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중국 구화산 화성사 등신불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은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문주 - 최초주장
열반 후 등신불이 되어 지금까지도 중국 안휘성 구화산 화성사 육신보전에 모셔져 있으며, 중국 사람들이 지장보살의 화신이라 여겨 지장왕보살로 추앙하고 있는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의 신분에 대하여 김수충 일 것이라는 둥 논란이 많아 이 글을 올리는데, 구화산지의 기록대로라면 김교각 스님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많은 사람들이 김교각 스님이 김수충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김수충은 신라 32대 효소왕의 유복자로서 어머니는 성정왕후였다. 그 아버지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직 태어나지 않아 숙부인 성덕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성덕왕은 장조카인 김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고 자신의 친아들을 태자로 봉했다가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그리하여 김수충이 왕위를 빼앗기고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 김수충은 불교가 아닌 유교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왜냐하면 신라 26대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27대 선덕여왕도 아들이 없었으며, 28대 진덕여왕에게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와 혼인하기 전에 이미 보라라는 여인과 혼인하여 고타소라는 딸을 낳았었는데, 김교각 스님은 김춘추와 문희와의 사이에서 626년에 태어난 김춘추의 장자 김법민(후일의 문무왕)이 태어난 이후인 628∼630년 사이에 김춘추와 보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문주(金文注)로 추정됩니다.
☆ 김춘추와 보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첫 딸 고타소는 성장하여 김품석과 혼인하여 대야성 도독인 품석을 따라 대야성에 가서 살고 있었는데, 642년에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게 되고, 이때 고타소가 목이 잘려 백제의 도읍 사비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김춘추는 죽은 딸 고타소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고구려로, 왜국으로, 당나라로 가 청병외교를 펼쳐 결국 660년에 이르러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게 된다.
따라서 백제는 김춘추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멸망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구화산지(九華山志) 권1, 성적문(聖跡門) 제1, 六 應化
按神僧傳云,
신승전에 의하면,
佛滅度一千五百年 菩薩降迹於新羅國王家 姓金 號喬覺
석가모니 사후 1500년에 보살이 신라국 왕가에 탄강했는데, 성은 김씨이고 호는 교각이다.
☆ 사람들은 비관경(費冠卿)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화성사기(化城寺記)의 "정원 10년(A.D.794) 여름에 열반했다" 는 기록과 송고승전 당 지주 구화산 화성사 지장전의 "정원 19년(A.D.803) 여름에 홀연히 열반했다"라는 기록에 따라 김교각 스님이 곧 신라의 김수충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김수충의 정확한 출생년도는 서기 702년이고, 김교각 스님은 99세에 열반에 들었다고 하므로 김수충이 김교각 스님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唐高宗永徽四年 二十四歲 祝髮 白犬善聽 航海而來
至江南池州東 靑陽縣 九華山
당고종 영휘4년(A.D.653) 24세에 머리를 깎고 흰개 선청을 끌고 배를 타고 강남 지주 동쪽의 청양현 구화산으로 왔다.
☆ 영휘 4년(서기 653년)에 김교각 스님의 나이가 24세였다면 그의 출생년도는 서기 630년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개원 16년(서기 728년)에 98세 밖에 되지 않는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동판에는 김교각 스님의 출생년도가 정관2년(A.D.628) 7월 30일로 기록되어 있고, 개원 16년(서기 728년) 7월 20일에 입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판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김교각스님은 100세가 되기 10일전에 열반했으므로 99세에 입정했다고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端坐九子山頭 七十五載 至開元十六年 七月三十夜 成道 計年九十九歲
구자산(구화산의 옛이름) 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튼 지 75년이 지난 개원 16년(A.D.728) 7월 30일 밤에 도를 이루었는데(열반에 들었는데) 나이 99세였다.
☆ 구자산은 구화산의 옛 이름이고, 동판에는 김교각 스님이 개원 16년 7월 20일에 열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時有閣老閔公 素懷善念 每齋百僧 必虛一位 請洞僧足數
당시 민공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덕을 쌓기 위해 매번 스님들을 초대하여 설법을 듣곤 하였는데, 반드시 맨 윗자리 하나는 비워 두었다(맨 윗자리에는 김교각 스님을 모셨다).
☆ 민공의 이름은 민양화라 한다.
僧乃乞一袈裟地 公許之 衣 覆九峰 遂盡喜捨
스님이 가사가 덮을 만큼의 땅을 시주하기를 권하자 민공이 허락했는데, 옷이 구화산 아홉 봉우리를 모두 덮자 곧 구화산 전체를 시주했고,
☆ 김교각 스님이 구화산 전체를 소유하고 있던 민공에게 가사 한 벌이 덮을 만큼의 땅 만 시주해 주면 절을 지을 수 있겠다고 하자 민공이 웃으며 그 정도 조그만 땅을 시주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느냐고 승낙하자 김교각 스님이 가사를 벗어 펼쳤는데 구화산 전체가 덮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깜짝 놀란 민공이 김교각 스님의 법력이 매우 높다는 것을 느끼고 구화산 전체를 시주했다고 한다.
其子求出家 卽道明和尙 公後亦 離塵網
그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곧 도명화상이고, 민공 역시 후에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했다.
菩薩入定二十年 至至德二年 七月三十日 顯聖起塔 至今成大道場
보살이 열반한지 20년이 지난 지덕2년(A.D.757) 7월 30일에 탑을 세워 그 성스러움을 현창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도량이 되었다.
☆ 지덕 2년은 서기 757년이므로 김교각 스님이 728년 7월 30일에 열반에 들었고, 757년 7월 30일에 탑을 세웠다면 그가 열반에 든 지 30돌 되는 해에 탑을 세웠다는 말이 되어 20년은 30년의 오기로 보이는데, 지금 구화산 화성사에는 지덕 2년(서기 757년)에 당 숙종이 하사한 금인이 전해지고 있어 등신불을 모신 육신보전(월신보전이라고도 읽는데, 이는 肉의 간자체가 月자와 비슷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현재의 육신보전 현판이 근세에 만들어졌다면 肉으로 읽어야 하고, 옛날부터 걸려 있던 것이라면 月로 읽어야 한다)을 지덕2년에 세울 때 금인도 함께 하사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대를 정리해 보면, 김교각 스님은 서기 628년 또는 서기 630년 7월 30일에 태어나 24세 또는 26세 때인 653년에 구화산으로 들어가 불법에 귀의해 75년 간 지낸 후 728년 7월 20일 또는 7월 30일에 죽어 등신불이 되었고, 사후 30돌인 757년 7월 30일에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물론 김교각 스님이 생전에도 주변에 어느 정도는 알려졌겠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지장왕보살로 추앙받게 된 것은 열반 후 등신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에 더욱 멀리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당나라 황실에까지 전해지게 되자 당 숙종은 이미 30년 전에 죽어 등신불이 되어 있던 김교각 스님을 기리는 금인을 하사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김교각 스님은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문주(金文注)일 것이다.
[참고]
지장왕보살 신라 왕자 김교각 출생의 진실 [2001 글쓴이 윤여동]
Ⅰ. 서 론
세상 사람들이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 김지장(金地藏), 석지장(釋地藏)이라고 부르고 있고, 열반 후 육신이 등신불이 되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으며, 중국 안휘성 구화산 화성사 육신보전(中國 安徽省 九華山 化城寺 肉身寶殿)에 모셔져 있는 그는 누구일까?
그가 신라(新羅)의 왕자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신라 어느 왕의 왕자라고는 전하여 지지 않았다.
이미 천년도 훨씬 넘은 먼 옛날의 일이기에, 그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고 단편적이라서 정확히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나, 모든 기록과 사서(史書)를 참고하고 정황을 판단해 본다면, 신라시대 어느 왕의 아들일 것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기록을 검토함에 있어서는, 국내에는 옛부터 전해오는 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본 연구자가 서기 1981년도에 우연히 얻은 동판(銅版)의 내용이 그에 관한 것이어서, 그 내용 중 출생년도에 대하여 분석하고, 사서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그리고 화랑세기(花郞世紀)의 기록을 참고하였고, 요즈음 국내에서 출간된 김지장에 관한 각종 인쇄물을 참고 하였으며, 중국 사수전 교수의 논문을 참고 하였다.
사수전 교수의 논문을 참고한 것은 그가 김지장의 출생년대를 서기 696년이라고 주장했고, 김지장이 곧 신라 33대 성덕왕의 장자인 김수충(金守忠)일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Ⅱ. 본 론
1. 김지장(金地藏)의 출생과 신분
중국 안휘성(中國 安徽省)의 구화산(九華山,九子山이라고도 불렸음)을 중국 4대 불교명산(四大 佛敎名山)중의 하나로 만든 김지장.
신라국 왕자이고 김씨근친(金氏近親)이며 24세에 출가(出家)하여 중국 구화산에서 99세까지 불도(佛道)에 정진하다가 열반(涅槃)에 들었고, 그가 열반에 들때 “산이 울리고 돌이 굴러 내렸으며 대지에 신광(神光)이 번쩍이고 뭇 새들이 구슬피 울었으며 법당의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고 큰 돌이 소리없이 떨어졌으며 ,화성사(化城寺)의 종(鐘)은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하고 또 석함(石函)속에 육신(肉身)을 넣고 뚜껑을 닫은 지 3년 후에 개옹(開甕)해보니 용모가 생전과 다름없었고, 근골(筋骨)을 건드리니 쇠사슬(金鎖)소리가 나서 불경(佛經)에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에 관한 내용과 같은 현상이므로, 사람들이 지장보살의 현신(現身)으로 여겨 육신보전탑(肉身寶殿塔)을 세우고 그 안에 등신불(等身佛)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 후 화성사(化城寺)가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는 화성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과 전설의 주인공.
그러나 현재, 그가 누구였는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의 불교계 및 학계에서는 중국측 학자의 주장을 아무 여과 없이 받아들여, 성덕왕장자설(聖德王長子說)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성덕왕장자설은 아버지인 성덕왕이 8-9세미만 시에 아들이 출생해야 되는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중국측 학자의 주장에는 그것이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면 정말 김지장(金地藏)은 어느 때 태어났으며 신라(新羅) 어느 왕의 아들이며 그의 정확한 신분은 무엇일까?
중국측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당 원화(唐 元和)8년(A.D.813년)에 쓰여졌다고 하는 구화산 화성사기(九華山 化城寺記)에 “개원말년(A.D. 741년)때 중 지장이 있었다. 그는 신라왕자이며 김씨 근속이었고 99세로 정원 10년(A.D.794년) 여름에 제자들과 이별을 고하고 홀연히 열반 하였다(開元末年時有僧地藏 則 新羅國王子 金氏近屬 時年 九十九歲 貞元 十年夏 忽召徒衆告別)”의 기록을 인용, 역산(逆算)하여 김지장은 당 무측천만세통천(唐 武則天萬歲通天) 원년(A.D.696년)에 출생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동판(銅版)의 기록을 보면
“신라국 왕자이며 성은 김씨요 이름은 교각이다. 당 정관2년(A.D.628년) 7월 30일에 태어났다(新羅國王子 姓金 名喬覺 唐 貞觀二年 七月三十日生)”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생년대에 있어 화성사기(化城寺記)의 기록과 동판의 기록은 무려 68년의 차이가 나는데, 동판의 기록은 생일(生日)까지도 정확히 밝히고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기록인지 알 수 없으니 다만 두 기록을 비교하여 연구 해볼 수밖에 없다.
다만 김지장(金地藏) 또는 김교각(金喬覺)은 신라의 왕자 신분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김지장(金地藏)이 오용지(吳用之)에게 써서 주었다는 수혜미(酬惠米)라는 시(詩)가 전해져 오는데, 여기에도 그 자신이 왕자의 신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의 왕자로되 어느 시대 어느 왕의 아들이며, 무슨 사유로 왕자의 신분을 벗어 던지고 출가(出家)하여 불법(佛法)을 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은 연구자의 과제일 것이다.
酬 惠 米
金 喬 覺
弁劫金鑾納布依 浮海修身到華西
原身乍是尊王子 慕道相逢吳用之
來散扣門求他語 昨叮送米續農炊
而今餐食黃精飯 腹飽忘思前日饑
「비단옷 포의로 갈아입고 바다건너 도를 구하려
구화산을 찾아왔다네.
나는 본디 왕자였다오.
수행의 길에서 사모하는 오용지를 만났네.
가르침을 주는 것만도 고맙거늘
이제는 이렇게 쌀까지 보내왔다네.
반찬을 준비하고 좋은 쌀로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고 나니 지난날의 배고픔 모두 잊어 버렸네.」
2.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
삼국사기에 그 이름과 신라왕자라고 신분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가 신라 어느 왕의 왕자인가에 대하여 논란을 빚고 있는 사람이 바로 김수충이다.
그가 성덕왕 13년인 서기 714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숙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김수충이 성덕왕의 장자였다고 주장하는 성덕왕장자설이 있으나, 모든 상황을 정밀하게 검토해 본 결과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였음에 틀림없다.
신라 32대 효소왕은 31대 신문왕의 맏아들 이홍(理洪)으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7년(A.D.687)조에, "봄 2월에 맏아들이 태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효소왕은 서기 687년 봄2월에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문왕 11년(A.D.691)조에, "봄 3월1일 왕자 이홍을 태자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32대 효소왕 원년(A.D.692) 조에는,"효소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이요. 신문왕의 태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33대 성덕왕 원년(A.D.702)조에, "성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이요 신문왕의 둘째아들이다. 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라는 기록을 검토해 볼 때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들이 없어 효소왕의 동복동생이었던 흥광이 왕위에 올랐고 이가 곧 성덕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소왕이 죽었을 때까지도 김수충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김수충이 효소왕의 동생이었던 33대 성덕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있을까?
그러나 동복형인 효소왕이 687년 2월에 태어났으므로 성덕왕은 아무리 빨라도 서기 688년에야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고, 성덕왕이 15세쯤은 된 702-703년쯤이 되어야 아들을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덕왕은 704년에 이르러서야 첫 혼인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성덕왕에게는 두 명의 왕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1비인 엄정왕후(嚴貞王后 또는 陪昭王后[배소왕후]라고도 한다)
제2비인 소덕왕후(炤德王后)가 그들이다.
제1비인 엄정왕후는 성덕왕 3년(A.D.704) 5월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아 장자인 중경을 낳아 왕 14년(A.D.715)에 태자로 봉했으나 왕 16년(A.D.717)에 이르러 요절하고 만다.
제2비인 소덕왕후는 성덕왕 19년(A.D.720) 3월에 이찬 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으며, 성덕왕의 2자 승경(承慶, 34代 孝成王), 3자 헌영(憲英, 35代 景德王)그리고 이름미상의 4자인 왕자 1명 등 3명의 아들을 낳고는 성덕왕 23년(A.D.724) 12월에 죽는다.
따라서 이 내용을 도표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성 덕 왕 (재위:A.D.702-7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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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비 제2비
엄정왕후 소덕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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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승경 헌영 ?
(요절) (34대 효성왕) (35대 경덕왕) (실명)
A.D.717년 6월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13년(A.D.714)조를 보면,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보내어 숙위를 들게 하니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회청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성덕왕 15년(A.D.716) 3월조를 보면,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데 비단 500필, 밭200결 벼1만석 집 한 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집을 사서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를 매우 헷갈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수충은 신라 어느 왕의 왕자였으며, 이 성정왕후는 과연 어느 왕의 왕비였던 것이며, 그녀는 무슨 이유로 궁에서 나가야 했던 것일까?
어느 사람은 성정왕후가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혼인했던 첫 부인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무언가 죄를 짓게 되어 폐출되었고, 그녀의 아들인 김수충도 그러한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죄를 짓고 출궁을 당했다면 그 많은 재물을 주어 궁에서 내 보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어 그녀가 성덕왕의 형이었던 효소왕의 왕비였고, 효소왕이 죽었을 때 임신 중에 있었고 그 후에 왕자인 김수충을 낳았다면 신라 왕실에서는 효소왕의 유복자로 태어난 왕자 김수충과 효소왕비 성정왕후에 대한 예우를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일반적으로 효소왕이 죽었을 때 효소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효소왕의 동생이 왕위에 임시로 올랐다가 효소왕의 아들이 성장한 후 그를 태자로 봉했다가 그에게 왕위를 돌려주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효소왕의 동생이었던 성덕왕은 왕위에 올라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봉해 왕위를 물려주려고 기도하게 된다.
형의 아들인 김수충이 걸림돌이 되자 성덕왕은 그를 714년에 당나라로 숙위 보내고 715년 12월에 이르러 자신의 장자인 중경을 태자로 책봉하고, 716년 3월에 형수인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때 성정왕후는 아마 그러한 조치에 심하게 반발했을 것이나 어쩔 수 없이 궁에서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성정왕후와 김수충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이는 717년 6월에 이르러 태자로 책봉되어 있던 중경이 요절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신라에는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그러자 김수충의 어머니인 성정왕후는 그때까지도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당나라에 가 있던 아들 김수충을 9월에 이르러 급히 귀국시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아들인 김수충을 태자로 책봉하고자 하는 의도였음에 틀림없다.
김수충은 702년에 태어나 13세인 714년에 당나라에 숙위로 가게 되었고,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16세의 어엿한 청년이 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성덕왕은 태자 자리가 비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장조카인 김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고, 720년에 이르러 다시 소덕왕비를 맞아들여 아들을 낳은 후 자신의 나이 어린 아들 승경을 태자로 봉하는 것이다.
기록을 확인해 보면,
성덕왕 16년(A.D.717년) 6월, "태자 중경이 죽었다. 시호는 효상이다"라는 기록과
9월조의, "가을9월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김수충이 돌아왔는데 문선왕(공자)과 10철 72제자의 초상화를 바치매 즉시 대학에 비치하였다(秋九月 入唐 大監 守忠 廻 獻 文宣王 十哲 七十二弟子圖 卽置於大學)" 라는 기록,
그리고 성덕왕 23년(A.D.724년) 조의,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았다"라는 기록과
효성왕 원년 조의, "효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경이요. 성덕왕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이다"라는 기록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김수충은 성덕왕의 아들이 아니라 사실은 효소왕의 유복자 아들이었던 것이다.
즉 수충은 효소왕과 성정왕후 사이에서 입태 되었으나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가 효소왕의 동복동생인 성덕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야 태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김수충은 서기 702년쯤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김수충이 성장한 후에도 성덕왕은 왕위 계승서열 1위였을 형(효소왕)의 아들인 김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은 채 당나라에 숙위로 보낸 후 자신의 장자였던 중경을 태자로 봉하자 효소왕비였던 성정왕후는 어쩔 수 없이 출궁하게 되었고, 성덕왕은 형수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내보냈던 것이다.
뒤에 성덕왕의 태자로 봉해졌던 중경이 요절했고, 당나라에 갔던 수충이 귀국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에도 성덕왕은 자신의 혈손으로 왕위를 잇겠다는 집념으로 다시 소덕왕비를 맞아들여 아들을 낳아 그를 태자를 봉했는데, 그가 바로 34대 효성왕 승경이었다.
김수충은 그 아버지 효소왕이 몇 년 만 더 살았더라면 신라의 왕위에 오를 인물이었으나 불운하게도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그 아버지 효소왕이 일찍 죽는 통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신라왕자였다.
김수충의 행적은 이후의 기록에서는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던 것일까?
3. 김교각(金喬覺,金地藏)은 김춘추(金春秋)의 아들 김문주(金文注)
동판(銅版)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가 김지장(金地藏)으로 알고 있는 신라의 왕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교각(喬覺)이며 당(唐) 정관(貞觀) 2년(A.D.628년) 7월30일에 출생하였다고 되어 있다.
당(唐) 정관(貞觀) 2년이라면 신라 진평왕(眞平王) 50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진평왕의 가계(家系)는 어떤가를 알아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더 상대(上代)로 올라가 진흥왕(眞興王) 대에서부터 살펴보아야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그 가계(家系)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신라 진흥왕 가계도]
24代 진 흥 왕
(생몰:A.D.534-5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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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 금륜 장자 동륜
25代 진지왕 (요절)
(재위:A.D.576-5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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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춘(또는용수) 국반갈문왕 백정
(또는 국기안 갈문왕) 26代 진평왕
(재위:A.D.579-6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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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승만 덕만
29代 태종무열왕 28代 진덕여왕 27代 선덕여왕
(재위:A.D.654-661년) (재위:A.D.647-654년) (재위:A.D.632-6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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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민
30代 문무왕
(재위:A.D.661-681년)
김교각(金喬覺)의 출생년도(出生年度)는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50년(A.D.628년)에 해당되는 해이다.
따라서 진평왕(眞平王)은 이미 노쇠 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선덕여왕(善德女王) 원년(A.D.632년) 조에, “王(眞平王)薨 無子 國人立德曼 上號 聖祖皇姑”「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매, 나라사람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칭호를 올려 성조황고라고 하였다.」하였으므로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음이 확인 되었고, 따라서 김교각(金喬覺)이 진평왕(眞平王)의 왕자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아들일 가능성은 있는가?
화랑세기(花郞世紀) 13세 풍월주(風月主) 용춘공(龍春公) 조에,
“선덕공주(善德公主)가 점점 자라자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太陽)의 위용(威容)은 왕위를 이을 만하였다. 그때는 마야왕후(摩耶王后)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眞平王)은 선덕공주를 마음에 두고 장녀(長女)인 천명(天明)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하였다.
선덕(善德)은 용춘공(龍春公)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私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眞平王)이 이에 용춘공(龍春公)에게 선덕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善德)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용춘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명을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하자 용춘공(龍春公)을 지아비로 삼았는데 공(公)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선덕은 이에 정사(政事)를 을제(乙祭)에게 맡기고, 용춘공(龍春公)에게 물러나 살기를 허락하였다...... 물러난 용춘공은 천명공주(天明公主)를 처(妻)로 삼고 김춘추(金春秋)를 아들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선덕여왕(善德女王) 원년 조에,
“진평왕때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병풍과 꽃씨를 덕만(선덕공주)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이 비록 곱기는 하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하였다.진평왕이 웃으며“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를 알았습니다(前王(眞平王)時 得自唐來 牧丹花圖幷 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 王(眞平王)笑曰 爾何以知之 對曰 畵花而無蝶 故知之)”라는 기록과
또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奇異) 제1 선덕여왕(善德女王) 지기삼사(知畿三事) 조에,
“당 태종 초에 붉은빛,자주빛,흰빛의 세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그림과 그씨 석되를 보내온 일이 있었다.왕(선덕여왕)은 모란꽃그림을 보고
“이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初唐太宗 送畵牧丹 三色 紅紫白 以其實三斤 王見畵花曰 此花定無香)”
또 “왕(선덕여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남편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王曰 畵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禑也)”라는 기록을 볼 때 선덕여왕의 남편은 당(唐) 태종 초(唐太宗 元年은A.D.626년)에 없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9년 5월 조에,
“9년(A.D.640년) 여름 5월 왕이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어 국학에 입학하기를 청하였다(九年夏 五月 王遣子弟於唐 請入國學)”고 한 것은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를 지칭한 것일 뿐, 왕자를 지칭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김교각(金喬覺)의 출생년도가 서기 628년이므로 따라서 김교각은 선덕여왕의 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신라 28대 왕인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아들일 가능성은 있는가?
진덕여왕은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 또는 國其安 葛文王이라고도 한다)의 딸이다. 따라서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은 4촌간이 된다.
선덕여왕은 진흥왕(眞興王)의 태자였던 동륜(銅輪, 요절)의 장자인 백정(白淨, 眞平王)의 딸이고,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생의 딸이므로 선덕여왕보다 나이가 어릴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가 있다. 진덕여왕은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조에,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승만이다. 승만은 몸이 풍만하고 아름다우며 키가 7척(161cm)에 이르고 팔이 길어, 내리면 무릎아래까지 닿았다(眞德王立 名勝曼 勝曼姿質豊麗 長七尺 垂手過膝)”고 하였고, 김교각에 대한 화성사기(化城寺記)의 기록에 그의 신체적 특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정수리 뼈가 기이하게 튀어나왔고 신장은 7척(161cm)에 이르고 힘이 장사였다(頂聳骨奇 軀長七尺 而力倍百夫)”라고 기록되어 있어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비슷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어머니의 외형을 닮은 아들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제2 김유신(金庾信) 조에
“영휘 5년(A.D.654년) 진덕여왕이 죽었으며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라는 기록에 미루어 진덕여왕(眞德女王)에게도 아들이 없었음이 확인 되었다.
따라서 신체적인 특징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김교각(金喬覺)이 신라 28대 진덕여왕의 아들은 아닌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아들일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태종무열왕은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의 손자(孫子)이다.
따라서 선덕여왕(善德女王), 진덕여왕(眞德女王)과는 6촌간이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奇異) 제1 태종 춘추공(太宗 春秋公) 조에,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59세로 죽어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碑石)을 세웠다는 기록을 참조하여, 삼국사기의 연표(年表)에 따라 역산(逆算)해보면 김춘추는 서기 603년에 태어나 서기 661년 6월에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비(妃)인 문명왕후(文明王后, 蘇判 舒玄의 막내딸이며 金庾信의 누이동생)와 혼인하게 된 일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文武王)(상)조에 기록되어 전해져 오고, 그때 낳은 첫아들이 후일에 신라 30대 문무왕이 되는 법민(法敏)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면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본명은 김문희)가 서기 몇 년쯤 혼인 하였을까? 그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대강의 윤곽을 알 수 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奇異) 제1 태종 춘추공 조에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유신의 누이동생(문희:후일의 문명왕후)과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은 그의 누이동생이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너는 부모님도 모르게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해괴한 일이냐?”그리고는 온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의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에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하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이 “그것은 너의 소행이로구나. 빨리 가서 구해 주도록 하라”하였다.
춘추공은 선덕여왕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公(春秋)知 庾信之意 遂幸之 自後 數數來往 庾信知其有娠 乃嘖之 曰 爾不告父母有娠何也 乃宣言 於國中欲焚其妹 一日 矣 善德王 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 何烟 左右奏曰 殆 庾信之焚妹也 王問其故 曰 爲其妹 無夫有娠 王曰 是誰所爲 時公 昵侍在前 顔色大變 王曰 是汝所爲也 速往求之 公受命 馳馬 傳宣沮之 自後 現行 婚禮)”
라고 하였으므로 따라서 김춘추가 김유신(金庾信)의 막내 누이동생 문희(文姬)와 혼례를 올린 때는 선덕여왕(재위:A.D.632-647년) 재위기간 내가 되는데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인 서기 632년은 김춘추의 나이 30세가 되는 해였다. 따라서 선덕여왕 원년에 혼인을 하였다 해도 기록에 보이는 김춘추의 장자인 법민(法敏, 후일의 文武王)의 출생년도는 서기 632년 또는 그 이후가 되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태종 춘추공(太宗 春秋公) 조에
“왕(태종무열왕)은 하루에 쌀 세말밥과 꿩9마리를 먹었다. 경신년(A.D.660년,태종무열왕58세시)백제를 멸망 시킨후로부터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저녁만 먹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말,술 여섯말,꿩 10마리를 먹었다(王膳一日 飯米三斗 雄稚九首 自 庚申年 滅百濟後 除晝膳 但 朝暮而己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과장이야 되었겠지만 상당한 대식가(大食家)이고 정력가였을 것이며, 젊은 시절의 김춘추는 어떠하였을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왕성한 정력가였고 귀족계급의 자제(子弟)인 김춘추가 왜 나이 30살이 되어서야 늦게 혼인을 하는 것일까?
그것도 친구의 여동생과 혼전관계를 맺음으로서 혼전임신이 된 후 부랴부랴 혼인식을 올리는 것이다.
김교각(金喬覺)이 태어난 해는 서기 628년으로서 김춘추의 나이 26세 되는 해이다. 김춘추의 장남인 법민(法敏)의 출생년도가 서기 632년 이후일 것이므로 기록상으로 김교각은 김춘추의 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나타난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상 성년(成年)이 되면 배필을 구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김춘추는 나이 30살이 되어서야 혼인을 하는 것이다. 대략 10년이라는 기간이 공백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선덕여왕(善德女王) 11년 (A.D.642년)가을 8월 조에,
“...이달에 백제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니 도독 이찬 품석(김춘추의 사위)과 사지죽죽 용석등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대야성전투에서 신라가 패하고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으니 이는 춘추의 딸이다. 춘추가 이 소식을 듣고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사람과 물건이 앞을 지나가도 모르더니 얼마 후에 ‘어허, 대장부가 아무런들 백제하나 삼키지 못하랴.’하고 말하였다.(...是月 百濟將軍 允忠 領兵攻拔大耶城 都督 伊湌 品釋,舍知 竹竹, 龍石等 死之........初大耶之敗也 都督 品釋之妻 死焉 是春秋之女也, 春秋聞之 徛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 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 豈不能呑百濟乎)’”는 기록을 보면 서기 642년에 이미 성장한 딸이 있어 품석(品釋)에게 시집보냈음을 알 수 있는데 김춘추의 장자인 법민의 출생년도가 서기 632년 이후가 되므로 대야성 전투(大耶城 戰鬪)에서 죽은 춘추(春秋)의 딸은 법민의 동복 여동생(同腹 女同生)은 아니고, 이복(異腹)누나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따라서 김춘추는 문희(후일의 문명왕후)와 혼인하기 전에 이미 부인이 있었거나 또는 사별(死別)한 상태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화랑세기(花郞世紀) 18세 풍월주(風月主) 춘추공(春秋公) 조에
“18세(世) 춘추공(春秋公)은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이다. 얼굴이 백옥(白玉)과 같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 하였다. 커다란 뜻이 있었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
유신공(庾信公)이 위대한 인물로 여겨 군(君)으로 삼았으나 춘추공은 사양하여 부제(副弟)가 되었다. 유신공이 퇴위(退位)하였으나 보종(寶宗)과 염장(廉長) 양공(兩公)이 있었기에 춘추공은 양보하여 기다렸다. 이에 이르러 풍월주(風月主)에 오르니 보령(寶齡)이 24세였다.
유신공의 누이동생 문희(文姬)를 화군(花君)으로 삼아 장자 법민(法敏)을 낳았는데 곧 우리 문무제(文武帝)이다.?
또, “유신(庾信)이 보희(寶姬, 문희의 언니)에게 시키고자 하였는데 병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문희(文姬)가 이에 나아가 바느질을 하여 드렸다. 유신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춘추공이 이에 사랑을 하였다. 1년쯤 되자 문희가 임신을 하였다.
그때 춘추공의 정궁부인(正宮夫人)인 보라부인(寶羅夫人)은 보종공(寶宗公)의 딸이었다. 아름다웠으며 춘추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古陀炤)를 낳아 춘추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또 “포사(鮑祠)에서 (문희와) 길례(吉禮)를 행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보라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文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이 되어 아들(法敏)을 낳았다. 보희(寶姬, 문희의 언니)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춘추공은 이에 첩(妾)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고 하였다.
김춘추의 출생년도가 서기 603년이고 풍월주에 오른 때가 보령(寶齡) 24세라고 하였으므로 곧 서기 626년이 되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해는 서기 632년이므로 서기 626년은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선덕공주(善德公主) 시절이므로 김춘추와 문희(金庾信의 누이동생)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한 삼국유사 기이(奇異) 제1 태종춘추공 조에 나타나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라는 기록은 「선덕공주(善德公主)」라야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김춘추의 혼인시기가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춘추는 20세 전후에 첫 혼인을 하였고, 풍월주에 오르기 전 즉 김춘추의 나이 23세 때인 서기 625년 1월에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를 만나 약 1년간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다가 문희가 임신이 되면서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 선덕공주의 도움으로 사태를 수습하게 되고 드디어 정궁부인인 보라부인이 있음에도 문희와 혼례를 올리게 되는 것이다.
즉 이때까지도 김춘추의 첫 부인인 보라는 살아 있었고 둘 사이에 맏딸 고타소(古陀炤)가 있었다는 것이다.
서기 626년에는 김춘추와 김문희 사이에 장자인 김법민이 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김춘추는 풍월주(風月主)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태종 춘추공 조에는, “태자 법민,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단, 각간 지경, 각간 개원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들이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는 급간 개지문, 영공 거득, 아간 마득이다. 딸까지 합하면 모두 다섯이다(太子 法敏 角干仁問 角干文王 角干老旦 角干智鏡 角干愷元 等皆 文姬之所出也 當時買夢之徵現於此矣 庶子曰 皆知文級干 車得令公 馬得阿干 幷女五人)”라고 되어 있고,
화랑세기(花郞世紀) 13세 풍월주(風月主) 용춘공 조에는, “용산(龍山)의 누이 용태(龍泰)는 태종(金春秋)을 섬겨 각간(角干) 인태(仁泰)를 낳았다. 용주(龍珠)의 누이 용보(龍寶)는 태종을 섬겨 거득(車得), 마득(馬得) 양공(兩公)을 낳았다”고 되어 있으므로 김춘추의 아들들에 관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김춘추에게는 총 5명의 부인(夫人)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첫 부인은 보라(寶羅)인데 장녀인 고타소(古陀炤)가 있었고 그 후 고타소의 동생인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둘째부인은 문희(文姬, 後日의 文明王后)로서 법민(法敏), 인문(仁問), 문왕(文王), 노단(老旦,老且라고도 한다), 지경(智鏡), 개원(愷元)을 낳았으며,
셋째부인은 보희(寶姬, 文姬의 언니)로서 지원(知元), 개지문(皆知文)을 낳았고
넷째부인은 용태(龍泰)로서 인태(仁泰)를 낳았으며
다섯째부인 용보(龍寶)는 거득(車得,차득이라고도 한다), 마득(馬得)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춘추에게는 두 명의 정궁부인(正宮夫人)으로부터 6명의 아들이름이 보이고, 세 명의 첩(妾)으로부터 5명의 아들이 있어 총 11명의 아들이름이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A.D.648년) 겨울 조에
“이찬 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遣伊湌 金春秋 及 其子文王 朝唐)”
“춘추가 아뢰되 신에게 아들일곱이 있아온 바 황제님 곁을 떠나지 않고 숙위케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황제가 곧 그(춘추)의 아들 문주와 대감□□를 명하여 숙위하게 하였다(春秋 奏曰 臣有七子 願使不離 聖明宿衛 及命 其子 文注 與大監□□)”는 기록을 보면 김춘추에게는 앞의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은 또 한명의 아들인 「문주(文注)」가 있었다는 말이 되고, 김춘추의 나이 46세 때인 서기 648년에 이미 7명의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춘추가 말한 일곱 아들이 과연 정궁소생(正宮所生)만을 일컬은 것인지 아니면 서자(庶子)까지를 일컬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적서(嫡庶)를 엄격히 따지는 때에 중국 당나라의 황제(皇帝)에게 낮은 신분의 서자(庶子)까지를 포함하여 말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록에 보이는 문희소생(文姬所生)의 여섯 아들과 또 하나의 아들이 정궁소생(正宮所生)으로 존재해야 되는 것이다.
기록에는 김춘추에게는 두 명의 정궁부인(보라부인, 문명왕후)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문희 소생의 여섯 아들이 정궁소생(正宮所生)이므로 또 하나의 아들은 보라부인의 소생이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라는 딸 고타소(古陀炤)가 있었으나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보이므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춘추의 아들 「문주(文注)가 곧 보라부인의 소생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서기 626년 김춘추와 문희(文姬)가 혼례를 올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보라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하였으므로 과연 이 「얼마 안 있어」란 기록이 어느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으나, 길게 보아 2-3년 정도를 의미한다면 보라는 아이를 낳은 후, 그 후유증으로 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그때 낳은 아이가 아들이고, 그 이름이「문주(文注)」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으며, 김춘추의 장자는 법민(法敏)으로 기록되고 있으므로 김춘추와 보라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장자인 법민보다는 뒤에 태어난 말하자면 법민의 이복동생(異腹同生)이어야 하는 것이다.
법민이 서기 626년에 태어났다고 보면 문주(文注)는 법민(法敏)의 동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 648년에 춘추의 아들로서 중국황제(唐 太宗)의 명에 의하여 숙위(宿衛)하게 되는 「문주(文注)」는 그 이후의 기록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숙위하게 된 당시, 아마도 건장한 청년이었을 「문주(文注)」가 기록에서 사라지고, 그 이후, 그의 아버지인 춘추와 문주의 배다른 형제들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통합하려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그 와중(渦中)에도 그의 이름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김교각(金喬覺)은 24세에 출가(出家)하였다고 전해지고 있고, 동판(銅版)의 기록에 의하면 정관(貞觀) 2년(A.D.628년)에 태어났다고 하였으므로 보라부인이 낳다가 죽은 바로 그 아이가 문주(文注)이고, 그가 곧 김교각(金喬覺)이라면 그는 21세의 한창나이에 숙위하게 되었고, 그 후 약 3년 후쯤 출가(出家)하게 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중국 황실에 숙위로 있으면서 중국의 여러 문물을 접했을 것이고, 불교(佛敎)에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며, 당 태종(唐 太宗)이 죽고 당 고종(唐 高宗)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이별을 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따라서 양(養)어머니의 손에 맡겨져 양육되었을 가엾은 어린애.
성장한 후, 자기가 태어나면서 친어머니는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충격과, 마음속으로 의지했을 친누나 고타소(古陀炤)와 매형(妹兄)인 품석(品釋)마저 백제(百濟)와의 대야성전투(大耶城戰鬪, A.D.642년)에서 전사(戰死)하자 15살의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한없이 방황해야 했던 소년 문주(文注).
그러다가 성장하여 아버지인 김춘추를 따라 중국에 사신 일행으로 가게 되었고 당나라 황제가 지명하여 숙위로 머무르게 된 청년 문주(文注).
그 후의 역사기록에서 그 형제들과는 달리 사라져버린 「문주(文注)」
김교각(金喬覺)에 관한 전설에 김교각이 어머니를 남다르게 애틋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혹시 이러한 숨겨진 사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가 속세(俗世)를 벗어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를 벗어보고자 했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신라의 왕비가 아들을 찾아 구화산(九華山)까지 왔다갔다는 전설은, 비록 생모(生母)는 아닐지라도 김교각을 친아들처럼 키웠던 양어머니는 그 후 김교각을 찾아 중국의 구화산(九華山,九子山이라고도 한다)까지 갔다온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이백(李白, A.D.701-762년)이 구화산(九華山)을 찾아 왔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김교각의 출생연도를 따져볼 때 아마도 이백이 젊은 시절일 것으로 이미 노승이 되어 있는 김교각과 만나지 않았나 보여지고, 이백이 지었다는 “지장보살찬(地藏菩薩讚)”이라는 시(詩)는 김교각이 열반(涅槃)한 이후 즉 등신불(等身佛)이 된 이후에 그의 공덕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지어졌을 것이므로 이백(李白)이 김교각(金喬覺)보다 먼저 죽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교각은 죽고 나서 등신불이 된 이후에 세상 사람들이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교각에 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정성들여 만든 흔적이 엿보이는, 그리고 신라왕자 김교각의 생몰연대가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본 연구자가 가지고 있는 동판(銅版)의 기록뿐이다.
Ⅲ.결 론
지금까지 김지장(金地藏) 즉 김교각(金喬覺)이 신라 어느 왕의 왕자였을까 하는 것을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효소왕(孝昭王, 32대)의 아들일 수 없고,
성덕왕(聖德王, 33대)의 아들이기 위해서는 아버지인 성덕왕이 8-9세 미만 시에 아들을 낳아야 된다는 생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고,
또, 진평왕(眞平王, 26대)의 아들일 수도 없고,
선덕여왕(善德女王, 27대)의 아들일 수도 없고,
진덕여왕(眞德女王, 28대)의 아들일 수도 없다.
시기적으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29대) 김춘추(金春秋)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교각(金喬覺)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일 것이라는 것이 최종 결론이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한 김교각(金喬覺)의 출생 시기는 연대가 맞지 않고 해당연도에 출생한 왕자가 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아마도 기록이 잘못되지 않았나 보여진다.
중국 측 기록과 동판(銅版)의 기록에 따라 모든 가능성 있는 왕들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김춘추(金春秋)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김춘추의 아들 중 혹시 “문주(文注)”가 아닌가 생각되며, 따라서 그의 어머니는 보라부인(寶羅夫人)일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도 구화산(九華山) 화성사(化城寺) 육신보전(肉身寶殿)에 등신불(等身佛)이 되어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는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 신라왕자(新羅王子) 김교각(金喬覺)은 신라(新羅)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아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