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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비운의 신라 효소왕비 성정왕후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4. 27. 13:10

윤여동설 - 비운의 신라 효소왕비 성정왕후와 그 아들 김수충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15년(A.D.716) 조를 보면, 
  "성정(엄정이라고도 한다)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데, 비단 5백 필, 밭 2백 결, 벼 1만석, 저택 한 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집을 사서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은 이 기록을 보고는 성정왕후가 성덕왕의 첫 부인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무언가 잘못이 있어 궁중에서 폐출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틀렸다.

 

☆ 삼국사기의 주에서 성정왕후를 엄정왕후라고도 했다는 것은 오기이다.
성정왕후는 효소왕의 왕비였고, 엄정왕후는 성덕왕의 첫 왕비이다.


 

  성덕왕은 702년에 그의 동복 형 효소왕이 젊은 나이로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704년 5월에 이르러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엄정왕후)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아 아들 중경을 낳았고, 714년에는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숙위 보냈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715년에 중경을 태자로 삼았고, 716년에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717년 6월에 태자 중경이 어린 나이에 요절해 버리자, 9월에 당나라에 가 있던 왕자 수충이 귀국했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720년에 이르러서는 성덕왕이 다시 이찬 순원의 딸(소덕왕후)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 것으로 보아 이때쯤 첫 왕비였던 엄정왕후가 죽게 되어 새 왕비를 맞아들였다고 보여진다. 
  그리고는 724년에 이르러 소덕왕후의 소생으로서 겨우 3-4세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승경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성덕왕의 처음 비는 배소왕후로 시호는 엄정이며 원대아간의 딸이고, 다음 비는 점물왕후로 시호는 소덕이며 순원각간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을 뿐 성정왕후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삼국사기에는 34대 효성왕과 35대 경덕왕은 동복형제로서 어머니가 소덕왕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성정왕후가 실제 성덕왕의 첫 왕비였고 이때에 이르러 무언가 큰 잘못이 있어 폐출 당했다면 죄인으로서 서민으로 강등시켜 빈 몸으로 내 쫓았을 텐데, 성덕왕은 큰집과 밭 200결과 벼 1만석, 비단 500필 등 궁 밖에 나와서도 편히 살 수 있도록 조치한 후 궁에서 내보내고 있으니 매우 이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성덕왕과 성정왕후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는 그리 혼란스러워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성정왕후는 성덕왕의 왕비가 아니라 성덕왕의 동복형이었던 효소왕의 왕비였고,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였기 때문이다.
  효소왕이 702년 7월에 죽었을 때, 왕비는 성정왕후였고, 그녀는 임신 중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효소왕이 죽었을 당시에는 효소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효소왕의 동복동생인 흥광(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702년말 또는 703년 초에 효소왕의 유복자인 수충이 태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 중국 안휘성 구화산 화성사 김교각 스님이 김수충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김교각 스님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인 김문주이다.

 

 
  성정왕후의 입장에서는 그 아들이 성장하면 당연히 태자로 봉했다가 성덕왕 다음 왕위는 효소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신의 아들 김수충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정왕후는 태후의 자격으로 궁중 안에 버티고 살며 아들 수충을 키웠을 것이고, 성덕왕도 아들 중경을 나아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714년에 이르러 성덕왕은 걸림돌인 수충을 먼저 당나라에 숙위로 보내고, 그 다음 해인 715년 12월에 자신의 장자인 중경을 태자로 봉해버린다.
  이때 성정왕후는 크게 반발했을 것이지만 대세에 밀려 더 이상 궁 안에 머무를 명분을 잃게 되어 어쩔 수 없이 716년 3월에 궁 밖으로 나와 살게 되었다고 보여지는데, 성덕왕은 형수인 성정왕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예우를 해서 궁에서 내보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성정왕후에게 자신의 아들 수충을 태자로 봉할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 이는 태자로 봉해졌던 성덕왕의 장자 중경이 717년 6월에 갑자기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성덕왕의 아들로는 오직 중경하나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성정왕후는 중국 장안으로 사람을 보내 수충을 급히 귀국시켜 태자로 봉하려고 하게 된다.
  그러나 성덕왕은 이 때에도 효소왕의 아들로서 자신의 조카인 수충을 태자로 봉하는 것을 거부하고 720년 3월에 새로이 소덕왕비를 맞아들여 아들 승경을 낳은 후 724년 봄에 이르러 아직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 승경을 태자로 봉하게 되는데, 이는 성덕왕이 태자자리가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여진다. 
 
  어찌되었든 이후 성정왕후와 김수충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김수충은 왕위를 도둑질 당한 것이고, 성정왕후는 시동생인 성덕왕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성정왕후는 성덕왕의 첫 왕비가 아니라 사실은 효소왕비였고 김수충은 효소왕의 왕자였던 것이다.
  비운의 왕자 김수충의 후손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후 왕위를 찬탈하여 영원히 신라의 왕위를 이어갈 것으로 생각했을 33대 성덕왕의 후손들도 34대 효성왕, 35대 경덕왕, 36대 혜공왕으로 막을 내리고 마니 그 왕위에 대한 욕심도 한낱 뜬구름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