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일생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20. 23:12

윤여동설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일생 - 최초주장

 

 

  백제시조 온조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기원전 46-45년경 졸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여우태이고, 어머니는 연소서노이다.

 

☆ 우태는 동명왕의 작은 아들의 아들 즉 손자로 보이고,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는 기원전 66년에 출생했는데, 18세인 기원전 49년에 혼인하여 첫아들을 낳았다면 장자인 비류는 기원전 49-48년 생이 되고, 2-3년 뒤에 다시 둘째 아들을 낳았다면 온조는 기원전 46-45년 생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혹시 이들 형제가 쌍둥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쌍둥이라면 둘 다 기원전 49-48년생일 수도 있다.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이름은 부여두막으로서 기원전 108년에 졸본부여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기원전 86년에 북부여를 멸망시키고, 재위 49년인 기원전 60년에 죽었다.
  동명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부여무서였고, 차자의 이름은 실명되어 전하지 않는데 아들 하나를 낳고 일찍 죽었던 듯 하다.
  그리하여 장자인 부여무서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부여무서왕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이 있었고, 죽은 동생에게는 나이 어린 우태라는 아들이 있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우태의 신분을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서손"의 오기일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58년 봄에 이르러 부여무서왕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온 주몽을 만나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둘째 공주와 혼인시켜 부마로 삼게 되고, 그 해 10월 부여무서왕의 죽음이 임박해졌는데,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사람이 마땅히 없게 되었다.
  만약 이때 동명왕의 손자인 우태가 어느 정도 성장해 있었다면 부여무서왕의 뒤를 이어 조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나 그 당시 우태가 10세 미만의 어린아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부여무서왕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둘째 부마인 주몽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게 되는데, 이때 부여무서왕은 주몽의 다음 왕위는 우태에게 돌려주라고 당부했을 것이다.
  그렇게 주몽은 졸지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고, 10년쯤의 세월이 흘러 기원전 49년 경 우태가 성장하여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와 혼인하게 되고,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낳게 된다.
   그런데 기원전 44년경 우태가 갑자기 죽게 되어 소서노는 장래 졸본부여의 왕비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고, 졸지에 아들 둘 딸린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졸본부여 주몽왕의 왕비인 둘째 공주도 아들 없이 딸 하나만을 남겨 놓고 죽게 되고, 주몽왕은 새 왕비를 물색하게 된다.[필자주 : 이때 졸본부여 둘째공주가 실제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몽왕이 또 왕후를 들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필자는 첫왕비인 졸본부여 둘째공주가 딸하나 만을 남겨 놓고 죽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그러자 졸본부여의 호족이며 갑부였던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은 주몽왕과 소서노의 재혼을 추진하게 되고, 소서노도 동의하게 된다.
  소서노의 입장에서는 남편인 우태가 죽어 날아가 버린 졸본부여의 왕비가 되는 꿈을 이룰 수 있고, 또 주몽이 죽은 후에는 자신의 아들인 비류나 온조를 왕위에 올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주몽의 입장에서도 혼인했던 졸본부여 둘째 공주가 죽은 후 위태로워진 왕위를 호족인 연타발과 소서노를 이용해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역시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주몽과 소서노는 재혼을 하게 되었고,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양아들이 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건국설화에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고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하게 대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여겼었다"라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어느 사람은 주몽이 8년 연상의 여인인 소서노와 재혼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주몽은 기원전 79년 생이고, 소서노는 기원전 66년 생이므로 이때 주몽은 13년 연하인 소서노와 재혼했다.     
  
  그런데 소서노가 막상 주몽왕과 혼인을 한 후 주몽왕의 속마음을 알아보니 비류나 온조에게 왕위를 물려 줄 마음이 없었고, 동부여에 있는 자신의 친아들 유리가 도망쳐 온다면 그를 태자로 봉하여 왕위를 물려줄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졸본에 더 머물러 봤자 좋은 꼴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을 떠나 마한 동북쪽 한산 부근으로 가서 농장을 일구어 반 천리의 땅을 차지하는 거부가 된다.
  그리고 비류는 성장하여 해씨(解氏)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고, 온조는 한산 부근의 토착호족인 진씨(眞氏) 가문의 여인과 혼인했을 것이다.

 

☆ 이때 소서노가 이주한 한산 부근의 땅은 마한의 동북쪽에 해당하는 변방이었고, 북쪽 말갈(?) [맥이 아닐까?]의 약탈로 마한에서도 골치 아파하는 곳이었고, 이후 백제의 왕비는 거의 진씨와 해씨 가문에서 배출했던 것으로 나타나므로 비류와 온조가 그 가문의 여인들과 혼인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한편 주몽왕은 소서노가 떠난 후인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고구려를 역사에 등장시키게 된다. 기원전 86년에 멸망했던 북부여가 약 50년이 지난 후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했던 것이다.
 
 
☆ 주몽은 기원전 79년 5월 5일에 동부여에서 태어났다. 북부여 건국시조 천제 해모수의 고손자로서 증조할아버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해진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전하지 않고, 아버지는 해불리지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기원전 19년 4월에 이르러 동부여에서 살고 있던 유리가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도망쳐 졸본으로 주몽왕을 찾아와 태자로 봉해지고, 9월에 주몽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고, 그 소식을 들은 소서노도 그 다음해인 기원전 18년에 두 아들로 하여금 한산부근인 마한 동북쪽 땅에 졸본부여를 잇는 나라를 세우게 하는데, 이가 곧 비류의 백제와 온조의 십제였다.
  졸본부여 동명왕의 후예인 비류와 온조가 졸본이 아닌 마한 동북쪽 땅에 나라를 세운 이유이다.
  이때 비류는 30-31세, 온조는 28-29세 정도의 나이였을 것인데, 비류는 서쪽의 미추홀에 도읍했고, 온조는 동쪽의 위례성에 도읍한다.
  그리고 온조왕은 나라를 새우고 맨 처음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는데 이는 주몽왕의 사당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이며,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인 동명왕 부여두막의 사당을 세웠다는 말이다. 
 그렇게 다시 13년쯤이 지났을 때 비류가 죽게 되고, 소서노 역시 기원전 6년 봄 2월에 61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그리하여 온조왕은 백제와 십제를 합하여 새롭게 백제라고 국호를 정하고 도읍을 위례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 백제의 강역은 동쪽으로는 주양까지, 서쪽은 대해, 남쪽은 웅천까지, 북쪽은 패수까지였다고 한다..
  또한 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이 기록은 약간 이상하다) 백제는 이들 두 적의 침공과 약탈 때문에 골치가 아프게 되고, 서남쪽에는 큰 나라인 마한이 위치했으며 동쪽으로는 신라도 있었다.
  그리하여 온조왕은 백제의 기틀을 다지는데 온 힘을 쏟는데, 그 와중에 아들이 먼저 죽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그리하여 온조왕은 재위 28년인 서기 10년에 이르러 장손자인 다루를 태손으로 삼게 되고, 재위 46년인 서기 28년 봄 2월에 70여세의 나이로 죽어 한성 부근에 묻히게 되고, 뒤를 이어 손자인 다루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 삼국사기에는 다루가 온조왕의 장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