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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5. 5. 19:31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혁거세의 출생시기는 기원전 69년 3월1일이었다.
  동부여의 해부루왕에게는 사소(파소라고도 한다)라는 이름의 공주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라서 어느 이름 모를 남자와 혼전관계로 임신이 되어버리자 그 상황을 어찌할 수 없어 동부여에서 도망쳐 동옥저를 거쳐 진한으로 가서 혁거세를 낳게되었고, 그가 13세가 되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위에 올리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신라 건국시조 혁거세거서간이고 때는 기원전 57년이었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사람들이 의심하므로 눈수로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도착했다. 이때 소벌도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는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지혜롭고 성숙하며 성덕이 있으므로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정하고 나라를 진한이라 했는데, 또한 사로라고도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혁거세거서간의 출생에 얽힌 숨겨진 사연을 알 수 있다.

 

  그리고는 혁거세는 17세가 된 기원전 53년에 알영과 혼인했던 듯한데, 삼국사기는 이때의 상황을 "봄 정월 용이 알영우물에 나타나 오른쪽 갈비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 거두어 기르고 우물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그가 자라니 얼굴이 덕스러웠으므로 시조가 데려다 왕비를 삼았는데, 행실이 현숙하고 내조에 능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용이 오른쪽 갈비로 알영을 낳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추정해보면 알영우물 가까이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에서 배가 뒤집어졌는데 사람들이 뒤집어진 배의 옆면을 뜯어내고 알영을 구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기원전 28년에 이르러 낙랑 사람들이 신라를 침범했다가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데, 이때 신라가  한반도 경주에 도읍하고 그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고, 강원도가 예(동예)이고, 서울 부근이 마한 땅이었고, 북한 평양 부근에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다면 낙랑이 어떻게 마한지역과 예 지역을 통과하여 신라를 침공할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라는 태평성세를 구가하다가 서기 4년인 재위 61년 봄 3월에 이르러 혁거세거서간이 죽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2대 남해차차웅은 혁거세의 적자이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왕비는 운제부인 (또는 아루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정말로 혁거세의 장자인지는 불분명하고, 손자가 아닌가 싶다.  

  그는 딸 아효를 석탈해에게 시집보내고는 죽기 전에 아들인 유리와 탈해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너희는 박씨, 석씨 두 성씨가 나이 많고 현명한 사람으로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라고 당부하고는 죽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유리와 탈해는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탈해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주장하여 결국 유리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인데 이를 보면 두 사람은 동갑이었으나 탈해가 유리이사금보다 생일이 조금 빨랐던 듯 하다. 

    
  3대 유리이사금은 남해차차웅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왕비는 일지갈문왕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운제부인의 신분에 대하여 잘 알 수 없다. 혹시 남해차차웅에게 숙부가 있었고, 이 사람이 바로 운제부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아닌가 싶고, 또 유리왕의 왕비의 아버지로 기록되고 있는 일지갈문왕이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숙부가 아닌가 싶다.
  따라서 혁거세거서간에게 지금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남해왕의 아버지되는 사람이었고, 차자는 운제부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또 남해왕에게도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일지갈문왕이었고, 또  유리왕에게도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나로였던 듯하다.      
 

  결국 남해왕이나 유리왕은 모두 사촌여동생을 왕비로 맞아들였던 듯하다. 
  유리왕은 재위 34년인 서기 57년 10월에 죽었는데, 탈해와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므로 죽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쯤이 되었을 것이다.

 

  4대 탈해이사금은 남해왕의 딸인 아효와 혼인함으로써 유리이사금과 처남 매제사이가 되었다. 유리이사금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가 유리이사금이 죽으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해주어 62세의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그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5년임을 알 수 있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다파나국왕과 여국왕의 공주 사이에서 7년 만에 출생했는데, 7년 만에 알을 낳았기 때문에 왕이 괴이하다 하여 버리라 하므로 그 어머니가 바다에 띄워보냈다고 하고, 다파나국은 왜국 동북쪽 1천리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1 탈해왕조를 보면, 탈해는 본래 용성국(정명국 또는 완하국) 함달파왕과 적녀국왕의 딸과의 사이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용성국은 왜국 동북쪽 1천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잘 새겨보면 탈해는 원래 용성국왕과 적녀국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다파나국이 용성국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어머니를 포로로 잡아가 왕비를 삼았다. 그런데 7년이 지난 후 탈해가 다파나국으로 생모를 찾아가자 다파나국왕이 이를 알고는 멀리 떠나 보내라 명령하게 되어 그 어머니는 어린 탈해를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탈해는 이곳 저곳 항해 끝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가 다시 진한의 아진포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어느 노파를 만나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탈해가 아진포에 도착한 때가 혁거세거서간 39년인 기원전 19년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탈해가 서기 57년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62세였다면 연대가 맞지 않는다. 탈해가 기원전 5년에 태어나 7세의 나이에 신라 아진포 해변에 도착했다면 그 때는 서기 2년으로서 혁거세 59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혁거세거서간 39년이라는 것은 혁거세거서간 59년의 오기로 보인다.


 
그리고 탈해가 태어난 곳이 왜국 동북쪽 1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 일본열도의 동북쪽 1천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고대 왜국의 동북쪽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지금의 압록강 북쪽 길림성 집안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다가 아진포 바닷가에 용성국 왕자가 살고 있고 똑똑하다는 소문이 신라 남해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왕이 그에게 딸 아효를 주고 사위를 삼게 되어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할 수 있었고,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어 석씨들이 신라의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보여지는데, 그는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재위 24년인 서기 80년 8월에 85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리고 탈해이사금 때 또 하나의 성씨인 김씨의 시조 알지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어느 왕족이나 귀족의 딸이 말못할 사연으로 아이를 낳게되자 그를 어찌 처리할 방법이 없자 금궤에 넣어 시림 숲 속에 걸어 놓았는데, 마침 탈해이사금의 눈에 띄게 되어 탈해의 양자가 된 것이라 추정된다.
 
  


  5대 파사이사금은 탈해이사금이 죽자 왕위에 올랐는데, 삼국사기는 그를 "유리왕의 둘째아들이다. 혹은 유리왕의 아우 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리이사금에게는 나로라는 동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리이사금이 왕위를 탈해에게 물려주는 통에 유리왕의 아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랬다가 탈해왕이 죽은 후 유리왕의 동생 나로의 증손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파사이사금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파사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재위 8년에 이르러 말하기를, "짐이 덕이 없이 나라를 가져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했다. 덕은 백성들은 안정시키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이 두려워하기에 부족하다"는 말을 했는데, 앞서 백제의 온조왕은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변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 라고 하면서 도읍을 한수 남쪽으로 옮겼고, 또 백제의 온조왕이 웅천에 목책을 설치하자 마한왕이 말하기를, 내가 (마한의) 동북쪽 1백리 되는 땅을 나누어주어 편히 살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어찌 마한의 영역을 침범하느냐 하여 온조왕이 목책을 헐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들 세 왕들의 말을 종합하면 백제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백제의 서남쪽에는 마한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또 신라의 남쪽에는 가야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수서에는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산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에는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신라는 변한의 먼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땅의 크기가)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백제가 그 서쪽인 하북성 진황도, 당산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북쪽 또는 서북쪽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백제의 서남쪽인 당산 부근에 마한이 있었고,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니,   한반도에 삼국이 있었고,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이 마한이었고, 경상남도 지역에 가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배운 우리로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패수를 찾지 못하고, 살수를 찾지 못하며, 한사군을 찾지 못하고, 위례성이나 한성을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옛 강역을 잘 모르고 엉뚱한 한반도에서 그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북경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강역이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정확히 밝힐 수 있는 사서들의 기록에 대하여 설명이 곤란한 것은 기록이 이상하다 해버리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최리의 낙랑국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옛 기록들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꿰맞추어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역사의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게 될 것인데, 과연 어느 양심있는 역사학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