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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화 - 역관 홍순언과 보은단동 이야기

윤여동 2008. 7. 8. 23:32

윤여동설화 - 역관 홍순언과 보은단동(報恩緞洞) 이야기

 

       [경복궁 자경전 꽃담] 

 

  옛날 조선시대 한성부에 보은단동이 있었으니 곧 역관 홍순언이 살던 곳이다.  

  순언은 호협하고 의를 좋아하였는데, 젊을 때 명나라의 서울인 북경에 가서 일세의 미인을 품어보고자 하여 많은 은자를 가지고 화방(기생촌)으로 가서 제일가는 명기를 찾았는데, 한 여자가 있어 생김은 절세가인인데, 소복을 입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순언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본래 사천사람으로서 아버지의 관직이 주사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고 어머니도 뒤 따라 돌아가셨으며, 또한 형 마저 죽어 세 분을 임시로 매장하여 두었는데, 고향으로 모셔다가 장사지낼 방도가 없어 부득이 화류계에 나와 몸을 팔아서라도 장사를 치르려 하는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다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
  "오늘 처음 나왔기 때문에 아직 몸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순언이 가엾게 여겨, 가지고 있던 은자 천냥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이면 영구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더럽히지 말고 돌아가 장사지낸 다음 선비의 가문으로 시집가거라" 하고는 누이동생을 삼고 돌아오니 그 여인이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노라 하며, 순언의 성명을 물어 알아둔 후 영구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좋은 자리를 찾아 장사지냈다.
  그 후 시집을 가서 상서 석성의 부인이 되어, 순언의 은혜를 갚고자 하여 해마다 스스로 누에치고 비단을 짰는데, 항상 비단 첫머리에 "보은단(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석상서의 부인은 조선 사신이 명나라에 갈 때마다 반드시 순언이 왔는가를 알아보았다.
  수년 후 순언이 종계변무사를 따라 역관의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였다.    
  이때 석상서가 예부시랑이었는데, 하루는 순언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놓고 융숭하게 대접하였는데, 한 귀부인이 의복을 갖추어 입고 뜰 아래에 나와 절을 하고, 당위로 올라와서 술잔을 올리는 것이었다.
  순언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해하자 석시랑이 우선 술잔을 받게 한 다음 자세하게 사실을 말해 주었는데, 그 귀부인이 바로 몇 년 전 순언이 은자 천냥을 주어 부모의 영구를 고향으로 모셔 장사지내게 했던 그 여인으로서 지금은 석시랑의 부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순언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강을 건너려 하는데, 사람이 와서는 시랑 부인의 친필 서신과 함께 예단, 보은단 수십 필, 기타 많은 진귀한 물품들을 가지고 와서 강가에 쌓아 두고 가니 순언이 할 수없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사신의 임무를 띠고 갔던 일도 석시랑의 도움으로 성공하였으므로 역관인 순언도 그 공을 인정받아 광국공신에 책봉되고 당성군에 봉해졌으며, 지중추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순언이 살던 마을을 "보은단동"이라 불렀다고 하고 또 담장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다고 하여 "미장동"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에 임진왜란 때 석성이 병부상서가 되어 조선에서 주청하는 병기와 군량 등을 힘써 주장하여 보내 주었는데, 이것은 그 부인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사는 나라에 대한 보답의 뜻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조선호텔, 프라자호텔, 북창동 부근이 바로 옛 보은단동이었다고 한다. [동국여지비고 한성부 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