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동예(東濊)는 내몽골 고륜기 부근에 위치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6. 24. 20:03

윤여동설 - 동예(東濊)는 내몽골 고륜기 부근에 위치했다 - 최초주장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동예(東濊)를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강원도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던 나라였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인 것일까?
  옛 사서의 기록들에는 예(濊) 또는 예맥(濊貊)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하여 후한서는 "예(동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동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고조선) 땅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는 "예(동예)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다. 지금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백성이 2만 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후한서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3대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내속하였으므로 (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바로 이 예가 기원전 128년에 일어났던 창해군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지금 우리는 이 창해군의 위치를 놓고 주장들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위만조선이 북한 평양의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고, 요동군은 요하의 동쪽인 요동반도 일원에 위치했으며, 예(동예)가 강원도 일원에 위치했던 나라였다고 역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이때 예왕 남려가 자기나라 땅을 버리고 백성 28만명을 직접 이끌고 요동군으로 이동해 갔고, 한나라에서는 남려가 새로 정착한 그곳을 창해군이라 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은 한반도 강원도에 위치했을 예국에서 28만명이라는 대규모 집단이 어떻게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을 위만조선의 강역을 가로질러 요동군으로 이동해 갈 수가 있었겠느냐고 말이 안 된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후한서의 기록은 이때 예왕 남려가 자기나라 백성 28만명을 직접 이끌고 요동군으로 이동해 갔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나라 백성 28만명의 호적을 가지고 요동군에 내속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28만구라는 것은 28명의 오기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같은 기록을 가지고도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니 옛 기록 속에서 진실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전한의 무제는 예왕 남려가 백성들을 이끌고 내속해오자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고, 요동군에서부터 창해군까지 교통로를 개설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 이때 예왕 남려는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우리가 지금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갈등이 발생하자 위만조선과 결별하고 요동군으로 사신을 보내 한(漢)나라에 내속하고 싶다고 의사를 타진했을 것이고, 이때 예의 백성이 28만명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자 한(漢)나라에서는 이게 웬 떡인가 싶어 그를 흔쾌히 승낙하고 남려가 왕으로 있던 예국 땅을 창해군이라 명명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대하여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때 한(漢)나라에서 어떻게 요동군에서부터 위만조선의 강역을 통과하여 창해군까지 연결하는 교통로를 개설하여 두 군을 연결하려 시도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도로 공사를 시작했고,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 연나라, 조나라의 경제가 파탄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도 보이고, 또 공사가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자 이 창해군은 2년 후인 기원전 126년에 폐지되기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보인다는 점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때 한(漢)나라에서 취한 행동 즉 요동군에서 위만조선의 강역을 가로질러 예국인 창해군까지 교통로를 만들려고 했다는 발상 자체에 대하여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요하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요동군에서 어떻게 평양에 도읍했다는 위만조선의 강역을 가로질러 통과하는 도로를 개설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 한(漢)나라에서는 무슨 배짱으로 적국인 위만조선의 강역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 기록 속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후한서가 말해주는 예의 위치]
            
                고구려        옥저        

 

          낙랑                예              대해  
                            (창해군)

 

  후한서는 낙랑의 동쪽에 예(동예)가 위치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사실 초기 낙랑군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낙랑군의 군치였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북한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한(前漢)나라 때의 낙랑군이 사실은 평양으로부터 수천리 떨어진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중국 사서들은 알려주고 있으니, 낙랑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예(동예)는 지금의 내몽골 오한기, 고륜기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비정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후한서 부여국전을 보면,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濊)의 땅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그 나라 노인들은 자기들이 옛날 다른 곳으로부터 망명해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나라의 옥새에 예왕지인이란 글자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이라 부르는 옛성이 있으니 아마 이곳이 본래는 예, (맥? : 오기일 것이다)의 땅이었으나 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현재의 부여(동부여) 땅이 옛날에는 예의 땅이었다는 말이고, 예가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진한의 북쪽인 임둔군 땅으로 쫓겨가서 다시 예(동예)를 건설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창해군을 설치할 당시에는 예가 현재의 동부여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되는데, 곧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일원이다.  

  그렇다면 요동군에서 창해군까지 도로를 개설하려 했다는 것이 사실은 고대의 요동군인 지금의 북경으로부터 정람기까지 도로를 개설하려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필자가 보기에 위만조선의 강역을 통과하지 않고 길을 내려면 팔달령을 넘고, 선화, 장가구를 지나 지금의 대경문장성을 넘어 내몽골을 통과하여 정람기까지 도로를 내려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 정도 거리에 도로를 개설하려면 엄청 힘든 일이었을 것인데, 옛날에 그 먼 거리에 길을 만들려고 했으니 결국에는 완성하지 못하고, 창해군도 폐지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창해군 사건 즉 예와 위만조선의 갈등이 후일 한(漢)나라라는 외세를 불러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어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결국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됨으로써 조선이나 예 모두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는 민족적 치욕을 당하게 되니 어부지리라는 고사가 생각나는 것은 필자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 임둔봉니가 출토된 호로도 일원을 임둔군으로 비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자치통감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사실은 7640리) 떨어져 있고,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으로서 장안에서 7,640리(사실은 6138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두 군의 거리를 바꾸어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진번군은 진황도 도산 북쪽 능원부근에 설치되었던 군이고, 임둔군은 내몽골 오한기, 고륜기 부근에 설치된 군이었기 때문이다.  

 

 

 

 

  예가 임둔군 지역으로 옮겨간 이후의 기록들을 보면 예를 예맥이라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왜 두 이름을 혼용하여 썼는지 아직까지 그 확실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예(동예)의 언어와 풍속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다고 하였고, 동성간에는 혼인하지 않았으며, 호랑이를 신으로 모신다고 했고, 예 사람들은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천문지식이 발달해 있었으며, 추수를 마친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축제를 벌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이 새도록 술 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놀았다고 하고, 과하마라는 조랑말이 많았고, 낙랑단궁이라는 좋은 활이 생산되어 중국에까지 소문이 났었다고 하며, 비단을 짤 줄 알았고, 바다에서는 반어피(해표가죽이라고도 한다)가 유명했고, 담비도 많이 잡혔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반도 강원도에 관한 기록이었다고 생각했던 이러한 모든 기록들이 한반도 강원도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사실은 요하 서쪽 지금의 내몽골 오한기, 고륜기 일원에 관한 기록이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