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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태조대왕을 알면 고구려의 초기역사가 보인다(2)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16. 00:23

윤여동설 - 태조대왕을 알면 고구려의 초기역사가 보인다(2) - 최초주장

 

 

고구려의 왕권교체 - 연노부(소노부)와 계루부
     
  고구려 705년 역사에서 왕위 계승에 있어 성씨가 바뀐 시기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때는 해씨인 모본왕에서 고씨인 태조대왕으로 왕위가 이어지는 시기 밖에는 없다.
  따라서 모본왕 이전은 해씨였을 것이고, 태조대왕 이후는 고씨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삼국사기에도 5대 모본왕을 해우 또는 해애루로 기록하고 있고, 4대 민중왕을 해색주, 3대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여 그의 성명이 해주류였음을 확인해 볼 수 있고, 또 유리왕은 그 아버지 주몽의 원래 성씨가 해씨였으므로 그 아들인 유리왕 역시 해씨인 것이다.

 

☆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의 고손자이므로 당연히 그의 원래 성씨는 해(解)씨인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왕위가 주몽으로부터 모본왕까지는 연노부(또는 소노부) 출신으로서 해씨였고, 태조대왕 이후는 계루부 출신으로서 고씨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지 등에 고구려가 "원래 연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한다"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후한서에는 고구려에는 다섯 호족이 있었는데,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었다고 하고, 본래 소노부에서 왕이 되었는데, 점점 미약해진 뒤에는 계루부가 그 위치를 대신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소노부가 곧 삼국지의 연노부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고구려의 왕위가 해씨와 고씨 두 성씨로 이어졌다는 말로서 태조대왕 이후 고구려의 왕들은 모두 유리왕의 양자 재사의 후예들이었다는 말이 되니 재사가 유리왕의 양자가 되었던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 경우 태조대왕은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직계 조상들을 추증했을 것인데, 위나라 사람들이 추증된 왕과 실제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 왕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여달(여해) → 여율 →막래 → (재사) →궁으로 왕위가 이어졌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 삼국유사 왕력 편을 보면, 유리왕, 대무신왕, 민중왕의 성씨를 해(解)씨로 기록하고 있고, 주몽은 해모수의 혈손으로서 원래 성씨가 해씨였을 것이므로 결국 주몽으로부터 모본왕까지의 성씨는 해씨였음을 알 수 있고, 삼국사기 태조대왕 94년 조의 주에는 "해동고기에는 고구려 국조왕(태조대왕) 고궁이 후한 건무 29년 계축에 왕위에 오르니 이때 나이가 7세이므로 국모가 섭정했다" 라고 함으로써 태조대왕의 성씨를 고(高)씨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태조대왕으로부터 고구려의 왕위는 계루부에서 대신하게 되었지만 연노부(연나부)도 그대로 소멸하지 않고 고구려의 왕비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게 된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많은 왕들은 이 연노부(연나부 또는 소노부라고도 한다)의 여인과 혼인했던 것이다.
  정리해 보면,
  고구려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요, 성은 고씨[삼국사기에는 해동고기에 고구려 국조왕의 이름이 고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했다]로서 그 아버지는 유리왕의 양자 고추가 재사이고, 어머니는 부여부인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어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했다.
  일곱 살 되던 해에 모본왕이 시해 당하자 처음에는 나라사람들이 그 아버지인 고추가 고재사에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했으나 사양하므로 대신 그 아들 고궁을 왕위에 올리고 모후로 하여금 수렴청정하게 했다.
  궁은 왕위에 올라 94년 간 재위하다가 그 조카인 수성의 강압에 못 이겨 왕위를 선위하고 물러앉았는데, 이때 궁의 나이 100세였다.
  수성이 왕위에 올라 정치를 잘못하자 나라 사람들이 궁의 맏손자 막근을 왕으로 옹립하려다가 실패하여 막근이 잡혀 죽게 되었고 그 동생 막덕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서기 165년에 이르러 연나 조의 명림답부가 수성을 죽였고, 그 해 궁도 119세의 나이로 죽어 시호를 태조대왕[혹은 국조왕]이라 했다.   
   
태조대왕의 정복활동

 

  고구려의 태조대왕 궁은 7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하여 태후인 부여부인이 수렴청정을 했는데, 삼국사기 태조대왕 재위 3년 조에는 "봄 2월에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를 방비토록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에 이르러 이 요서가 어디를 말하는지 논란이 많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 중에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조대기에 이르기를 태조 융무 3년에 요서에 10개 성을 쌓고 이로써 한나라의 10성에 대비하게 하였다. 첫째 안시는 개평의 동북쪽 70리에, 둘째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셋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넷째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다섯째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여섯째 풍성은 안시의 서북쪽 100리에, 일곱째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아홉째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열째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있었다" 라는 기록을 보고는 지금의 북경 동쪽 난하를 요수라고 하고, 그 서쪽을 요서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기록은 그리 정확성이 있는 기록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역사학자들의 주장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     
  요수는 지금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를 말하는 것으로서 요서는 그 서쪽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가 쌓았던 요서의 10개 성은 요수 즉 지금의 영정하 서쪽에 군데군데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서기 56년에는 동옥저를 쳐서 병합시킴으로써 고구려가 동쪽으로 창해까지 남쪽으로 살수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역시 우리는 지금 동옥저를 함흥부근이라 함으로써 창해를 동해라 하고, 살수를 청천강이라 한다.
  그러나 동옥저는 지금의 요하 서쪽인 내몽골 적봉, 옹우특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므로 창해란 지금의 만주 내륙에 형성되어 있던 지금은 사라진 바다를 말하는 것이고, 살수란 밀운수고로 흘러드는 조하를 말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살수란 지금의 고북구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태후인 부여부인이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업적들은 사실 태조대왕의 어머니인 부여부인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다가 태조대왕이 홀로서기를 했을 재위 16년인 서기 68년에 갈사국이 나라를 바쳐오고, 재위 20년인 서기 72년에는 조나를 쳐서 병합시키고, 재위 22년인 서기 74년에 주나를 쳐 병합시키고, 재위 46년인 서기 98년에는 나라 동쪽 예국에 책성을 설치함으로써 나라의 동쪽 국경을 튼튼하게 해 놓고는 서기 105년에 이르러 요동군을 침공함으로서 드디어 후한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111년에 현토군을 공격하고, 118년에 이르러 다시 현토군의 화려성(필자주 : 이 기록은 사실 좀 이상하다. 아마 위치를 옮긴 당시의 현토군이 아니라 옛 현토군이었던 낙랑동부도위를 친 기록이 아닐까 싶다)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요동군을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이라 하고, 현토군을 그 북쪽 쯤일 것으로 비정하고 역사를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원래의 요동은 요수의 동쪽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영정하 동쪽지역 즉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요서는 영정하의 서쪽지역인 방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현토군은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처음 설치된 곳은 동옥저 지역이었으나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을 예가  빼앗아 동예를 세우게 되고, 진번군 땅에서 맥국이 독립하게 되자 이 두 군을 폐지하고, 현토군을 졸본부여(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시켜 설치하게 되고, 옛 현토군은 낙랑군에 붙이게 되는데, 낙랑군에서는 그곳이 단단대령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게 되고, 이때 옮긴 현토군의 위치는 하북성 장가구시 남쪽 부근으로 비정된다.

  이때 고구려의 태조대왕은 지금의 중국 북경, 장가구 부근에서 후한과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이러한 기록들 모두를 요하 동쪽으로 이동시켜 비정해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쪽으로 최소한 요하에서 영정하 부근까지, 북쪽으로 내몽골까지의 우리 역사 강역을 잃어버리고, 그 땅을 고스란히 중국에 바친 꼴이 된 것이다. 오호 통재라.
 
  한편 후한에서도 맨 날 당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던지 121년 봄에 유주자사, 현토태수, 요동태수 등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공해오자 태조대왕은 동생(혹은 조카)인 수성을 보내 막게 하는데, 이때 수성은 항복하는 척 하여 후한군을 전선에 묶어 놓은 후 가만히 군사들을 요동군(현 북경 부근)과 현토군(현 장가구 부근)으로 보내 그들의 본거지를 쳐 쑥대밭을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급보를 전해들은 후한군은 급히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태조대왕은 철군한 후한군이 아직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인 4월에 이르러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대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등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며 고구려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12월에 다시 왕이 직접 기병 1만을 이끌고 현토군을 공격해 치소인 현토성을 포위했는데, 이때 동부여에서 지원군 2만을 보내 현토군을 돕는 통에 패하고 말았는데, 태조대왕은 그 다음해인 122년에 다시 한번 요동군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동부여에서 지원군을 보내 후한을 돕는 바람에 전과없이 군사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태조대왕은 야욕이 있는 동생(혹은 조카)인 수성을 정사에 참여시키게 되는데, 두 번의 원정 실패가 급격한 왕권의 약화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 이후의 태조대왕에 대한 업적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