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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김흠돌의 난은 왜 일어났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30. 00:57

윤여동설 - 김흠돌의 난은 왜 일어났을까? - 최초주장

  

  서기 681년 신라 31대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소판 김흠돌과 파진찬 흥원 그리고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잡혀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앞서 김유신의 누이인 정희는 나물왕의 후예인 달복과 혼인하여 흠돌과 흠운이라는 두 아들을 낳는다.
  따라서 이들은 김유신의 조카이며, 태종무열왕비 문명왕후 문희의 조카이기도 하고, 또 흠돌은 김유신의 딸인 진광과 혼인했기 때문에 김유신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흠돌은 본래 사람됨이 사악하였는데, 파진찬 선품의 딸인 자의가 태종무열왕의 장자로서 태자로 봉해져 있던 법민과 혼인하기 전에, 흠돌이 먼저 얼굴이 예쁜 자의를 보고는 홀딱 반하여 그녀를 강제로 첩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그녀가 덜컥 태자인 법민과 혼인하여 태자비가 되자 후일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어떻게 하든 그녀를 태자비 자리에서 내 쫓으려고 그녀에 대한 온갖 험담을 늘어놓으며 덕이 없다고 궁지에 몰기도 하고, 또 이모인 문명왕후를 꼬드겨 자의를 태자비에서 내쫓고 유신의 둘째딸 신광을 태자비로 삼아야 가야파가 안전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당시 흠돌의 권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태자비인 자의는 그를 어찌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김흠돌에 대한 나쁜 감정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죽고 태자인 법민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가 곧 문무왕이고, 자의 역시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문무왕 법민과 자의왕후 사이에 태어난 아들 정명(후일의 신문왕)이 성장하자 흠돌은 자기의 딸을 억지로 정명과 혼인시켜 태자비로 삼게 하는데, 자의왕후와 태자인 정명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의왕후는 태자비의 친정아버지인 흠돌이 지난날 그토록 자기를 헐뜯고 다니고, 자신이 태자비 시절 태자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려고까지 했던 행동에  대한 감정이 쌓여 있었고, 태자 역시 지난날 김흠돌이 자신의 어머니를 그토록 헐뜯고 못살게 굴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흠돌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태자인 정명은 할머니인 문명태후 때문에 할 수 없이 흠돌의 딸과 혼인 하기는 했으나 마음에 내키지 않아 그녀의 거처를 잘 찾지 않는다.    
  친정 아버지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시집간 딸이 소박을 맞고 있는 셈이었다.
  이때 태자인 정명은 오히려 그의 죽은 형인 소명태자와 혼인을 약속했다가 소명이 일찍 죽는 바람에 첫날밤도 못 치루고 홀로 소명궁에서 살고 있는 김흠돌의 동생인 김흠운의 딸을 좋아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문명태후도 죽고, 문무왕도 죽게 되자 태자인 정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곧 신문왕이고, 김흠돌의 딸도 왕후에 오르기는 했지만 신문왕은 그녀를 다시는 찾지 않고 멀리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의 딸이 신문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지 못하자 김흠돌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자기를 보호해줄 보호막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흠돌은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가 진압 당하여 반란은 실패하고 잡혀 죽게 된다.
  그러자 신문왕의 왕후가 되어 있던 김흠돌의 딸 역시 역적의 딸이라 하여 궁중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신문왕은 김흠돌의 동생인 김흠운의 딸을 새 왕후로 맞아들이게 된다. 
  신라 왕실의 혼인절차와 폐백 등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신라본기 신문왕 3년 계미(A.D.683) 조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고자 먼저 이찬 문영, 파진찬 삼광을 보내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을 보내어 지금의 함과 같은 납채를 보냈는데, 폐백이 15상자요, 쌀 ,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상자요, 벼가 150수레였다.
  5월7일에 이찬 문영과 개원이 김흠운의 집으로 가서 부인 책봉을 하고 묘시에 파진찬 대상과 손문 그리고 아찬 좌야와 길숙 등을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 그밖에 양부, 사량부의 여자들 30명씩을 함께 보내어 맞아오게 하였다.
  부인이 수레에 타고 좌우에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시종하는 것이 심히 성대하였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김흠운의 딸이 곧 신목왕후로서 후일 두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장자는 신라 32대 효소왕이고, 둘째 아들은 33대 성덕왕이다.[성덕왕에게 동생인 김근질, 김사종이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사촌 사이에도 김흠돌의 딸은 그 아버지 때문에 내어쫓기고, 김흠운의 딸은 왕비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갔으니 김흠운은 김흠돌과는 달리 평소에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문무왕의 장자였던 소명태자가 혼례도 못 치루고 죽었을 때 김흠운의 딸의 인생은 꼬이는 듯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왕비가 되었으니 여인의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다 하겠다. 
  인생은 새옹지마이니 현실이 힘들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려운 때가 지나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오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