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영녕고성(고구려 국내성 추정지, 규모 가로세로 각900m, 좌표 동경116도09분35초 북위40도31분25초)]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은 그 아버지인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꽤나 넓어진 강역을 물려받았다.
고구려는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나라였다.
☆ 주몽은 기원전 58년 봄에 동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으로 가서 딸만 셋이 있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을 했는데, 그 해 10월에 졸본부여의 왕이 죽으면서 그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어 대제국 고구려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 추모왕(주몽왕)은 기원전 37년에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로 국호를 바꾸고는(?) 말갈을 정복했고, 기원전 36년에는 비류국 통합, 기원전 32년에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 정복, 기원전 28년에 북옥저를 정복하고는 기원전 19년에 죽었고,
그 아들 유리왕은 왕위에 올라 서기 3년 10월에 이르러 도읍을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필자주 : 국내왕궁과 가까이 위치한 산성으로 생각된다)을 쌓았으며,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에 국내성(필자주 : 국내 시가지에 쌓은 왕성으로 생각된다)을 쌓았는데,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이다.
졸본은 현토군과 요동군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에 제사지낼 때 제물로 쓸 돼지가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유리왕은 설지로 하여금 도망간 돼지를 찾게 했는데, 국내까지 가서야 돼지를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설지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국내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풍성한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하고 또한 전쟁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마침 도읍이전을 생각하고 있던 유리왕은 직접 그곳 국내까지 가서 둘러보았고, 서기 3년에 국내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 국내(국내성)의 위치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 국내성을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10대 산상왕 13년(A.D.209) 10월에 국내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고,
11대 동천왕 20년(A.D.246)에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이 함락되자
21년(A.D.247)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16대 고국원왕 때인 342년에 환도성으로 다시 이거했으나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또 다시 함락 당하자 343년 7월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을 지금의 하북성 적성 후성진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도망간 돼지를 따라 국내까지 갔을 정도였고, 물이 깊다고 했으므로 국내(국내성)는 졸본(후성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국내성은 압록강(압록수) 부근에 위치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인데, 이는 후세 고려가 천리장성을 쌓을 때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과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의 중간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 흥화, 정주, 영해, 영덕, 영삭, 운주, 안수, 청새, 평로, 영원, 정융, 맹주, 삭주 등 13주를 거치고, 요덕, 정변, 화주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닿으니 길이가 1천여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고구려가 668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보장왕이 항복을 하자 당나라에서는 669년에 고구려의 모든 성을 나누어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하려 했는데, 이때 압록강 이북(필자주 : 이서의 오기)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한개였고, 그 중의 하나가 국내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 그런데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100여년 전 고려 사람들은 국내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김부식과 고려의 학자들은 이 국내성이 어디에 위치했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고려의 강역 밖에 국내성이 위치했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압록강은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 것일까?
한원에는 압록수에 대하여,
"후한서와 그 지리지에는 '현토군 서개마현, 마현의 마자수는 서북쪽에서 염난수로 흘러 들어와 서남쪽으로 서안평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길이가 2천1백리이다'라고 하였고,
응소는 말하기를 '마자수는 서쪽에서 염택으로 흘러 들어온다'고 하였다.
고구려기에도 '마자수를 고구려에서는 일명 엄수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이름은 압록수라고 하고, 물고기가 떠올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라에 전해진다. 동북쪽 말갈국 백수의 물이 오리의 머리색깔과 비슷하므로 속명으로 압록수라고도 하는데, 요동에서 5백리 떨어져 있다. 국내성 남쪽(필자주 : 동쪽이 아닐까?)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드는 또 한 강과 합하여 염난을 이룬다. 두 강이 합해져 서남쪽의 안평현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백하, 밀운수고, 조백하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곧 지금의 북경 북쪽을 흐르는 백하가 옛 압록수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내성은 한반도 북쪽 집안이 아니라, 백하가 흐르는 북경 연경현 부근으로서 그곳의 영녕진(永寧鎭)이 고구려의 두번째 도읍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자 !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