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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살수(薩水)는 한반도 청천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12. 08:45

윤여동설 - 살수(薩水)는 한반도 청천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는 모양이 마치 스님들의 머리모양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살수(薩水 보살살 물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을지문덕이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려고, 싸우고는 도망하고 또 싸우고는 도망하곤 하여, 우문술이 하루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그들은 계속 이기자 자신감이 생겼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못 이겨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는 체 하고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대를 돌려세운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 하였더니 우문술이 자기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았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튼튼하여 빠른 시일 내에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드디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돌아가려 하였다.
  우문술이 방진을 치면서 행군을 하는데 우리군사가 사방으로 공격하니 우문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가을7월 우문술의 군사가 살수(薩水)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건넜을 때에 우리 군사가 뒤에서 그들의 후미부대를 공격하니 적장 우둔위 장군 신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장수와 군졸들이 하루 밤 하루 낮 사이에 압록강(鴨綠江)까지 450리를 도망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주 : 살수에서 압록강까지는 450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450리라는 것은 살수에서 요동성까지의 거리일 것이다]

 

  위 글은 수 양제의 고구려 2차 침입 때의 기록인데, 우문술이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에 걸려 그를 쫓아 압록강을 건너고, 살수, 패수를 건너 평양 부근까지 왔다가 철수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의 전투기록을 보면 수나라 군은 처음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함락시키고는,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을지문덕을 쫓아갔고, 그 다음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지점까지 왔다가 다시 철수할 때 절반의 군사는 이곳 살수에서 죽게 되고, 나머지 군사들도 고구려군에게 거의 모두 잡혀 죽었다.
  기록에는 수나라 군이 원래 30만 5천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간 자가 2천 7백 명뿐이었다고 하니 이때 수나라 군은 거의 전멸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그런데 기록들을 감안하여 강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거리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이 그려진다.
 
  요                압      동쪽 →       살  동쪽 →  평                 
  수    요동성   록      450리         수              양

                     강                                       성 
  
☆ 옛날 한 무제의 명을 받아 위만조선을 공격한 육군의 순체는 패수를 건넌 후에야 왕검성의 서북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하고, 수서에는 평양성의 남쪽으로 패수가 흐른다고 했으며, 위 기록에는 살수를 건너 계속 동쪽으로 가 평양성 부근 30리 지점에 도착했다고 하고 있으니 결국 패수는 평양성의 서쪽으로부터 남쪽을 지나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그림을 보면 지금 한반도의 상황과는 방향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지금의 요서지역에서 북한 평양을 향해서 간다면, 요하를 건너 동남쪽으로 가야 압록강에 도착하고, 또 압록강을 건너 북한 평양을 향해서 가려면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가야 청천강에 도착할 수 있으며, 청천강을 건너서도 계속 남쪽으로 가야만 한다.
  그런데 우문술은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갔고, 살수를 건너서도 계속 동쪽으로 가서 평양성 30리 지점에 진을 쳤으며, 살수에서 압록강(필자주 : 요동성의 오기로 보인다)까지의 거리가 450리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한반도 북쪽 압록강을 건너 북한 평양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기록 속에서 이때 수나라 군이 얼마나 심하게 쫓겼던지 하루 밤 하루 낮 동안에 450리를 도망쳐야만 했다는 것인데, 450리라면 180km이고, 하루 밤 하루 낮이라면 만 24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수나라 군은 24시간에 180km를 도망한 것이니 평균 시속 7.5km로 24시간을 달렸다는 말이 된다.
  24시간 잠을 안자고 걷는 것만도 어려울텐데 24시간을 계속 구보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고구려 군에게 쫓긴 수나라 군은 살아남기 위하여 시속 7.5km로 24시간 동안을 쫄쫄 굶으며 달려야 했으니 대다수가 낙오했을 것은 뻔한 것이다.   
  그리하여 말 타고 뒤쫓는 고구려 군은 수나라군의 뒤를 쫓아가면서 낙오하는 수나라 군을 차근차근 잡아죽이면서 뒤쫓아 결국 30만 명 이상을 죽였고, 2천7백 명만이 간신히 살아 요동성까지 돌아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대승을 한 것이고, 이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기폭제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살수였던 것이다. 
 

  살수에 대한 또 다른 기록도 있는데, 그 기록도 한번 검토해 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6년(A.D.494) 조를 보면,
  "가을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薩水)벌판에서 고구려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여 견아성(犬牙城)을 지키는데 고구려 군사가 포위하였다.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군사 3천을 보내어 포위를 풀어 주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을 우리의 역사 상식대로 지금의 한반도에 적용해보자.
  여러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지금의 청천강을 살수라고 하는데, 중국세력들이 고구려의 평양을 공격할 때 그들은 요수를 건너고, 다음 압록강을 건너며, 그 다음 살수를 건너고는, 또 패수를 건너야 평양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한반도의 청천강은 대동강보다도 더 북쪽에 위치해 있고, 우리가 고구려의 도읍이라고 생각하는 북한 평양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 이때 신라의 도읍은 금성이었고, 백제의 도읍은 웅진이었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신라는 어떻게 평양의 북쪽에 위치했을 살수에서 전투를 할 수 있었을까?
  신라가 평양을 점령하고 나서 그 북쪽의 청천강까지 간 것인가?
  아니면 평양은 백제가 점령하고 있는 것인가?
  이 기록을 한반도에 적용해서는 합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하고, 우리의 역사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자.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 벌판에서 전투를 하여 신라가 불리하여 주변의 견아성으로 들어가자 고구려 군이 견아성을 포위한다.
  신라군의 입장에서는 잘못하면 몰살할 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백제군이 와서 그 포위를 풀어 주었다?
  그렇다면 이때 최소한 평양부근을 백제가 차지하고 있어야 신라군을 도와줄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서울부근 이남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 백제가 살수로 비정되는 청천강까지 가려면 평양을 지나야 하는데, 고구려가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백제군이 어떻게 평양지역을 통과하여 신라군이 포위되어 있는 살수 부근의 견아성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살수는 지금 북한의 청천강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 중국 사서들에는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와 고구려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에서 싸웠던 것이고, 신라가 패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자 고구려가 포위했고, 다급한 사정을 전해들은 백제의 동성왕이 지금의 금산령장성 부근에 있었던 백제의 3천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포위망을 풀어주어 견아성에 갇혀있던 신라군은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위 조문은 아무 무리가 없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은 정확했던 것이다.
  신라, 백제, 고구려는 지금 북한의 청천강 부근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중국  북경 동북쪽 고북구 부근에서 싸운 것이므로 이 시점의 삼국의 위치는 바로 그 부근인 것이고 살수는 고북구를 지나는 조하(潮河)인 것이다. 

 

[강물이 심하게 굴곡져 흐르며 북경 동북쪽 고북구를 지나는 지금의 조하(潮河) . 옛 사람들은 이를 스님의 머리형상으로 보기도 하였고, 거북이 머리모양으로 보기도 하였다] 

  

  위 그림을 보면 강물이 매우 구불구불 흘러 마치 스님들의 머리모양처럼 보였기 때문에 보살살(薩)을 붙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후일 고려때에는 이 부근이 귀주(龜州)로 바뀌게 되는데, 고려때 사람들은 그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는 형상이 마치 거북이 머리처럼 생각되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