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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열전 - 고구려의 왕위를 차지하라 안원왕의 두 왕비

윤여동 2008. 8. 13. 08:34

내 아들로 왕위를 이어야 한다 - 안원왕의 두 왕비

 

 

  고구려 23대 안원왕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첫 왕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고, 둘째 왕비는 후일 안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양원왕 (삼국사기에는 이름을 평성이라 했다)을 낳았고, 셋째 왕비도 왕자를  낳았다.

  안원왕이 말년에 이르러 중병이 들어 누워있게 되자 왕이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고 판단한 둘째왕비와 셋째왕비는 서로 자기의 아들을 안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암투를 벌였다.
  안원왕이 병이 들어 눕게 되었는데, 이때 안원왕의 아들들이 매우 어렸다.(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닐 것이다)
  이때는 왕자들이 어려서 아직 태자 책봉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두 왕비는 서로 자기의 아들로 태자 책봉을 하려고 야단이었다.
  대신들도 반으로 갈려 둘째 왕비를 지지하는 파와 셋째왕비를 지지하는 파로 갈라지게 되어, 서로 의견이 팽팽하여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세력은 아들이 없으나 왕실의 가장 웃어른인 첫 왕비에게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태자를 지명해 달라고 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권한을 위임받은 첫 왕비도 입장이 난처했다.
  왜냐하면 두 파가 목숨을 걸고 자기들이 지지하는 왕자를 태자로 만들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첫째 왕비의 생일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실에서는 첫 왕비의 생일잔치를 해야하느냐, 하지 말이야 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란이 일게 되었다.

  잔치를 해야한다는 측에서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첫 왕비의 생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했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대왕이 중병에 걸려 있는 이때 어떻게 생일 잔치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리하여 결국 국상의 중재하에 생일잔치를 열되 규모를 줄여 조촐하게 열기로 하였다.

생일날이 되자 둘째 왕비 측에서는 첫째 왕비에게 아주 값비싼 보물을 선물했다.
  첫째 왕비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생일잔치가 축소되어 약간은 서운하던 차에 둘째 왕비가 귀한 선물을 주자 별 생각 없이 받고 말았다.
  그리고는 첫째 왕비는 얼마 후에 장자가 태자가 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여 태자로 지명했다.
  그러자 셋째왕비 측에서 뇌물을 받고 태자를 지명하였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서기 544년 12월에 이르러 두 무리 즉 둘째 왕비를 지지하는 파와 셋째왕비를 지지하는 파는 드디어 무력으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게 되었는데, 결국 이 전투에서 둘째 왕비를 지지하는 파가 승리하게 된다.
  안원왕이 중병에서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다음해 3월에 죽게 되자 안원왕의 장자인 평성이 왕위에올랐는데 이가 곧 고구려 24대 양원왕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이때 전투에서 패한 셋째 왕비의 세력인 "세의 무리 2천 여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니 이때 이들은 멸문지화를 당했을 것이다.
  쓸데없는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는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