  부인으로서 간통죄를 범하면 남편 집의 계집종으로 삼는다.
  혼인절차는 대략 중국의 풍습과 같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그 나머지는 장례가 끝나면 상복을 벗는다.
  땅은 저습하며, 기후는 따뜻하다.
  오곡과 각종 과일, 채소, 술, 음식, 반찬, 약재는 거의 중국과 같고, 낙타, 당나귀, 노새, 양, 거위, 오리 등은 없다. 
  그 나라의 왕은 매 계절의 가운데 달에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또 해마다 네 번씩 그의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에 제사지낸다.
  진, 송, 제, 양나라가 강동에 웅거하고, 후위가 중원에 자리잡고 있을 때부터 계속 사신을 보내어 번국이라 칭하였고, 또한 작위도 받았다.
  북제가 중국의 동쪽에서 세력을 떨치자 그 나라의 왕 여륭(餘隆: 무령왕)이 또 사신을 보내왔다.
  여륭이 죽고 아들 여창(餘昌:위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건덕 6년(A.D.577)에 북제가 멸망하자 창이 처음으로 주나라에 그 지방특산물을 바쳤다.
  선정 원년(A.D.578)에도 사신을 보내와 (지방특산물) 바쳤다.


 

북사 백제전(北史 百濟傳)

 

  백제국은 대개 마한에 속했는데,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
  왕(색리국왕)이 출행 중에 시녀가 임신을 하여 왕이 환궁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더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서 큰 계란 만한 기(氣)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감응하여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여, 왕이 그 시녀를 살려 주었다.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버렸더니 말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그 아이를 기르도록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여 활을 잘 쏘자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려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동명이 도망하여 남쪽의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은 그를 딛고 강을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帶方)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 
  원래 백가(百家)가 건너왔다고 하여 백제(百濟)라고 했다고 한다.   
  그 나라가 동쪽은 신라까지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했다.
  서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大海)까지이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동서의 거리는 450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900여 리이다.
  그 도성은 거발성(居拔城)으로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부른다.
  지방에는 다시 오방(五方)이 있다.
  중방은 고사성(古沙城),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북방은 웅진성(熊津城)이다.
  왕의 성은 여(餘)씨로서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고, 백성들은 건길지( 吉支)라고 부르는데, 이는 모두 중국말의 왕이라는 뜻이다.
  임금의 부인을 어륙(於陸)이라 하는데, 중국말의 왕비라는 뜻이다.
  관직으로는 16품계가 있는데, 좌평(左平)은 5인으로서 1품이고, 달솔(達率)은 30명으로서 2품이며, 은솔(恩率)이 3품, 덕솔(德率)은 4품, 한솔( 率)은 5품, 나솔(奈率)은 6품인데, 6품 이상은 은꽃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장덕(將德)은 7품으로서 자주색 띠를 하고, 시덕(施德)은 8품으로서 검은색 띠를 하고, 고덕(固德)은 9품으로서 붉은색 띠를 하고, 계덕(季德)은 10품으로서 청색 띠를 하고, 대덕(對德)은 11품, 문독(文督)은 12품인데 모두 누런 띠를 하고, 무독(武督)은 13품, 좌군(佐軍)은 14품, 진무(振武)는 15품, 극우(克虞)는 16품인데 모두 흰색 띠를 한다.
  은솔 이하는 정해진 인원이 없고, 각각 부서가 있어 여러 가지 사무를 나누어 관장한다.
  내관으로는 전내부, 곡내부, 육부, 내략부, 외략부, 마부, 도부, 공덕부, 약부, 목부, 법부, 후궁부가 있고,
  외관으로는 사군부, 사도부, 사공부, 사구부, 점구부, 객부, 외사부, 주부, 일관부, 시부가 있다. 책임자는 3년마다 한번씩 바꾼다.
  도성에는 1만 호가 살고 있으며, 5부로 나누었는데,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가 있으며, 부에는 5항(五巷)이 있어 선비와 서민이 거주한다.
  부마다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린다.
  5방에는 각각 방령(方領) 1인을 두는데, 달솔로서 임명하고, 방좌가 그를 보좌하였다. 방마다 10군(郡)이 있고, 군에는 장(장수) 3인이 있는데, 덕솔로 임명한다.      
  거느리는 군사는 1천 2백 명 이하 7백 명 이상이다.
  사람들은 신라, 고구려, 왜 등이 섞여 있고, 또 중국 사람들도 있다.  
  도성 주변의 백성들과 그 외 작은 성들이 모두 나뉘어 여기에 속했다.
  그들의 음식과 옷은 고(구)려와 대략 동일하다.
  조배 또는 제사 때는 관의 양쪽 곁에 깃을 꽂았으나 전쟁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배알하는 예는 두 손을 땅에 짚어 예의를 나타낸다.
  부인들은 분을 바르거나 눈썹을 그리지 않으며, 처녀는 머리를 땋아 뒤로 늘어 뜨렸다가 시집가면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위로 틀어 올려 쪽을 진다.
  옷은 도포와 비슷한데 소매가 약간 넓다.
  무기로는 활, 화살, 칼, 창이 있다.
  풍속이 말 타고 활쏘기 잘하는 것을 숭상하고 고서와 사서를 애독하여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지을 줄 알며, 관청 사무에도 능하다.
  또 의약, 점, 관상, 음양오행에 대하여도 안다.
  중과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은 많지만 도사는 없다.
  고각, 공후, 쟁, 우, 지, 적 따위의 악기가 있고, 투호, 도박, 구슬치기, 창던지기 등의 여러 가지 오락이 있는데, 특히 바둑을 좋아한다.
  송나라 원가력을 사용하여 인월(寅月)을 그 해의 시작으로 삼는다.
  세금은 포, 비단, 실, 삼, 쌀 등으로 부과하는데,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징수한다.
  그 나라의 형벌은 반역한 자, 전쟁에서 후퇴한 자 및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 한 자는 귀양을 보내고 그 훔친 물건의 두 배를 징수한다.
  부인으로서 간통을 하면 남편 집의 계집종으로 삼는다.
  혼인에 관한 예절은 대략 중국과 같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그 나머지 친척들에 대하여는 장례가 끝나면 복을 벗는다.  
  땅은 저습하며, 기후가 따뜻하여 사람들이 모두 산에서 산다.
  굵은 밤이 생산되며, 오곡, 잡과, 채소, 술, 안주 등은 대체로 중국과 같으나, 낙타, 노새, 당나귀, 양, 거위, 오리 등은 없다.
  나라 안에는 대성 8족이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협( )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 :  의 오기?)씨이다. 
  그 나라의 왕은 해마다 매 계절의 가운데 달에 하늘 및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낸다.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도 도성 안에 건립해 놓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지낸다.
  백제의 서남쪽에 사람이 사는 섬이 15군데 있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북위 연흥 2년(A.D.472) 그 왕 여경(餘慶:개로왕)이 처음으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餘禮)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張茂) 등을 파견하여 표를 올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정을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선조인 쇠(釗)는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경솔히 폐기하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인 수(須:근구수왕)가 군대를 정돈하고 맹렬히 돌격하여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 하였더니 그 뒤로는 감히 남쪽을 넘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의 국운이 다하여 그 유민들이 도망해 오면서 추악한 무리가 점차 강성해져서 마침내 침략과 위협을 당하여 원한이 얽히고 전쟁이 연이은 것이 30여 년입니다.   
  만일 천자의 인자함과 간절한 긍휼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면 속히 장수 한 사람을 파견하여 신의 나라를 구원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자제들도 보내어 마굿간에서 말을 기르도록 하겠으며, 한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경진년 이후 신의 나라 서쪽 바다 한 가운데에서 시신 10여 구와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이는 바로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에 뱀처럼 흉악한 것들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습득한 안장 하나를 바쳐 실증해 보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북위) 헌문제는 (백제가) 매우 먼 곳에서 험난함을 무릅쓰고 와서 조공하였기 때문에 예우를 매우 후하게 하고, 사신 소안을 파견하여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도록 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표문을 받고 무탈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대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침범을 당하였지만 진실로 의리에 순응하고 어진 마음으로 지킨다면 도적의 침범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전에 파견한 사신은 바다를 건너가 변방 밖 먼 곳에 있는 나라를 위무하도록 하였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지금까지 돌아오지 아니하여 생사여부와 도착 여부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대가 보낸 안장이 사신이 탔던 안장인지 비교해 보았더니 중국 것이 아니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꼭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다.
  천하를 경략하는 중요 방법은 별지에 적어놓았다." 하였다.
  또 조서에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국으로 자칭하며, 직공하여 온 지 오래이므로 비록 그대의 나라와는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아직 명령을 거역한 잘못이 없다.
  그런데 그대가 사신을 처음 보내 통교하면서 곧장 정벌하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검토하여 보았으나 이유가 타당하지 않았다.
  보내준 비단과 해산물이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정성은 알겠다. 지금 여러 가지 물품을 별지와 같이 보낸다." 하였다.
  또 고연(高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 등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은 지난날 여경(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하여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소안 일행은 이로 인하여 모두 되돌아 왔다.
  이에 연에게 조서를 내려 몹시 나무랐다.     
  연흥 5년(A.D.475)에 소안 등에게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백제로 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전하고, 그 성의와 절조를 포상하도록 하였는데, 소안 등은 바닷가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끝내 백제에 가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백제는) 진, 송, 제, 양나라가 강동에 웅거할 때부터도 사신을 보내어 번국으로 자처하고 또한 작위도 받았었다. 또 위나라와도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북제가 동위로부터 선위 받았을 때도 그 왕 여륭(餘隆:무령왕)은 사신을 파견하였다.
  여륭이 갑자기 죽자 아들 여창(餘昌:위덕왕)이 역시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무평 원년(A.D.570) 북제의 후주는 여창을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예전처럼 책봉하였다.
  무평 2년(A.D.571) 또 여창을 지절 도독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로 삼았다.
  북주 건덕 6년(A.D.577) 북제가 멸망하자 여창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북주와 통하였다.
  선정 원년(A.D.578) 또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다.
  수나라 개황(A.D.581∼600) 초에 여창이 또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방 특산물을 바치니 (여창을)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제수 하였다.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해에 수나라의 전함이 표류하여 해동의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도착했다가 그 전함이 돌아올 때 백제를 통과하게 되자 여창은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내고 아울러 사신도 보내 표를 올려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문제는 이를 기특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그대의 나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하기가 극히 어려울 터이니, 지금부터는 해마다 조공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였다.
  이에 백제의 사신이 춤을 추며 돌아갔다.
  개황 18년(A.D.598) 여창이 그의 장사 왕변나를 사신으로 보내와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때마침 (수나라가) 요동전쟁(遼東之役)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 군사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표를 올렸다.
  문제는 조서를 내리고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사실을 알고 군사를 내어 백제의 국경을 침범하였다.
  여창이 죽고 아들 여장(餘璋:무왕) 왕위에 올랐다.
  대업 3년(A.D.607) 여장이 연문진을 사신으로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해 또 왕효린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하고 고(구)려를 토벌하자고 요청하므로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도록 하였으나, 여장은 안으로는 고(구)려와 우호를 통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가지고 중국을 엿본 것이었다.
  대업 7년(A.D.611) 양제가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자 여장은 그의 신하 국지모를 사신으로 보내와 출군 시기를 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양제는 대단히 기뻐하여 상을 후하게 내리고, 상서기부랑 석율을 백제에 보내 출군 시기를 알려 주었다.
  다음 해 수나라 6군이 요수를 건너자 여장 역시 국경에 군사를 엄중히 배치하여 놓고 수나라의 군사를 돕는다고 공공연히 말을 하였지만 실제로는 양단책을 쓰고 있었다.
  얼마 뒤 (백제는) 신라와 틈이 생겨 자주 전쟁을 하였다.
  대업 10년(A.D.614)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 뒤로는 천하가 혼란해져 마침내 사신이 끊어졌다.
  그 나라의 남쪽에서 바다로 석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다. 남북은 1천여 리이고,  동서는 수백 리이며, 토산물로는 노루와 사슴이 많은데, 백제에 부용 되어 있다.
  (백제에서) 서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으로 3일을 가면 맥국(貊國)에 닿는데, (그 나라는 크기가) 1천여 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