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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4. 7. 20:34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의 기록인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조를 보면,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 소정방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을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과 우무위장군 풍사귀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과 더불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치게 하고 겸하여 신라왕 김춘추로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자기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 현 산동반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나라(신라)의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백제 의자왕)이 이 소문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느냐 지키느냐 하는 적당한 방법을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 나라 군사가 멀리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물에 익숙하지 못한 것들이 배에서 피곤하여졌을 것이므로 그들이 처음 육지에 올라 군사들의 기운이 회복되지 못할 때에 갑자기 쳐버리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이요,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응원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먹을 것이나 만약 당 나라 군사들이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머뭇거리면서 두려워서 감히 빨리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나라 사람들과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달솔 상영 등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 나라 군사가 멀리 와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요, 신라 사람들은 전일에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기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보고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 나라 군사들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의 군사가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우선 적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그의 예봉을 꺾은 후에 그 형편을 보아서 싸우게 되면 군사를 완전히 유지하며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머뭇거리면서 누구의 말을 쫓아야 할지 몰랐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였다. 흥수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군사 규율이 엄명하고, 더구나 신라와 연합하여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진을 대치한다면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 혹은 기벌포라고도 한다]과 탄현[炭峴 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으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 막아도 1만 명이 이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날랜 군사를 선발하여 그 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여러 겹으로 닫고 굳게 지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 질 때를 기다려서 그렇게 된 뒤에 심하게 치게 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며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을 따라 배가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며,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으로 넘게 하여 좁은 길에서 나란히 오지 못하게 하고 이러한 때를 타서 군사를 풀어 치게 되면 마치 둥우리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곧이 들었으며,

  또한 당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계伯)을 시켜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죽음을 당하였다.

  그제야 군사를 모아 가지고 웅진구(필자주 : 사비구의 오기가 아닐까?)를 막고 강가에 군사를 배치시켰더니 소정방이 강의 왼쪽(동쪽)으로 올라와서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이때 당 나라 수군은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서 배들을 잇대어 북을 울리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 기병들을 거느리고 곧 바로 진도성(眞都城 필자주: 이때 백제의 도읍은 사비였는데, 진짜 도성이라는 의미로 진도성이라 기록한 듯 하다) 30리(一舍) 외곽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조리 나가서 싸우다가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서 성에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스럽게도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드디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자신이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의 아들 융(隆)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가 자기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되면 우리들의 생명을 어떻게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측근자들과 함께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 나가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태는 사태가 긴박하게 되어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때에 왕(의자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들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륭, 연(演) 및 대신, 장군과 지휘관 88명과 백성 1만2천8백7명을 당 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백제는 원래에 5부, 37군, 2백 개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거수들을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서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한 좌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임명해서 남은 백성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은 후 용서하여 주었다.

  왕(의자왕)이 병으로 죽으니 그를 증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조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호, 진숙보 등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그 무덤들과 나란히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융을 사가경으로 임명하였다.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죽으니 유인궤로서 그를 대신 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가 멸망할 때의 상황을 잘 알 수 있게 하는데, 우리는 이 기록 속 백제의 마지막 도읍을 지금 한반도 충남 부여라고 생각하고는 부여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기록 속의 지명들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말 바보같은 짓이다.
  왜냐하면 이때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가 한반도 충남 부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제는 삼한 중 마한의 동북쪽에서 건국된 나라였는데, 삼한은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처럼 한반도에 있던 나라가 아니었다.

  후한서 한전을 보면,
  "한은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인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국인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역시 12국인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한다. 그 땅을 합하면 방 4천여 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반도 남쪽은 방 1천리 정도의 면적 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방 4천리에 이르는 큰 나라였던 삼한이 한반도 남쪽에 위치할 수가 있었으리요.
  따라서 한반도 남쪽에 삼한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는데, 지금까지 이러한 엉터리 주장에 따라 우리 역사를 해석했으니 잃어버린 대륙의 우리 옛 땅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마한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 일원에 도읍하고 54개 소국을 거느리고 있었고, 백제는 지금의 난하 중, 하류에 위치했으며, 마한 54개 소국 중의 한 개 나라였다.
  진한은 후일 신라가 되었는데,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위치했고, 변진(변한)은 후일 가야가 되었는데 호로도 흥성 부근에 위치했다.

 

☆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진흥왕 이후 신라가 낙랑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백제 멸망시의 삼국사기 기록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기록으로서 그곳이 바로 우리의 잃어버린 옛 땅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위 백제 멸망시의 기록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고, 백강이나 기벌포, 황산, 탄현 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는 지금의 난하 변에 위치한 난주(난현)이었고,

  웅진 역시 사비의 북쪽 청룡하 하류에 위치한 노룡이었으며,

  백강은 사비로 가기 위해서 발해로부터 타고 올라가야 하는 강으로서,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강구는 난하구를 말하는 것이다.  
  탄현은 신라가 위치했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가 위치한 당산시 난주(난현) 부근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갈석산, 토이산  북쪽에 위치한다.   
  이곳이 지금까지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던 탄현이지 한반도의 경주에서 부여로 가는 어느 고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계백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군을 막다가 전사한 황산벌은 난하와 갈석산 사이에 위치했다.
  백제가 한반도가 아닌 난하 중, 하류 일원에 위치했으므로 산동반도를 출발한 소정방은 이때 한반도를 향하여 서해바다를 건너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산동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발해를 건넜던 것이다.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소정방과 신라 태자 김법민이 만난 덕물도와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합세한 기벌포, 그리고 의자왕이 배에 실려 당나라로 끌려간 사비나루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후일 백제의 부흥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실은 왜국 배가 당나라 수군과 만나 해전을 펼쳐 전멸했던 백강구 전투의 현장이 어디인지도 금방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삼국사기 기록 속의 역사현장이 대륙임을 모른 채 전혀 엉뚱한 한반도에 삼국사기 기록을 억지로 대입시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고대 역사기록을 미국으로 가져가 미국 지형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 어찌 역사의 진실이라 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