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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리 - 비류백제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5. 28. 22:59


윤여동설 - 비류백제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 최초주장

 

 

                                                           [무너진 백제장성]

 

  우리는 지금 백제의 건국시조를 "온조왕(溫祚王)"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원래 "백제(百濟)라는 나라의 건국시조는 '비류(沸流)'라고 기록하고 있고, 온조왕은 '십제(十濟)'의 건국시조였는데, 후일 형인 비류왕이 죽자 온조왕이 비류백제와 온조십제를 통합한 후 국호를 새롭게 "백제(百濟)"라고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온조왕은 자신이 세운 나라인 십제의 국호를 버리고 형이 세운 나라인 백제를 국호로 삼았다는 말이 되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의 건국시조는 비류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고, 온조왕은 백제의 2대왕으로 기록해야 마땅할 것이나 삼국사기는 비류백제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는 있지만 단순한 일화정도로 취급하고 온조왕을 백제의 건국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66년이고, 당시 여자들이 대개 20세 이전에 혼인했음을 감안하여 소서노가 18세에 장자인 비류를 낳았고 그로부터 3년 후쯤 다시 차자인 온조를 낳았다고 추정해 보면, 비류는 기원전 49년 생이 되고, 온조는 기원전 46년 생이 된다.
  따라서 기원전 18년 이들이 백제와 십제를 건국할 때 비류왕의 나이는 32세, 온조왕의 나이는 29세가 된다.

 

   

☆ 비류와 온조는 주몽왕과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 동명왕의 손자로 보이는 부여우태와 연타발의 딸 연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우태가 일찍 죽자 소서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주몽왕과 재혼하게 되어 한때 양부와 양자사이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백제와 십제가 건국된 지 12년인 기원전 7년에 이르러 미추홀에 도읍했던 비류백제에 우리가 지금 잘 알 수 없는 위기가 닥쳐왔고, 비류가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속이 상해 화병으로 죽었거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비류가 미추(미추홀)는 토습수함(土濕水鹹 : 땅이 습하고 물이 찝질함)하여 편안히 살기 어렵다 하고는 위례로 와서 보니 이곳 도읍이 잘 정비되어 있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그만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들 모두가 위례로 귀순하였다.
  후에 위례(위례성)로 올 때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개칭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미추홀(미鄒忽)이나 위례성(慰禮城)은 지금의 난하 중류 대흑정수고 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고, 비류왕이 죽을 때의 나이는 43세였고, 온조왕의 나이는 40세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기원전 6년에 왕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죽었고, 다시 그 다음 해인 기원전 5년에 이르러 한수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이때 백제의 강역이 북쪽으로는 패수까지, 남쪽으로는 웅천, 서쪽으로는 대해, 동쪽으로는 주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강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류백제의 비류왕이 43세 정도의 나이로 죽었다면 당시 비류왕의 태자로 봉해져 있었으며, 약 20세 정도는 되었을 비류왕의 아들은 이때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정상적이라면 아버지인 비류왕이 죽었으면 태자가 다음 왕위를 이어 비류백제의 왕위에 오르면 되었을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때 비류백제의 태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비류백제는 온조십제에 흡수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 후 백제역사에서 비류백제 태자의 행적은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비류에게 아들이 없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비류백제의 태자가 통합에 반대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렸기 때문에 백제 역사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하면 어떨까?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침으로써 천년 사직을 문닫으려 하자 당시 태자였던 마의태자(이름은 김일이라 한다)는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내어준다는 말입니까?" 하였으나 왕이 고려에 투항할 것을 결정하자 마의태자는 통곡을 하면서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산나물을 뜯어먹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하고, 금나라, 청나라가 바로 이 마의태자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혹시 옛날 비류백제의 태자도 신라 마의태자가 그랬던 것처럼 통합을 반대하고 그곳을 떠났고, 어딘가에 다시 나라를 세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가 멸망하자 왜국 사람들은 서로 모여,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묘소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보면 왜국 사람들의 모국이 곧 백제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혹시 옛날 비류백제의 태자가 왜국으로 건너가 왜국의 왕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왜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 묘소가 백제에 있다고 했던 것은 아닐까?

 

☆ 고대 왜국의 위치는 지금의 일본열도가 아니라 발해 부근으로서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한반도에도 백제의 흔적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대륙에서 장자파의 근초고왕과 차자파의 무광왕(12대 계왕의 아들) 사이에 왕위다툼이 일어나 근초고왕이 승리하게되자 패한 무광왕은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지모밀지로 와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다시 백제를 세웠는데 그로부터 110여 년이 흐른 후에는 강국이 되어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게 되었다고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렇다면 이때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하고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을 무광왕은 어떻게 아무 연고도 없었을 한반도로 갑자기 건너올 수 있었고, 또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워 빠른 시일 안에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혹시 옛날에 비류백제의 태자가 한반도로 먼저 건너와 나라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무광왕도 그 혈연관계로 한반도로 건너와 바로 지모밀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중국 양자강 부근에도 백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물론 이것을 서기 660년에 백제가 멸망할 때 당나라에서 백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 그곳 양자강 부근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곳에 백제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옛날 비류백제의 태자가 그곳으로 건너가 다시 나라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곳에 백제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하여튼 백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미스터리의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