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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의 진성여왕은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왕일까? -최초주장

윤여동 2008. 2. 15. 00:17

윤여동설 - 신라의 진성여왕은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왕일까? - 최초주장

 

 

  우리 역사상 여자가 왕위에 오른 나라는 신라 뿐으로서 27대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51대 진성여왕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세 여왕 중 유독히 진성여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좋지 않게 전해져 지금도 진성여왕은 신라시대의 난잡했던 여왕으로 인식되고 있고, 결국 나라를 혼란으로 몰고 간 대표적인 왕으로 치부되고 있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둘째 딸로서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고, 그 언니였던 천명공주가 진골이었으며 진지왕의 장자였던 용수에게 시집을 갔던 관계로 진평왕은 성골인 둘째 딸 덕만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때 김유신이라는 용장을 얻게 되어 국방을 튼튼히 할 수 있었고, 황룡사 9층탑에 삼국 통일의 염원을 담을 수 있었으며,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이 또 아들이 없어 진평왕의 동복동생이었던 국반갈문왕(국진안갈문왕이라고도 한다)의 딸 승만이 왕위를 이어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역시 김유신과 김춘추 등이 있어 국방과 외교를 이끌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는데, 역사에서는 진덕여왕까지를 성골이라 하고 그 이후는 진골이라 한다.
   신라 51대 진성여왕은 48대 경문왕의 딸로서, 이름은 만(탄이라고도 한다)이며, 49대 헌강왕, 50대 정강왕의 누이동생이었다.
  헌강왕이 재위 12년에 죽어, 그 동생인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재위 2년 만에 또 죽자 할 수없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녀는 사실 준비가 안된 채 남편이었던 위홍의 영향력으로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 삼국사기를 보면 진성여왕과 위홍에 대하여 간통을 했다는 둥 아주 나쁘게 기록되어 있으나 진성여왕과 위홍과의 관계는 숙부와 조카딸 사이로서 이들은 혼인한 부부 사이였다. 숙부와 조카딸이 혼인한다는 것이 지금의 윤리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당시의 신라왕실에서는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것만을 가지고 진성여왕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왕위에 올라서는 기울어져 가는 사직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진성여왕의 재위 기간에 원종, 애노의 난이 있었고, 양길과 궁예가 세력을 키워 신라 땅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고 있었으며, 견훤이 완산과 무진주지역을 차지하고 후백제를 세웠고, 나라 서남쪽의 옛 가야지역에서는 적고적이 일어나 민심이 매우 흉흉했던 때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이것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 민심이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단순히 진성여왕 만의 잘못은 아니라 판단된다.
 
 

  앞선 헌강왕 때의 기록을 보면, 금성의 모든 집을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으로 밥을 해먹으며, 노래와 풍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 이때부터 신라는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시중 민공이라는 사람은 미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이러한 현상이 헌강왕이 왕위에 오른 후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먹을 것이 풍족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도시가 환희에 젖어 있으니 왕이 정치를 잘했기 때문이라 아첨하고 있는데, 민공이라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고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때 왕에게 백성들이 지붕을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해먹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려야 한다고 건의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집을 기와로 덮기 위해서는 기와를 구워야 하는데, 기와를 구우려면 나무를 베어야 하고, 또 밥을 숯으로 해먹기 위한 숯을 만들기 위해서도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야 한다. 그랬을 경우 산의 나무는 모두 베어져 민둥산이 될 것이고, 민둥산이 되면 적은 비에도 산사태가 나게 되고, 또 짧은 기간 비가 오지 않을 때도 가뭄이 들게 된다.
  가뭄이 들어 농사가 잘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해지게 되고,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픈 백성들은 유리걸식을 하거나 도둑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나라가 망하고 마는 법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런데 진성여왕 때는 이미 백성들이 세금을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관리들을 보내 세금을 독촉해야 했으니 이미 신라는 기울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때 진성여왕이 나라를 다시 건국하는 심정으로 강력하게 정책을 펼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미 그녀의 옆에는 힘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위홍도 가고 없고, 아첨꾼들만 득실거렸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여왕이 위홍이 죽은 후 젊은 미남자들을 불러들여 음탕하게 즐기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마음대로 행하게 하여 풍기와 규율이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이 정말 역사적 사실인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러한 난잡한 행동을 했다는 진성여왕이 죽은 후의 시호가 "진성(眞聖)"이기 때문이다.
  선덕(善德)여왕의 시호는 선(善)하게 덕을 베푼 왕이었다는 의미이고, 진덕(眞德)여왕의 시호는 참되게 덕을 베푼 왕이었다는 의미로서 재위 중의 정치철학과 업적에 따라 시호는 정해진다.
  그렇다면 신라의 대신들은 진성여왕이 죽었을 때 왜 그녀의 시호가 참 성인과 같다는 의미인 眞聖(진성)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그녀가 재위 중 진짜로 성인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8년(A.D.894) 조를 보면,
  "봄 2월에 최치원이 시무 십여조를 올리니 왕이 기쁘게 받고 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11년(A.D.897) 조를 보면, "여름 6월 왕이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근년에 백성들이 곤궁하여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음이다. 현명한 사람에게 양위하고자 한다" 하고는 아들이 아닌 조카에게 실제로 왕위를 양위했기 때문에 진성여왕은 나라를 쇄신해 보고자 했으나 그녀를 옆에서 도와 일을 추진해줄 사람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최치원의 국정쇄신안인 시무 십여조가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고, 이로써 신라는 재기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진성여왕에게는 양패(良貝)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하고, 그 후 최치원은 정치에 뜻을 접고 산천을 주유하며 후학을 길렀고, 태조 왕건에게 신라가 머지않아 멸망할 것이라는 의미의 글을 보내기도 한다.

 

  아마 왕 주변의 부패한 관리들이 나라의 멸망이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나라를 쇄신해 부흥시켜 보려는 진성여왕의 의견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위홍이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위홍이라는 사람은 48대 경문왕의 동복동생으로서 조카인 헌강왕이 왕위에 오르자 상대등으로 임명되었고,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했던 사람이며 진성여왕은 그가 죽자 혜성대왕으로 추증했다.
  따라서 그는 진성여왕 때 실제적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실권자였을 것인데 진성여왕이 즉위한 다음해에 죽고 말았기 때문에 진성여왕은 뜻은 있었으나 국정을 쇄신할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 신라에서 신하로서 죽은 후 대왕에 추증된 예는 단 두 번뿐인데 한사람은 김유신으로서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위홍으로서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증되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당들은 선거를 의식해 당리당략에만 열중이고,  

정부의 예산은 여러 부문에서 낭비되고,  

많은 국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으나 관리들은 세금을 줄여줄까 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걷을까를 궁리하며,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백수생활이 길어져 활기차게 일할 수 있는 청춘을 한숨으로 보내고 있다.   

도둑들이 늘어나 전깃줄을 끊어가기도 하고, 하수도 뚜껑을 빼가고, 다리 난간을 떼어간다. 

이는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증거라고 보아야 할텐데도,  

정부는 모두가 잘되고 있다고 하고,  

지역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좌우로 이념이 갈라져 네편 내편으로 갈라져 있고,  

윤리와 도덕은 무너져 가고,  

일부 부유층은 사치가 극에 달하고 있다.  

기회가 평등하지 않았고, 과정 또한 공정하지 않았으며, 결과가 정의롭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라 생각된다.  
기름 유출로 서해 바닷가에서 바다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은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고,
 

국보 문화재가 관리소홀로 하룻밤 사이에 불타 없어져 사람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옛 신라말기를 되새겨 보아야 할 때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