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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잃어버린 나라 동부여는 대흥안령 서쪽 내몽골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6. 09:01

윤여동설 - 잃어버린 나라 동부여는 대흥안령 서쪽 내몽골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부여는 셋이다.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가 그것이다.
 
☆ 후일 백제의 성왕이 웅진으로부터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고 있으나, 이후에도 백제는 남부여라 하지 않고 백제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백제는 졸본부여의 후예가 세운 나라였다. 
  
  북부여의 건국시조는 천제 해모수이고,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는 동명왕이며,
  동부여의 건국시조는 해부루왕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1 북부여 조에는,
  "고기에 말하기를,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B.C.59)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 의주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다.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하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고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북부여의 시조가 해모수임을 밝히고 있고,

  범장의 북부여기 하(졸본부여) 부여두막 계유 원년(B.C.108) 조에는,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졸본부여의 건국시조가 동명왕임을 밝히고 있고, 졸본부여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108년이라 함으로써 위만조선이 한 무제에 의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는 혼란한 시기에 졸본부여가 건국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북부여기 상 해우루 갑오 34년(B.C.87) 조를 보면,
  "10월 동명왕 부여두막이 사람을 보내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하게 여겨 마침내 걱정으로 병을 얻어 죽고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했는데 동명왕이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협박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국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통하의 물가 가섭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여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동부여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북부여기 하 부여두막 을미 23년(B.C.86) 조에는,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했는데, 여러 차례 사직을 보전하기를 애원하므로 단제(동명왕)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 치고 나팔불며 수만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들어가 북부여를 접수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북부여가 졸본부여 동명왕에 의해 멸망했음을 알게 하고,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쫓겨가 다시 동부여를 건국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삼국유사 동부여 조에도,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대신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도록 하라.[이는 동명이 장래 흥기할 징조이다] 동해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하다' 하였다.
  이에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해부루가 졸본부여의 동명왕에게 쫓겨 가섭원으로 가서 동부여를 다시 세웠음을 확인시켜 주는데, 사서에 기록된 부여는 대개 이 동부여에 관한 내용과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에 관한 기록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북사 백제전에는, 
  "백제국은 대개 마한에 속했는데,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
  왕(색리국왕)이 출행 중에 시녀가 임신을 하여 왕이 환궁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더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서 큰 계란 만한 기(氣)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감응하여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여, 왕이 그 시녀를 살려 주었다.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버렸더니 말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그 아이를 기르도록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여 활을 잘 쏘자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려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동명이 도망하여 남쪽의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은 그를 딛고 강을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帶方)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
  원래 백가(百家)가 건너왔다고 하여 백제(百濟)라고 했다고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동명왕이 백제의 선조임을 밝히고 있다.

 

☆ 동명왕은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를 말하는 것으로서 백제 시조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구려는 북부여의 맥을 잇고, 백제는 졸본부여의 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몽은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온 후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동명왕의 아들인 2대 부여무서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한 후 졸본부여의 왕위를 물려받았다가 21년이 지난 후 졸본부여를 없애고 고구려를 건국했으므로 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틀린 것이다. 주몽은 동명성왕이 아니라 추모왕이라 해야 옳다.   
  
  그렇다면 부여는 어디에 위치했던 나라였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부여의 위치를 압록강 북쪽 지역에서 찾으려 했는데, 그것이 과연 사실일 수 있는 것인지 중국 정사 부여전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자. 
 후한서 부여국전(後漢書 夫餘國傳)에는,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濊)의 땅이었다.

 

☆ 부여의 강역이 본래는 예의 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후대의 기록들에는 예, 맥이 신라의 북쪽에 위치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동부여가 예의 땅을 빼앗아 건국되었음을 알 수 있고, 예는 다시 동쪽으로 쫓겨가 임둔군 땅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곧 진한(신라)의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는 동예이다.  
  후한서 예전에는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내속했으므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동이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원래의 창해란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을 말하는 것인데, 후일 예가 그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고 대흥안령을 넘어 동쪽의 임둔군 땅으로 옮겨가 동예를 세우자 창해군의 명칭도 따라갔던 것으로 나타난다. 동예는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전에 북이 색리국 왕이 출행을 하였는데, 그 시녀가 이미 임신되어 있음을 알았다.

  왕이 환궁한 후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로부터 큰 계란 만한 기가 나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임신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 북이 색리국은 지금의 몽골이나 내몽골에 위치했던 나라였을 것이다.

 

  왕이 시녀를 옥에 가두어 두었는데, 그 후 곧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명을 내려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다시 마굿간으로 옮겼더니 말 역시 같았다.
  왕이 신의 뜻임을 알아차리고 어머니의 청을 들어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려 다시 죽이려고 하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에 이르러 활을 물에다 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물위로 떠올랐다. 동명이 그를 타고 강을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 동명은 색리국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기원전 108년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졸본에 도읍하고 왕위에 오른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로서 기원전 86년에 이르러서는 북부여를 멸망시키고, 병합시킴으로써 나라가 커졌다. 그 북쪽에는 해부루가 다시 동부여를 건국했는데, 사실 이 후한서 부여전의 기록은 졸본부여의 동명설화와 동부여에 대한 기록이 혼합되어 있다.
      
  (부여는) 동이 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데, 토질은 오곡이 잘된다.
  명마와 적옥과 담비와 살쾡이 가죽, 대추만큼 큰 구슬이 생산된다.

 

☆ 부여가 땅이 평탄하고 명마가 산출된다는 것으로 보아 부여는 초원 평원지대에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내몽골, 몽골 평원을 말하는 것이다. 
       
  목책으로서 성을 만드는데, 궁실과 창고, 감옥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강건하며, 용감하고 근면하고 후덕하여 노략질은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사용한다.
  여섯 가지 가축으로 관명을 삼아 마가·우가·구가 등이 있는데, 그 읍락의 주인들은 모두 여러 가(加)들이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에는 조두(俎豆)를 사용하며, 회동 시에는 배작(拜爵)과 세작(洗爵)의 예가 있고, 출입 시에는 읍양(揖讓: 절)의 예가 있다.
  섣달(臘月)에 제천(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 하는데, 연일 크게 모여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름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 가을에 수확을 마친 후 큰 축제를 열었는데, 이를 부여는 영고(迎鼓)라 했고, 고구려는 동맹(東盟)이라 했으며, 예에서는 무천(舞天)이라 했다. 이는 풍년을 들게 하여 식량을 주신 하늘에 감사의 제사를 올리고, 농사를 짓느라 힘들었을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제도라 생각된다. 

 

  이 때에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
  군사에 관한 일(전쟁)이 있을 때는 역시 제천을 하는데, 소를 잡아 그 발굽을 가지고 길흉을 점친다.

 

☆ 소를 잡아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하고, 벌어지면 흉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니는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여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풍속은 형벌이 엄격하고 신속하다.
  사형을 당한 사람의 가족은 모두 노비로 삼고, 도둑질하면 열 두배로 변상해야 하고, 남녀가 간통을 하면 모두 죽인다.
  투기를 한 부인은 죽여 산 위에 시체를 버린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 부여에서는 성에 관한 사항과 도둑질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스렸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그들이 유목민족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제도 역시 옛날 유목민족에게 존재하던 제도인데,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산상왕이 죽은 형 고국천왕의 왕비를 다시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기록이 있어 부여와 가까운 고구려에도 유목민족의 관습이 남아 있었다고 보여진다.  

 

  사람이 죽어 매장할 때 곽은 있으나 관은 없고,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은 경우에는 1백 명 이상을 하기도 한다.
  그 나라 왕을 장사지낼 때는 옥갑을 사용하므로, 한나라에서는 항상 옥갑을 현토군에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왕이 죽으면 그 옥갑을 보내주어 장사지내게 하였다.
  건무(A.D.25∼55) 중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조공하고 황제를 뵈었다.
  건무 25년(A.D.49)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므로 광무제가 후하게 보답하니 이에 명을 받은 사신이 해마다 왕래하게 되었다.
  안제 영초 5년(A.D.111)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기병 7∼ 8천으로 낙랑(현토군의 오기?)을 약탈하고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였으나 그 후에는 다시 귀부하였다.

 

☆ 후한 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북쪽에 고구려 , 고구려의 서쪽에 현토군, 현토군의 북쪽 1천여리에 동부여가 위치했었기 때문에 후한 낙랑군과 동부여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동부여가 후한낙랑군을 약탈할 수는 없다. 현토군을 약탈한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59년(A.D.111) 조에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현토에 속하기를 요구했다[통감에는 이해 3월에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침범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요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공격한 것인지 알 수 없고, 기록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와 부여가 연합하여 현토를 공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영령 원년(A.D.120)에 태자 위구태를 보내어 조공을 바치므로 천자가 위구태(尉仇台)에게 도장과 금실을 넣어 짠 비단을 하사하였다.              
  순제 영화 원년(A.D.136) 그 왕이 직접 도읍으로 와서 조회하므로 황제가 지은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抵戱)를 공연하게 하여 구경시켜 보냈다. 
  환제 연희 4년(A.D.161)에 사신을 보내와 새해를 축하하고 공물을 바쳤다.
  영강 원년(A.D.167)에 왕 부태(夫台)가 장병 2만여 명을 이끌고 현토를 노략질하므로 현토태수 공손역이 격파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영제 희평 3년(A.D174)에 다시 글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부여는 원래 현토에 속했으나 헌제 때에 그 나라 왕이 요동에 소속되기를 요구하였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 부여전(三國志 夫餘傳)에는,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1천리 거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사방 2천리이며, 백성은 8만 호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농사짓고 살며, 궁실, 창고, 감옥이 있다.
  산과 능선이 많고, 넓은 못이 있으며, 동이지역에서는 가장 평탄하다. 
  토질이 오곡은 잘 되나 오과(과일)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강건하고 용감하며, 근엄하고, 후덕하여, 침략하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군왕이 있고, 여섯 가지 가축으로 관명을 정하였는데,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이 있고, 대사·대사자·사자가 있다.
  읍락에는 호족이 있으며, 하호라고 불리는 백성은 모두 노복이다.
   여러 가(加)들은 사방을 나누어 관장하였는데, 큰 곳은 수천 집이며, 작은 곳은 수백 집이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데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며, 회동시에는 배작(拜爵)과 세작(洗爵)의 예가 있고, 출입 시에는 읍양(揖讓: 절)하는 예가 있다.
  은력(殷曆) 정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나라에서 주관하는 큰 모임인데,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름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
  국내에 있을 때는 항상 흰옷을 입는데, 흰 베로 만든 큰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는 항상 수놓은 비단옷과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그 위에 여우, 살쾡이, 원숭이, 알록달록한 담비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으며, 금·은으로 치장한 모자를 쓴다.
  통역이 말을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고 조용조용히 이야기한다.
  형벌은 엄하고 신속하다.
  살인자는 사형시키고, 그 가족들은 모두 잡아들여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하면 열두 배로 변상해야 한다.
  남녀간에 간통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인다.
  부인이 투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버려 썩게 한다. 친정 집에서 시체를 가져 가려하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흉노의 풍습과 같다.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르며, 명마와 적옥, 담비, 원숭이가죽과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큰 구슬은 크기가 대추 만하다.
  활과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스스로 갑옷과 무기를 소지한다.
  그 나라 노인들은 자기들이 옛날 다른 곳으로부터 망명해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성책은 모두 둥글게 만드는데, 마치 감옥과 같다.
  길에 다닐 때에는 주·야,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온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군사를 움직일 때는 제천을 하는데, 소를 잡아서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친다.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다고 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여러 가(加)들이 스스로 전투에 참여하고, 하호(노비)는 식량과 음식을 책임진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어름을 넣어 장사지내고,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을 때는 1백여 명 되기도 한다.
  장사를 매우 후하게 지내는데, 곽은 있으나 관은 쓰지 않는다.
 
  위략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풍속은 다섯 달 동안 초상을 치루는데, 오래 둘수록 잘하는 것으로 여긴다.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날것과 익은 것을 함께 제물로 사용한다.
  상주는 빨리 장사지내고 싶어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강권하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는 것을 예의로 삼는다.
  상중에는 남녀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부인은 삼베로 만든 면의를 착용하며 반지나 패물 등은 차지 않는데, 대체로 중국과 서로 유사하다.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하였는데, 한나라 말에 공손도가 해동을 장악하고 웅거하며, 위력으로 외이들을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는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때 구려(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공손도는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어있게 되자 조카딸을 시집보내 처로 삼게 하였다.
  위구태(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위에 올랐는데, 적자는 없고 서자인 마여(麻余)가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 여러 가(加)들이 마여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죽은 왕의) 형 우가(牛加)의 아들 이름도 위거였는데, 대사가 되어 재물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위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정시(A.D.240∼248) 중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구려(고구려)를 토벌하려 할 때, 현토태수 왕기(王 )를 부여에 파견했었는데, 위거는 대가를 보내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백부인 우가(의 아들 위거)가 역심을 품자 위거(마여왕의 오기로서 그래야 문맥이 맞는다)는 백부부자를 죽이고, 재물을 적몰하여 관리를 보내 목록을 만들어 관에 보냈다.
  옛 부여의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 가뭄이나 장마가 들어 흉년이 들면 왕을 죽이기도 했다는 것은 정상적인 왕위계승에서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오랫동안 흉년이 들어 민심이 이반되어 역성혁명이나 왕위찬탈이 있었던 것을 잘못 기록했을 것이다.

 

  마여가 죽자 여섯 살인 그의 아들 의려(依慮)를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때에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으므로 한나라에서는 언제나 현토군에 미리 가져다 두었는데,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장사지냈다.  
  공손연이 주살된 뒤에도 현토군의 창고에는 옥갑 1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으로 만든 벽(璧), 규(珪), 찬(瓚) 등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 있어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 나라의 옥새에 濊王之印(예왕지인)이란 글자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이라 부르는 옛 성이 있으니 아마 이곳이 본래는 예맥의 땅이었으나, 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삼국지는 후한서와 달리 동명설화를 싣지 않고 있다. 이는 동명이 동부여와 관련이 없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서 부여국전(晉書 夫餘國傳)에는,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여 리에 있다.
  남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사방 2천리이고, 백성은 8만 호이다.

 

☆ 후한서와 삼국지는 부여(동부여)의 서쪽에 선비가 있다고 했으나 이 진서는 부여(동부여)의 남쪽에 선비가 위치했다고 위치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선비의 침공을 받고 도읍이 함락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선비에게 도읍을 함락 당하자 왕은 동쪽으로 도망치고, 일부 백성들은 북쪽으로 도망쳤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성읍과 궁실이 있으며, 토양은 오곡이 잘된다.
  그 사람들은 강건하고 용감하다.
  회동과 읍양(揖讓 :절)하는 예의는 중국과 유사하다.
  사신으로 나갈 적에는 비단이나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금·은으로 장식된 허리띠를 찬다.
  그 나라의 법에는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을 몰수한다.
  도둑질한 사람은 12배로 갚아야 하며, 남녀가 간통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인다.
  만약 군사를 움직일 일(전쟁)이 있게되면, 소를 잡아 제천하고,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을 순장하는데,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초상 때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면의(面衣)를 입는데, 옥으로 만든 패물은 차지 않는다.
  좋은 말, 담비와 살쾡이 가죽,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큰 구슬은 대추 만하다.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옛날부터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다.
  그 왕의 도장(옥새)에는 "穢王之印(예왕지인)"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 가운데에 옛 예성이 있는데, 그것은 본래 예맥[예]의 성이었다.
  (서진) 무제 때에는 자주 조공을 바쳤다.
  태강 6년(A.D.285)에 이르러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의려왕은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동쪽의) 옥저로 도망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무제가 조서를 내려
  "부여왕이 대대로 충효를 지키다가 악한 오랑캐에게 멸망하였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만약 그 족속가운데 다시 나라를 회복할 만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존립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유사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회와 전략을 상실했습니다." 하였다.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직시키고 하감을 대신 임명하였다.
  이듬해 부여의 다음 왕 의라가 하감에게 사자를 보내어, 지금 남아있는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 옛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며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감은 도독 가침으로 하여금 병사로서 호위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요로에서 지키고 있다가 가침과 싸웠는데, 모용외가 대패하여 그 무리가 퇴각하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모용외는 자주 부여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았다.
  황제는 그를 안타깝게 여겨 다시 조서를 내려 국고로써 그들을 다시 사들여 되돌려 보냈다. 사주(司州)와 기주(冀州)에 명해 부여 사람을 사고 파는 것을 금지시켰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부여에 대한 중국 정사의 기록은 대개 이 세 기록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데 기록들을 보면, 부여의 위치와 강역을,
  첫째, 장성의 북쪽에 위치하며, 현토군에서 1천여 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둘째, 부여의 동쪽에는 읍루, 서쪽에는 선비, 남쪽에는 고구려가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으며,
  셋째, 강역이 사방 2천리 정도로서,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탄하다라고 하고 있으며, 백성이 8만 호(약 40만 명)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강역이 사방 2천리이고, 백성이 3만호(약 15만명)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부여와 고구려가 강역의 크기는 비슷하나 백성의 숫자는 부여가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토군은 한사군이 설치되던 처음에는 옥저(동옥저)지역이었던 지금의 옹우특기 일원에 설치되었다가 기원전 82년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으므로 기록 속의 현토군이란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긴 이후의 현토군을 말한다고 할 수 있고, 약수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각 나라들의 위치를 감안할 때 지금의 바이칼호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결국 동부여는 내몽골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대흥안령 서쪽 내몽골 사방 2천여 리에 이르는 땅이 동부여의 강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몽골 정람기 부근이 동부여의 도읍 부여성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