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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왜국의 건국년도를 600년 앞당겨 조작한 일본서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28. 18:58

윤여동설 - 왜국의 건국년도를 600년 앞당겨 조작한 일본서기 - 최초주장

 

 

 

 

 

신당서 일본 전을 보면, 
"그 왕의 성은 아매씨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가 「천어중주」라고 한다. 언렴에 이르기까지 무릇 32세였는데 대개「존」이라 불렀고 축자성에서 살았다.
  언렴의 아들 신무가 왕위에 올라「천황」이라 바꾸고 도읍을 대화주로 옮겼다. 뒤를 이어 수정, 안녕, 의덕, 효소, 천안, 효령, 효원, 개화, 숭신, 수인, 경행, 성무, 중애로 이어졌는데 중애가 죽자 개화의 증손녀 신공이 왕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응신, 인덕, 이중, 반정, 윤공, 안강, 웅략, 청녕, 현종, 인현, 무열, 계체, 안한, 선화, 흠명이 왕위에 올랐다. 흠명 11년에 양나라에 조공을 바쳤는데 이때가 승성 원년(A.D.552)이었다.
  뒤를 이어 해달, 용명이 왕위에 올랐는데 또는 목다리사비고라고도 한다.
  수나라에 조공을 바쳤는데 이때가 개황(A.D.581∼600) 말로서 비로소 중국과 통했다.............. "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신당서는 신무천황이 언렴의 아들이고, 그 앞에도 32세가 이어져 왔다고 기록하고 있고, 33세인 신무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천황(天皇)"이라 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왜가 자신들의 왕을 천황이라 부른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 일본서기에는 신무천황이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의 넷째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신무천황이 왕위에 오른 때를 기원전 66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후대 천황들의 재위년도와 재위 중에 일어났던 사건이 중국이나 우리 역사와 일치하지 않아 일본 천황의 재위연도 중 상대에 대하여는 그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무천황 조를 보면, 그가 기원전 667년에 동정을 시작해 평정한 후 기원전 660년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강원에 정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그가 혼란한 시기를 틈타 정국을 수습하고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는 우리 고조선 시기에 해당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왕검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왕검성시대를 열었으나 건국한지 1500년이 지났을 때 왕실이 쇠약해져 왕권의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왕검조선의 왕권교체 사실을 우리는 지금 기자와 연관시켜 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1,122년 기묘년에 왕검조선의 왕권교체가 일어났던 것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도 동국군왕 개국연대에서 고조선을 전조선과 후조선으로 나누었고, 후조선의 시조는 기자로서 주 무왕 즉위원년 기묘년에 나라를 세웠고, 준왕이 기자의 41대 손이라 노래했다. 

 

  그러자 단군 고열가는 권력을 잃고 장당경(당장경이라고도 한다)으로 갔다가 다시 아사달로 옮겨 선조의 제사를 지내며 명목상이나마 상당기간 왕조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면,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고 왕검성에서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기자(왕검조선의 뒤를 기자조선이 이었는지의 사실 여부는 아직 논쟁 중에 있다. 이는 기원전 1,122년 기묘년에 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서자 기자가 은나라를 떠나 고조선의 고죽국으로 망명해 가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때 주 무왕이 고조선의 단군을 임명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장당경에서 머무르다가 다시 아사달로 옮겨 살다가 죽어 산신이 되었는데 1,908세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아사달로 들어간 후에도 약 400여 년 간 단군 위가 세습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옛날에는 어느 나라를 침공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더라도 왕실은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고 일정한 땅을 주어 그곳에서 살면서 선조의 제사 만은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아사달의 위치에 대하여 "경에는 무엽산 또는 백악이라고 했고, 백주 땅에 있었다고도 하고 혹은 개성 동쪽에 있었다고도 했는데, 지금의 백악궁을 말하는 것이다(經云 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개성이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현을 말하는 것이다. 
  왕검조선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도읍하고 사방 수천 리에 이르는 강역을 세력권 안에 넣고 있었는데, 지금의 승덕시 부근이  바로 옛 고조선의 왕검성이고,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이며, 고려의 서경이다.  
  우리는 지금 고려가 한반도의 개성에 도읍하고 5백년 왕조를 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려의 도읍 개경은 지금의 한반도 황해도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관성현을 말하는 것이고, 신라의 건국지는 한반도의 경주가 아니라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으로서 그곳이 바로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 금성이며, 백제의 오백년 도읍 위례성,남한성,한성은 진황도 도산 부근이다.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었다는 신라 파사이사금의 말 등이 그를 확인시켜 주는 말이며, 고려 역시 옛 한나라 때의 낙랑군 부근에 위치했다고 사서들은 말해주고 있다.

 

  만약 왕검조선의 건국년도가 기원전 2,333년이 사실이고, 1,500년 간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면 단군 고열가는 기원전 833년에 권력을 잃었다는 말이 되고,

건국한 지 1,908년 만에 왕검조선이 완전히 소멸했다면 왕검조선의 완전소멸 시기는 기원전 425년이라는 말이 되는데, 아직 이에 대한 결론이 없다. 
  이암의 단군세기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왕검조선 47세 단군 고열가가 권력을 잃은 시기를 기원전 238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북부여가 그 맥을 이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북부여의 맥을 고구려가 이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려 때 사람인 이암이 고려의 정통성을 고구려에서 찾고자 하는 차원에서 그러한 논리를 펼쳤다고 보여지는데, 역사적으로도 고구려는 북부여의 맥을 이었고, 백제는 졸본부여의 맥을 이었으며, 신라는 진한 땅에 위치했으나 왕실의 혈통은 동부여에 닿아 있다.
  그리고 대야발의 단기고사는 전단군조선을 단군왕검으로부터 25세 솔나 39년까지 1222년이라 하고, 후단군조선은 솔나가 왕검성을 서여에게 내어주고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솔나로부터 고열가까지 875년이라 하여 총 2,096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단군조선 단군 솔나 39년에 나라가 후단군조선과 기자조선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자의 신분을 중국 은나라에서 망명해온 기자가 아니라, 성은 환이요, 이름은 서여이며 전단조 19세 단제 종년의 아우인 청아왕 종선의 증손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단군조선의 맥은 북부여가 맥을 잇고, 기자조선은 42세 마한왕(준왕의 오기인 듯) 때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목지국(월지국이라고도 한다)으로 피신하여 다시 마한을 건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듯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우리 상고시대 역사의 진실을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왕검조선이 건국된 때는 요 25년 무진년으로서 기원전 2333년이라 하고, 조선의 준왕이 왕검성을 위만에게 빼앗긴 때는 기원전 194년이고, 전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위만조선이 소멸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때는 기원전 108년이다. 
  따라서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조선"이라는 나라가 왕권의 교체는 있을 지언정 어떠한 형태로든 존속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고, 그 중간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 텐데 아직 그 확실한 연혁에 대해서는 결론이 없으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총 2,226년 간 존속한 유서 깊은 나라였던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 고조선의 준(準)왕이나 그 아버지인 부(否)왕도 단군을 칭하지 않고 왕으로 칭한 것을 보면 황제 격인 단군이 이때까지도 명목상이나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군을 칭할 수는 없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고, 위만이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왕검성을 탈취한 후에도 국호를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조선(위만조선)"이란 국호를 계속 사용하고 황제를 칭하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자 명목상이나마 유지되던 조선의 단군 사직도 이때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닫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단군이란 구심점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때쯤에 이르러 제후들도 각자 자신들의 영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칭왕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때쯤 왜도 독립하여 나라를 세웠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왜인들은 왕검조선의 정치제도를 본떴으나 감히 단군이라고는 하지 못하고 새롭게 "천황"이란 칭호을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신대(神代) 기록은 고조선의 건국설화를 본떠 만들게 되었고, 일본건국설화가 환인, 환웅, 왕검설화와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일본서기의 기록이 120년 상향되어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로 올라가면 그보다 훨씬 많은 기간을 상향기록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신무천황이 45세에 동정을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천황재위기간이 76년이라 기록하고 있고, 2대는 천황재위기간이 33년, 3대 38년, 4대 34년, 5대는 무려 83년, 6대는 102년, 7대는 76년, 8대는 57년, 9대는 60년, 10대는 68년, 11대는 99년, 12대는 60년, 13대는 60년, 14대는 중애 9년과 신공섭정 69년, 15대는 41년, 16대는 87년, 17대는 6년, 18대는 5년, 19대는 42년으로서 중간의 공위까지 포함하여 계산할 때 평균 재위기간이 무려 56년이나 된다.
  이는 동일시대인 고구려 왕들의 평균재위기간 26년과 백제 왕들의 평균재위기간 22년, 신라 왕들의 평균재위기간 18년에 비해 과도하게 길다.
  이는 일본서기가 신무천황 앞 족보상 약 30대의 기간(20년X30대=600년)을 신무천황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연표를 만들다보니 재위기간을 늘려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1주갑(60년) 이상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천황들의 재위기간은 60년씩 하향 조정하여야할 것으로 생각되고, 또 30년 이상을 재위한 것으로 기록된 천황들의 재위기간도 30년씩을 하향 조정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 우리 역사와도 맞게 되고 중국 역사와도 시기가 일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신공왕후 섭정 55년 백제의 초고왕이 죽었다.
  56년 백제왕자 귀수가 왕위에 올랐다.
  64년 백제국의 귀수왕이 죽었다. 왕자 침류왕이 왕위에 올랐다.
  65년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아신왕)가 나이가 어려 숙부인 진사(진사왕)가 왕위를 빼앗아 왕위에 올랐다" 라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 삼국사기연표와 맞추어보면, 일본서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초고왕은 근초고왕(재위: 346-375)을 말하는 것이고, 귀수는 근구수왕(재위: 375-384)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는 근구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침류왕(재위: 384-385)이며, 침류왕의 장자는 아신이었으나 아신이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인 침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 숙부인 진사왕(재위: 385-392)이 왕위에 올랐다가 진사왕이 죽은 다음에야 아신왕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신공황후의 섭정기를 서기 201년부터 269년까지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우리 역사와 비교하면 꼭 120년의 기년 차이가 난다.
  신공황후 섭정기 때 일본서기가 2주갑 상향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 신공황후의 섭정기는 서기 321년부터 389년인 것이다.

  그리고 21대 웅략천황 조를 보면, 백제 무령왕 탄생 기사가 들어 있다.
  무령왕의 탄생년도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 의해 서기 462년임이 밝혀졌는데 웅략천황 조에는 461년에 무령왕이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비록 1년의 차이가 나지만 이 정도는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고, 그 이후도 매우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웅략천황 이전 천황들의 재위년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8년(B.C.50) 조에는, "왜인 군사가 변경을 침략하려다가 시조가 신과 같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냥 돌아갔다"는 기사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때 이미 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어 왜국이 신라보다도 먼저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하겠다.

 

  그렇다면 왜국은 정확히 언제 건국되었을까?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강력한 세력인 위만조선이 소멸하고 새로운 강한 세력인 한(漢)나라가 등장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될 때 한사군의 진번군이 되어버렸던 원래의 진번군 지역에서는 기원전 82년경 맥국이 건국되고, 임둔군 지역은 동부여에게 자기들이 살던 땅을 빼앗기고 동쪽으로 이동해 온 예(동예)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漢)나라에서는 결국 진번, 임둔 두 군을 폐지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 기원전 128년에 예의 땅에 설치되었다가 바로 폐지되었다는 원래의  창해군은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을 말하는 것인데, 기원전 86년경 북부여의 해부루가 졸본부여에게 밀려 북쪽으로 옮겨와서 예국(옛 창해군) 땅을 차지하고 동부여를 세우자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동쪽으로 개마대산을 넘어 임둔군 땅으로 옮겨와서 임둔군 땅을 차지하고 다시 예를 재건하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이 예를 동예라 부른다. 동예는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부근으로 비정되고, 맥국은 능원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왜국은 기원전 82년 경의 혼란기를 이용해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본천황의 왕위 계승을 보면,
  왜국의 건국시조인 신무천황은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의 넷째 아들이고, 강원에 도읍했다.
  2대 수정천황은 신무천황의 셋째 아들이며, 도읍을 갈성으로 옮겼다.
  3대 안녕천황은 수정천황의 장자이고, 도읍을 편염(片鹽)으로 옮겼다.
  4대 의덕천황은 안녕천황의 둘째아들이며, 도읍을 경지(輕地)로 옮겼다.
  5대 효소천황은 의덕천황의 장자이고, 도읍을 액상(掖上)으로 옮겼다.
  6대 효안천황은 효소천황의 둘째 아들이고, 실지(室地)로 옮겼다.
  7대 효령천황은 효안천황의 장자이고, 도읍을 흑전(黑田)으로 옮겼다.
  8대 효원천황은 효령천황의 장자이며,도읍을 경지(輕地)로 옮겼다.
  9대 개화천황은 효원천황의 둘째 아들이고, 도읍을 춘일(春日)로 옮겼다.
 10대 숭신천황은 개화천황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고 있고, 어머니는 이향색미명이며, 도읍을 기성(磯城)으로 옮겼다.
  11대 수인천황은 숭신천황의 셋째 아들이고, 도읍을 전향(纏向)으로 옮겼다.  
  12대 경행천황은 수인천황의 셋째 아들이고, 전향에 그대로 도읍했다.
  13대 성무천황은 경행천황의 넷째아들이고, 아들이 없어 조카인 족중언존을 황태자로 삼았다.
  14대 중애천황은 일본무존의 둘째 아들이다.
  성무천황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족중언이 천황의 자리를 이었으며 이가 중애천황이다. 
  그런데 중애천황이 재위 9년에 축자의 강일궁에서 죽자 그 비인 기장족희가 정권을 잡고 무려 69년이나 왜국을 통치했다.
  기장족희는 개화천황의 증손인 기장숙미왕의 딸이다.
 
☆ 일본무존은 12대 경행천황의 쌍둥이 아들 대대, 소대 중의 소대를 말한다.

  

  15대 응신천황은 중애천황의 넷째 아들이고, 어머니가 기장족희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중애천황은 재위 9년 2월에 죽었고, 응신천황은 그 해 12월 14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기장족희가 섭정을 69년이나 했다고 하고, 69세쯤에 왕위에 올랐을 응신천황도 왕위에 올라 41년 간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응신천황은 110세 정도까지 살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믿기 어렵다.
  따라서 응신천황은 중애천왕의 넷째 아들이 아니라 넷째 아들의 아들쯤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기장족희의 아들은 기장족희의 69년 섭정기간 중에 일찍 죽게 되어 기장족희가 죽자 손자인 응신천왕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는 응신천황의 출생년도를 경진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중애천황의 넷째 아들의 출생년도일 것이고, 그 손자는 그로부터 30년쯤 후인 350년경 태어나 390년 경인년에 40여세의 나이에 천황에 올라 재위 11년인 50여세의 나이로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응신천황은 기장족희의 손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6대 인덕천황은 응신천황의 넷째 아들이고, 난파(難波)에 도읍했다.
  원래 응신천황의 태자는 인덕천황의 동생이었던 토도치랑자였는데, 동생이 형인 인덕에게 양보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서로 왕위를 양보하는 통에 응신천황이 죽고 만 2년 간 왕위가 비어 있었다. 
  17대 이중천황은 인덕천황의 장자인데 후손없이 30세 이전에 일찍 죽었던 듯 하다.
  18대 반정천황은 이중천황의 동복아우인데 역시 일찍 죽었던 듯 하다.
  19대 윤공천황은 반정천황의 동복아우이다. 따라서 이중천황, 반정천황, 윤공천황 이 세 사람은 동복 형제인 것인데, 앞의 두 형들이 후손 없이 죽었고, 윤공천황 역시 장년에 중병에 걸려 보행을 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동복 형제들이 모두 혈압이 높아 젊은 나이에 죽었던 듯 하고, 윤공천황 역시 중풍에 걸려 거동이 불편했던 상태로 왕위에 오른 듯 하다.
  20대 안강천황은 윤공천황의 둘째 아들인데, 윤공천황이 죽고 태자로 봉해져 있던 목리경황자(木梨輕皇子)가 포학하여 국인이 따르지 않자 대신들이 그를 왕위에 올리지 않고 둘째인 안강천황을 추대하게 되어 천황에 즉위했는데, 인덕천황의 아들이며 윤공천황의 동생이었던 대초향황자(大草香皇子)의 아들 미륜왕(眉輪王)에게 시해당했다. 
  21대 웅략천황은 윤공천황의 다섯째 아들로서 안강천황이 미륜왕에게 시해 당한 난국을 수습하고 천황에 즉위했다.
 
  일본서기의 웅략천황으로부터 그 이전 왕들의 재위 기간을 역사적 상황과 역사 기록 등을 감안하여 조정해 보면 아래와 같다.
 
구분  천황명      일본서기          필자 조정          재위기간조정        비고      
 1대 신무천황  B.C.660 - 585     B.C.60 - 45       76년 → 16년     사후 공위2년  
 2대 수정천황  B.C.582 - 550     B.C.42 - 10       33년
 3대 안녕천황  B.C.549 - 512     B.C.9 - 2          38년 → 8년       사후 공위1년
 4대 의덕천황  B.C.510 - 477     A.D.1 - A.D.34   34년                사후 공위1년
 5대 효소천황  B.C.475 - 393     A.D.36 - 58       83년 → 23년
 6대 효안천황  B.C.392 - 291     A.D.59 - 100    102년 → 42년
 7대 효령천황  B.C.290 - 215     A.D.101 - 116    76년 → 16년  
 8대 효원천황  B.C.214 - 158     A.D.117 - 143    57년 → 27년
 9대 개화천황  B.C.157 - 98      A.D.144 - 173     60년 → 30년
10대 숭신천황  B.C.97 - 30       A.D.175 - 212     68년 → 38년
11대 수인천황  B.C.29-A.D.70   A.D.213 - 251     99년 → 39년
12대 경행천황  A.D.71 - 130     A.D.252 - 281     60년 → 30년
13대 성무천황  A.D.131 - 190   A.D.282 - 311      60년 → 30년    사후 공위1년
14대 중애천황  A.D.192 - 200   A.D.313 - 320      9년  
섭정 신공황후  A.D.201 - 269   A.D.321 - 389     69년
15대 응신천황  A.D.270 - 310   A.D.390 - 400     41년 → 11년     사후 공위2년
16대 인덕천황  A.D.313 - 399   A.D.403 - 429     87년 → 27년
17대 이중천황  A.D.400 - 405   A.D.430 - 435      6년
18대 반정천황  A.D.406 - 410   A.D.436 - 440      5년                사후 공위1년
19대 윤공천황  A.D.412 - 453   A.D.442 - 453     42년 → 12년
20대 안강천황  A.D.454 - 456   A.D.454 - 456      3년
21대 웅략천황  A.D.457 - 479   A.D.457 - 479     23년

 

  위와 같이 정리해보면 왜국은 기원전 60년에 건국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윤공천황으로부터 기년을 올리기 시작해 인덕천황 때는 90년을 올려 잡게 되고, 응신천황 때는 120년을 올려 잡게 되며, 신공황후는 실제 오래 살았던 것으로 보이므로 그대로 120년을 유지했고, 상대로 올라가면서 점점 기년을 올려 잡아 초대 천황인 신무천황에 이르러서는 무려 600년(10주갑)을 앞당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하니 다른 나라의 역사 기록과 일치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20년(A.D.173) 조의 "왜국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 왔다"는 기록 속의 비미호는 왜국 9대 개화천황의 황후로 기록되고 있는 "이향색미명(伊香色謎命)"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이향색미명(伊香色謎命)이란 보는 사람들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후한서를 보면 비미호에 대하여 나이 들었으나 시집가지 않았고 귀신을 부리며, 능히 무리들을 현혹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이향색미명은 남편인 개화천황이 죽은 상태였으므로 나이 들었으나 시집가지 않았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녀는 원래 효원천황의 후궁이었는데, 효원천황이 죽자 전실 자식인 개화천황과 다시 혼인해 황후가 되었고, 또 아들 같은 남편인 개화천황을 꼬드겨 자신의 아들로서 황태자를 삼자 그것이 발단이 되어 왜국에 대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중국 사서에는 환령지간(전한 효환제의 영강 원년은 서기 167년이고, 효령제 건녕 원년은 서기 168년이다)에 왜국에 대란이 있어 서로 싸우는 통에 상당기간 주인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매우 혼란한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일본서기 개화천황 조를 보면, 왕위다툼이 일어났음직도 하다.
  9대 개화천황은 8대 효원천황의 제2자로서 천황의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재위 6년에 이르러 서모(庶母: 아버지 효원천왕의 후궁)였던 이향색미명을 왕비로 맞아들여 황후로 삼았고,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숭신천황)을 낳았다.
  이에 앞서 개화천황은 첫 왕비인 단파죽야원(丹波竹野媛)이란 여인과 혼인해 언탕산우명(彦湯産隅命)이란 아들을 낳았고, 둘째왕비 모진원은 언좌왕(彦坐王)을 낳았다.
  그런데 셋째 왕비였던 이향색미명이 앞의 두 왕비를 제치고 황후가 되었고 개화천황 28년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삼게 되자 분쟁이 시작되었고, 개화천황이 죽자 세 여인을 중심으로 왕위다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결국 이향색미명이 승리하여 그 아들 숭신을 왕위에 올리고 나이 어린 숭신천황을 대신하여 왕태후로서 섭정을 했다고 보여지므로 이 여인이 바로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낸 비미호 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중애천황의 부인이었던 기장족희 즉 신공황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비미호(卑彌乎)는 기장족희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 판단된다.
     
☆ 환령지간이란 후한의 효환제와 효령제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서 효환제가 죽고 효령제가 즉위한 때는 168년이다. 따라서 이향색미명은 이때쯤 권력을 장악한 후 왕권을 행사해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삼국지 권4 위서4 삼소제기 제4 정시4년(A.D.240) 조에는 "겨울 12월 왜국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冬十二月 倭國女王 彌呼遣使奉獻)"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 삼국사기의 기록과 연대가 다르고, 기본적으로 일본서기의 연대자체가 다른 나라의 역사와 맞지 않아 지금까지도 비미호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의 기록이 잘못된 듯 싶고, 비미호로 추정되는 이향색미명은 개화천황이 죽은 후 11년 정도 섭정을 한 후 그 아들 숭신천황에게 왕권을 돌려주고 섭정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