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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해(解)씨와 고(高)씨 두 성씨로 이어진 고구려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8. 25. 08:20

윤여동설 - 해(解)씨와 고(高)씨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진 고구려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 - 최초공개

 

 

 시조 추모왕(鄒牟王) : 해추모(解鄒牟), 해주몽(解朱蒙), 해중해(解衆解)
※ 호태왕 비문에 추모왕이라 기록되어 있어, 추모란 이름이 아니라 시호일 가능성도 있고,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따라서 고(高)씨로서 성씨를 삼았다고 했으나, 실제 초기 고구려 왕실의 성씨는 해모수의 성씨인 "해(解)"씨였고, 고(高)씨로 왕실의 성씨가 바뀐 것은 6대 태조대왕 때부터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주몽의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기록한 것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추모왕을 혼동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을 추몽(鄒蒙)이라고도 기록하고 있고, 단군(壇君)의 아들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 조에는 주몽의 본성은 해(解)씨였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2대 유리왕(琉璃王) : 해유리(解類利), 해유류(解孺留)
※ 삼국사기에는 유리왕의 시호를 유리명왕(琉璃明王)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에는 시호를 유리왕(瑠璃王), 이름을 누리(累利)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성씨가 해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리왕은 주몽의 외아들이므로 그 아버지 주몽 역시 해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태왕비문에는 유류왕(儒留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몽왕과 졸본부여 둘째공주 사이에서 낳은 딸이 고씨에게 시집가 낳은 아들의 후손이 재사인데, 유리왕이 말년에 막내아들 여진이 강물에 빠져 죽자 배다른 여동생의 후손인 재사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태조대왕은 바로 그 재사의 아들이었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 해무휼(解無恤)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 한다고도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성씨가 해씨이고 이름이 미류(味留)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비문에는 대주류왕(大朱留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4대 민중왕(閔中王) : 해색주(解色朱)
※ 삼국사기에는 이름이 해색주이고 대무신왕의 동생이라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도 성씨가 해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5대 모본왕(慕本王) : 해우(解憂), 해애루(解愛婁)
※ 이때까지 해씨를 성씨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 주몽의 아들로 이어진 직계혈손은 이 모본왕까지로서 연노부에 속했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는 왕실의 혈통이 주몽의 딸이 고씨에게 시집가서 낳은 후손 즉 외척이며 고씨(高氏)였던 계루부로 바뀌게 된다. 
  삼국유사에는 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으로서 모본왕은 민중왕의 형인 대무신왕의 아들로서 민중왕의 조카이다. 이름은 애류(愛留) 혹은 애우(愛優)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 고궁(高宮)
※ 삼국사기에는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부른다고 했고, 유리왕의 양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아명이 어수(於漱)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사실 재사는 유리왕의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였다[필자주 :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는 유리왕의 배다른 여동생이 고씨에게 시집가 낳은 아들의 후손으로서 유리왕 말기에 유리왕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추모왕(주몽왕)의 친손인 해씨와 외손인 고씨로 왕위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유리왕 말년에 유리왕의 귀염둥이 막내아들 여진이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유리왕은 죽은 여진 또래의 재사를 양자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재사의 원래 성씨는 해씨가 아니라는 말이 되는데,  태조대왕 이후 고구려의 왕들의 성씨가 고(高)씨로 나타나고,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에는 본래 다섯 부족이 있는데,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원래 연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가 두 성씨로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태조대왕이 계루부[원래의 구려지역으로 추정된다] 출신으로서 이때 역성혁명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고구려의 국호가 옛 지명인 구려에 숭고하다는 의미 또는 성씨인 고(高)자를 붙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고, 따라서 고구려라는 국호는 주몽왕 때[필자주 : 이때는 국호가 부여(졸본부여)였을 가능성이 많다]부터가 아니라 6대 태조대왕 때부터 정해지고 불리우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때 고구려에는 실제 왕실의 혈통이 바뀌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으나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유리왕의 양자신분이었고, 고씨에게 시집간 추모왕의 딸(주몽과 졸본부여 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후손으로서 추모왕의 외손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역성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태조대왕으로부터 그 이후 고구려의 왕들도 추모왕(주몽왕)을 시조로 받들수 있었다.[필자주 : 친손이든 외손이든 성씨만 다를 뿐 모두 주몽왕(추모왕)의 혈손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내부적으로는 친손인 해씨에서 외손인 고씨로 역성혁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6대왕인 궁에게 나라를 건국한 왕에게나 붙일 수 있는 "태조대왕"이라는 시호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태조대왕은 해씨고구려를 이은 고씨고구려의 건국시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은 태조대왕에 대한 기록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고구려가 실제 태조대왕 때에 이르러서야 나라의 기틀을 갖추었기 때문에 6대왕을 태조대왕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당나라에서는 오히려 고구려의 역사를 북부여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인식했다.

  고구려 900년 존속설이 바로 그것으로서 고구려가 900년 간 존속했다면, 기원전 232년에 건국되어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기원전 232년은 북부여의 해모수가 기원전 239년에 북부여를 세우고 7년 간 주변국을 통합한 후 북부여 천제의 자리에 오른 해이다.

  중국 사람들은 북부여와 고구려를 동일한 나라로 인식했고, 기원전 232년을 고구려의 건국시기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7대 차대왕(次大王) : 고수성(高遂成)
※ 삼국유사에는 이름이 대(隊)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수성(遂成)의 오기로 보인다.
 
 8대 신대왕(新大王) : 고백고(高伯固) 또는 고백구(高伯句)
※ 삼국유사에는 신대왕이 태조대왕과 차대왕 두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오기이다.
  태조대왕은 119세로 늙어 죽었고, 차대왕은 폭정을 견디다 못한 명림답부가 죽이고, 신대왕을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 고남무(高男武) 혹은 고이이모(高伊夷謨)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국양왕(國襄王)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0대 산상왕(山上王) : 고연우(高延優)

 

11대 동천왕(東川王) : 고우위거(高憂位居)
※ 삼국사기에는 어릴 때의 이름은 교체(郊 )이고,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산상왕을 위궁(位宮)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동천왕이 태조대왕과 닮았다고 하여 위궁이라고도 불렀다.

 

12대 중천왕(中川王) : 고연불(高然弗)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중양왕(中壤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13대 서천왕(西川王) : 고약로(高藥盧) 또는 고약우(高若友)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서양왕(西壤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14대 봉상왕(烽上王) : 고상부(高相夫) 또는 고삽시루(高歃矢婁)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15대 미천왕(美川王) : 고을불(高乙弗) 또는 고우불(高憂弗)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 고사유(高斯由) 또는 고쇠(高釗)
※ 수서 고구려전에는 소열제(昭列帝)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시호를 국원왕(國原王)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342년 8월에 안시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곧 환도성이라 기록되어 있어, 환도성과 안시성이 동일한 곳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북경부근이 요동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므로 환도성이나 안시성은 그 가까이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북경 북쪽 회유 발해진 부근으로 비정된다.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 고구부(高丘夫)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3대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이라고도 불렀는데, 왜 수백 년이 지났고, 성씨도 다른 소수림왕을 소해주류왕이라고도 불렀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았다.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 : 고이련(高伊連) 또는 고어지지(高於只支)
※ 삼국유사에는 시호를 국양왕이라 기록되어 있고 이름이 이속(伊速)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고담덕(高談德)
※ 호태왕 비문에는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했고, 양서와 북사에는 광개토대왕의 이름을 고안(高安)으로 기록하고 있다.

 

20대 장수왕(長壽王) : 고거련(高巨連) 또는 고거련(高巨璉)
※ 중국 사서들은 고연으로 기록하고 있고, 장수왕이 죽자 위나라에서 "강(康)"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을 신련(臣連)이라 기록하고 있다.

 

21대 문자왕(文咨王) : 고라운(高羅雲)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문자명왕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이름이 명리호(明理好) 또는 개운( 雲) 또는 고운(高雲)이라 기록하고 있다.

 

22대 안장왕(安臧王) : 고흥안(高興安)

 

23대 안원왕(安原王) : 고보연(高寶延)
※ 삼국유사에는 이름이 보영(寶迎)이라 기록하고 있다.

 

24대 양원왕(陽原王) : 고평성(高平成)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25대 평원왕(平原王) : 고양성(高陽成)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양성(陽城)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 사서들에는 평원왕의 이름을 탕(湯)으로 기록하고 있다.

 

26대 영양왕(嬰陽王) : 고원(高元) 또는 고대원(高大元)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27대 영류왕(榮留王) : 고건무(高建武) 또는 고성(高成)

 

28대 보장왕(寶臧王) : 고장(高臧) 또는 고보장(高寶臧)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고주몽성제, 유리명제, 태조무열제, 광개토경호태황, 장수홍제호태열제, 문자호태열제. 평강상호태열제, 영양무원호태열제 등 고구려왕들의 시호가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어 이때 고구려가 천제를 칭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수서에도 고국원왕을 소열제(昭列帝)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