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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일생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21. 22:11

윤여동설 -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일생 - 최초주장

 

 

  신라시조 혁거세거서간의 원래 성씨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에 진한 서라벌 동쪽 양산 남쪽 나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이나 신분은 전해지지 않았고, 어머니는 동부여의 공주 파소(사소라고도 한다)이다.

 

☆ 혁거세의 출생년도가 기원전 69년이므로 그 어머니 파소(사소)가 18세쯤 혁거세를 입태했다고 가정하면 그녀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87년이 되고, 그녀가 진한으로 와서 혁거세를 낳은 기원전 69년에 그녀의 신분이 부여제실의 딸이라고 했으므로 동부여 해부루왕의 공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은 동부여 건국시조 해부루왕의 외손자가 된다.

  

  기원전 86년 동명왕이 이끄는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침공하여 북부여 4대 왕이었던 해우루왕은 죽게 되고,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그러자 해우루왕의 동생이었던 해부루가 재상 아란불과 함께 북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으로 도망쳐 그곳에 다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동부여라 한다.
  동부여는 들이 넓어 오곡을 재배하고, 목축을 하여 빠른 시일 내에 나라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 후한서 부여국전에는,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동이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데, 토질은 오곡이 잘 자란다. 명마와 적옥과 담비가죽, 살쾡이가죽, 대추만큼 큰 구슬이 생산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해부루왕에게는 18세가 된 파소(사소)라는 예쁜 공주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이름 모를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임신이 되고 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자꾸만 배가 불러오게 되자 파소(사소)는 임신한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동부여에서 도망쳐 눈수, 동옥저를 거쳐 진한으로 가게 된다. 
  한편 진한 6부의 촌장들은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 알천(알천양산촌 : 동촌) 언덕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촌장들은 "우리는 임금이 없으니 백성들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남쪽 양산 아래에 있는 나정 옆 숲 속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엎드려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곳에 가 보았더니 방금 태어난 어린애가 하나 있었다. 

  그리하여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그 아이를 자신의 집에 데려갔는데, 얼마 후 어느 여인이 찾아와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했고, 자신은 동부여 공주 파소(사소)라고 신분을 밝혔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사람들이 의심하므로 눈수로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이때 소벌도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지혜롭고 성숙하며, 성덕이 있으므로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정하고, 나라를 진한이라 했는데, 또한 사로라고도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조의 사론에도,
  "옛날 어느 제왕의 딸이 남편없이 잉태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어 곧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으며 제왕의 딸은 지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그 모습입니다" 하였다는 송나라 관반학사 왕보의 말이 기록되어 있어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동부여의 공주였고, 혼전 임신을 하였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파소는 죽을 때까지도 혁거세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아 지금까지도 그를 알지 못한다.

   

   소벌도리는 깜짝 놀라 촌장들을 다시 모아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6부의 촌장들은 하늘이 왕을 보내준 것이라 여기고, 고이 길러 13세가 된 기원전 57년에 왕위에 추대하고 거서간이라 불렀으며, 국호를 서라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7세가 된 기원전 53년에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행실이 현숙하고 내조에 능하여 당시 사람들은 두 성인이라 불렀다고 한다.
  혁거세거서간이 덕으로 정치를 하니 나라가 태평해졌다.
  그리하여 왜인군사가 변경을 침범했다가 혁거세거서간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냥 물러갔고, 변한이 스스로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고,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변방 백성들이 밤에 대문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있는 것을 보고는 가히 도덕이 있는 나라라 여겨 스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마한과의 관계를 재정립하여 마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고, 동옥저에서는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마리를 바치며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듣고 하례 드리는 것입니다" 라고도 하게 된다.
  그렇게 혁거세거서간은 신라의 기초를 다져놓고 서기 4년 3월에 73세의 나이로 죽어 사릉에 묻히게 된다.

  사릉은 동촌인 알천양산촌의 남쪽, 담암사(담엄사) 북쪽이며, 탄생지 나정의 서쪽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는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가 7일 뒤에 그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는데, 왕후 역시 죽기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이때 신라에 조장(천장)의 풍습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고, 왕비인 알영 역시 혁거세거서간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아들 남해가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