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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15. 09:17

윤여동설 -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 최초주장

 

 

  백제에 정말 모도왕(牟都王)이라는 왕이 왕위에 오른 적이 있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고 있는 백제의 왕위는 시조 온조왕으로부터 31대 의자왕까지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중에 모도왕이라는 백제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중국 정사서에는 "모도(牟都)"라는 사람이 백제의 왕위에 오른 적이 있고, 남제에서 작위까지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논쟁의 발단은 남제서 백제국 전에,
  "(백제 동성왕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복야 손부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책명으로 모대(동성왕)를 죽은 그의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봉하며 말하기를 '아 기쁘다. 그대들은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대대로 이어받아 그 정성이 먼 곳에까지 이르니 바닷길이 고요하고 맑아져 조공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법전에 따라 귀한 관작을 계승하게 한다. 삼가 아름다운 업을 지켜야할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동성왕)에게 조서를 내리고 모대를 그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는다'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양서 백제 전에는,
"송 원가(A..D.424∼453) 중에 왕 여비(비유왕)가 사신을 보내 생구를 바쳤다. 여비가 죽고 그 아들 여경(개로왕)이 왕위에 올랐다. 
  여경이 죽고 그 아들 모도가 왕위에 올랐다.
  모도가 죽고 그 아들 모태(동성왕)가 왕위에 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남사 백제전에도,
  "대명 2년(A.D.458) 여경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므로 나란히 벼슬을 높여주기 바란다' 하였으므로 이에 조서를 내려 모두 벼슬을 올려 주었다.
  명제 태시 7년(A.D.471) 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여경(개로왕)이 죽고 그 아들 모도(牟都)가 왕위에 올랐다.
  모도가 죽고 그 아들 모대(동성왕)가 왕위에 올랐다.
제나라 영명(A.D.483∼493) 중에 모대에게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작위를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위와 같은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보고 모도의 신분에 대하여 각각의 주장들을 펼치게 되었는데, 대개 세 주장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모도가 동성왕의 할아버지로서 실제 왕위에 오른 적이 없으나 손자인 동성왕이 왕위에 오른 후 그 할아버지를 왕으로 추증했을 것이라는

모도왕추증설

과,
  둘째는 모도가 개로왕의 태자로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은 후 왕위를 이었으나, 그 역시 전쟁 통에 바로 죽게 되어 다시 문주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빠졌을 것이라는

백제모도왕누락설

,
  셋째는 필자의 주장으로서 모도가 차자파였던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인 무광왕의 후손이고, 곤지의 아버지였으며, 동성왕의 할아버지로 그가 실제로 왕위에 올랐다는

반도백제모도왕설

이다.
 
  모도를 후일 왕으로 추증했을 것이라고 보는 모도왕추증설은 삼국사기에 기록되고 있는 백제 31명 왕 중에 모도왕이라는 왕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가 바로 동성왕의 할아버지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후일에 이르러 손자인 동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 죽은 할아버지를 왕으로 추증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모도왕이라는 왕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설이다.
  그런데 이 설은 책부원구 권963 외신부8 책봉1
 남제 태조 건원 2년(A.D.480) 3월 조에 기록되고 있는 "百濟王 牟都 遣使貢獻. 可卽授 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백제왕 모도가 사신을 보내와 조공을 바쳐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의 작위를 주었다)"라는 기록을 충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제의 무제가 동성왕 모태(모대라고도 한다)에게 작위를 준 해는 영명 8년인 서기 490년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10년 전인 480년에 이미 백제의 모도왕이 남제에 사신을 보냈고, 남제의 태조가 백제왕 모도에게 작위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모도왕누락설은 삼국사기에 모도왕의 왕위 계승관련 기록이 누락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잡아죽이자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 혼란기를 염두에 두고 역사를 해석하려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22대 문주왕 조에,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전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에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까지 이르렀다. 개로가 왕위에 있은 지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니 개로가 성을 둘러막고 굳게 지키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에 고구려군사는 물러갔으나 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었으므로 문주가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양서나 남사에 모도가 여경 즉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개로왕이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어 잡혀 죽게 되자 그 태자였던 모도가 바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바로 죽게 되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신라에 지원군을 얻으러 갔다가 늦게야 돌아온 모도왕의 동생 문주가 다시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도는 며칠 정도 왕위에 올라 있었으나 그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모도가 단 몇 일간이라도 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7대 사반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바로 그를 폐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과 같이 삼국사기에 단 한 줄이라도 언급되었어야 마땅한데, 삼국사기에는 삼한고기(三韓古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모도왕이 백제의 왕위에 오른 적이 없다고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게 되고,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해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잡아죽인 475년에 모도왕도 바로 죽고 문주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면 475년에 이미 죽었을 모도왕이 480년에 남제에 사신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모도왕은 480년에 분명 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었고, 동성왕에게 작위가 주어진 490년 바로 이전에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반도백제모도왕설은 필자가 주장하는 것인데, 모도는 개로왕이나 문주왕과는 혈통을 달리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모도왕은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 찬탈전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지모밀지를 도읍으로 정하고 반도백제를 건국했던 무광왕의 후손이고, 개로왕이나 문주왕은 대륙백제 근초고왕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모도왕을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한 것은 오기라고 본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제가 대륙에서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뉘어 왕위찬탈전을 펼쳤음을 알아야 한다.

                                     
  백제 4대왕인 개루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초고왕이었고, 차자는 구태였다.
  백제의 초기 왕위는 장자로 이어져 구수왕의 손자인 7대 사반왕에 이르렀는데, 차자파 구태의 손자인 8대 고이왕이 나이 어린 조카인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그 아들 9대 책계왕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다시 책계왕의 아들 10대 분서왕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그런데 이때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인 11대 비류왕이 장자파로 왕위를 되돌리자 12대 계왕이 다시 차자파로 왕위를 되찾아 오게 된다.
  그러자 비류왕의 아들이었던 13대 근초고왕이 다시 장자파로 왕위를 빼앗아가게 되자 차자파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과 장자파인 근초고왕은 그 왕위를 놓고 20여 년 간이나 다투게 되는데 결국 근초고왕이 최종 승리하게 되어 근초고왕은 대륙백제의 왕위를 이어가게 되고, 무광왕은 한반도로 도망쳐 와 지모밀지에 새로이 도읍을 정하고 반도백제를 건국하게 되어 이후 1백여 년 간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는 서로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면서 교류없이 각각 독립적으로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
  이때 반도백제는 주로 중국 남조의 나라들과 교류하게 되고, 대륙백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북조의 나라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러다가 대륙백제 개로왕 때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의 팽창정책을 견딜 수 없었던 대륙백제의 개로왕이 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모두 4대 개루왕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통합을 제안하게 되고, 당시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모도왕도 그에 동조하고는 아들인 곤지를 대륙으로 보내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토록 한다.

 

 개로왕을 근개루왕이라고도 하여 4대 개루왕의 시호에 "근" 자를 붙인 것은 그가 두 백제가 모두 개루왕의 후손 임을 내세우며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한 왕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시호였고, 5대 초고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인 근초고왕과 6대 구수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인 근구수왕은 그들이 차자파와의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 후 장자파임을 강조하기 위해 장자파 선왕의 시호에 "근(近)" 자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475년에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이 갑자기 대륙백제를 침공해 오게 되어 도읍인 한성이 함락되고 대륙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게 되는 위기가 닥쳤고, 그 왕위는 개로왕의 동복동생인 문주왕이 잇게 되고,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 삼국사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개로왕과 문주왕은 어머니가 같은 동복형제였다.

 

  이때 대륙백제의 모든 권력은 외척인 해씨들이 움켜쥐고 있었는데, 이 해씨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두 백제의 통합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후 형인 개로왕이 추진하다 마무리하지 못한 두 백제의 통합을 재추진하기 위해 반도에서 대륙으로 건너와 있던 반도백제 모도왕의 태자인 곤지를 왕명을 출납하는 내신좌평으로 임명하고 두 백제의 통합을 다시 추진하자 해씨들은 477년 7월에 이르러 곤지를 먼저 죽여버리고, 이어 9월에 문주왕 마저도 죽여버리고는 나이 어린 삼근왕을 왕위에 올리게 된다.

 
  한편 자신의 아들인 곤지가 대륙에서 해씨들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도백제 모도왕은 대단히 화가 났고, 대륙백제 해씨의 타도를 명하게 되어 외척인 진씨들이 중심이 되어 478년 봄에 이르러 해씨들을 타도하기 시작해 479년 11월에 이르러 삼근왕을 제거함으로써 해씨 제거 작전은 상황이 종료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대륙백제는 반도백제에 흡수 통합되고, 반도백제 모도왕은 죽은 곤지의 둘째 아들(모도왕의 둘째 손자)인 모대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다.
  이후 대륙백제는 반도백제에 흡수 통합되어, 이후 대륙백제의 왕위는 모두 반도백제 모도왕의 후손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 이후 반도백제의 모도왕은 실제적인 통합백제의 황제로 군림하다가 488년경 죽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반도백제 역시 대륙백제와는 별도로 왕위가 이어졌을 것인데, 그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모도왕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동성왕의 할아버지였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때 반도백제는 모도왕의 뒤를 이어 동성왕의 형이었던 남제왕이 왕위를 이었던  듯하다.  


  따라서 중국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모도왕은 바로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정사를 지었다는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라 할 수 있고, 그가 왕위에 올랐던 것은 역사적 사실인데, 다만 삼국사기 기록 속의 대륙백제가 아닌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인물인 것이다.

 

   백제는 북경 동쪽 난하 중, 하류 부근의 대륙과 한반도 두 군데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고, 대륙백제의 기록을 반도백제의 기록으로 착각하고는 삼국사기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대륙삼국의 기록이지 한반도 삼국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참고]

반도백제의 왕위는 무광왕- 실명 - 실명 - 실명 - 모도왕으로 이어졌고 그 후에도 왕위가 계속 이어졌을 것인데 모도왕 이후의  반도백제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 수 없다. 다만 모도왕의 뒤를 이어 곤지의 큰아들로서 모도왕의  큰 손자인 남제왕이 반도백제의 왕위에 오른 듯한데, 이 남제왕은 대륙백제 동성왕과 무령왕의 장형으로 보이는 인물이고, 한반도 익산 미륵사는 바로 이 남제왕 70세 때 그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절로 보인다. 이때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무령왕도 아마 많은 시주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