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한반도 대구는 신라의 달구벌(達句伐)이 아니다 - 최초주장
신라 31대 신문왕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죽은 문무왕의 장자였다.
따라서 그는 그 아버지 문무왕으로부터 신라본토와 옛 백제 땅 그리고 고구려 남쪽 땅 일부를 물려받아 그 땅을 아홉 주로 나눈다. 넓어진 강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의 신라지역을 나누어 상주·양주·강주라하고,
옛 백제지역을 나누어 웅주·전주·무주라 하며,
옛 고구려 남쪽지역을 나누어 한주·삭주·명주라 한다.
신당서에는 이때 신라의 강역이 횡으로 1천리, 종으로 3천리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북성 당산, 진황도, 요녕성 수중, 호로도, 내몽골 고륜기 부근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 북사 신라전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구당서 신라국전에도 "신라는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신라의 강역은 한반도 경주 부근을 말하는게 아니라 지금의 북경 동쪽 조백하로부터 동북쪽으로 요하까지였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9년(A.D.689) 조를 보면,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다가 실현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신문왕이 신라의 도읍을 서라벌(徐羅伐)로부터 달구벌(達句伐)로 옮기려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우리 모두는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이 한반도의 경주라고 하고 있고, 이때 신문왕이 도읍을 옮기려고 했던 달구벌이 대구(大邱)였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이 밝혀본 바에 의하면 한반도의 경주는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이 아니고,
신문왕 당시 신라의 도읍 서라벌(금성)은 지금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부근이었고, 신라는 대륙에 횡 1천리, 종 3천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륙신라의 신문왕은 도읍을 달구벌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700년도 넘은 나라의 도읍을 옮긴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서라벌(금성)의 기득권 세력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서 도읍 이전이 불가함을 주장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문왕은 결국 도읍이전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신문왕이 도읍을 옮기려고 했던 달구벌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가야산은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에 있는 대홍라산, 소홍라산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달구벌은 그 가야산의 동북쪽으로 비정된다. 지금의 호로도시 금성진(金星鎭) 부근으로 비정된다.
기왕에 옮길 바에야 달구벌 대신 멀찌감치 교통의 요지인 옛 임나 땅(지금의 진황도)쯤으로 옮겼으면 어땠을지.....................
어찌되었든 이때 신문왕은 달구벌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각오로 신라를 대제국으로 만들 웅대한 구상을 했을 것이나 사람들이 워낙 거세게 반대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의 신문왕이 옮기려고 했던 달구벌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대홍라산 동북쪽 평지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지금까지 우리는 그 기록을 한반도에 적용하여 달구벌이 대구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