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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 (2)

윤여동 2008. 9. 10. 00:33

윤여동설 -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2)

 

 

 

  유리왕이 서기 18년 10월에 죽자 태자인 15세의 무휼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곧 전쟁의 신 대무신왕이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다음해인 서기 19년 정월에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해 오는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때 백제에는 가뭄이 심해 패수와 대수 사이에 사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고, 또 그 다음해인 서기 20년 3월에는 죽은 아버지 유리왕의 사당을 세운다.

 

☆ 삼국사기에는 이때 동명왕묘를 세웠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9월에는 골구천에서 사냥을 하다가 신마를 잡아 거루라고 이름 붙였고, 10월에는 동부여왕 대소가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가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는데, 대소왕은 이를 동부여가 고구려를 병합할 징조라고 여기고 보냈던 것인데, 사실은 남쪽의 고구려가 북쪽의 동부여를 병합할 징조였던 것이다.
  그러자 대무신왕은 그 다음해인 서기 21년 12월에 이르러 동부여 정벌에 나서는데, 행군 중에 대소왕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북명 사람 괴유를 얻고 동부여의 남쪽 국경에 도착한다.
  동부여의 남쪽 국경에는 군데군데 크고 작은 늪이 많이 있었는데, 동부여왕 대소가 이끄는 동부여군은 그를 잘 모르고 급히 말을 달려 고구려군을 공격하려다가 늪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데, 이때를 틈타 고구려군이 일제히 공격하니 동부여의 1만 군사들이 쓰러지고 엎어져 대오가 엉망이 되었고, 대소왕도 늪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있을 때 괴유가 바로 나아가 동부여 대소왕의 목을 베었다.
  그렇지만 동부여군은 굴하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군을 몇 겹으로 포위하게 되니 고구려군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는데, 마침 짙은 안개가 7일 동안이나 끼어 사람과 물건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대무신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놓고 야음을 틈타 지름길로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철군한다.
  이 전쟁에서는 고구려군이 동부여 대소왕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패전한 꼴이 되고 말았는데, 이때 대무신왕은 모든 책임을 왕 자신에게 돌리고, 전투 중에 죽은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다친 사람들을 찾아 병문안을 하니 장수들이나 백성들은 왕의 성덕에 감동하여 모두 나라에 몸 바치기로 다짐하게 된다.
  대무신왕은 리더로서의 자질을 아주 잘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왕이 죽은 동부여는 자중지란으로 분열하게 되는데, 4월에 이르러 대소왕의 막내동생이 고구려에 가까운 갈사수가로 와서 갈사국을 세움으로써 고구려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오고, 또한 7월에는 동부여왕의 친척 동생이 백성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해 오자 대무신왕은 그를 왕으로 삼아 연나부에 살게 하고 낙씨의 성을 하사한다.
  그런데 10월에 이르러 동부여 대소왕의 목을 벤 공을 세운 괴유가 죽자 그의 공을 인정하여 북명산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내고 철따라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서기 25년 봄 2월에 이르러서는 을두지를 우보에 임명하고는 그에게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기게 되고, 서기 26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왕이 친히 개마국 정벌에 나서 개마국왕을 죽이고 승리한 후 그 나라의 백성을 위무하고 군사들에게 포로를 잡지 못하게 하고 재물을 약탈하지 못하게 한 후 그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자, 얼마 후 개마국과 인접해 있던 구다국은 스스로 나라를 바치고 투항해 오게 되어 고구려의 강역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그렇게 고구려의 강역이 점점 커지고 있을 때인 서기 28년 가을 7월에 이르러 후한의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침공해 왔고, 대무신왕은 성문을 닫고 지구전을 펼쳤는데,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후한군은 여전히 성을 포위하고 있었으니 이대로 가면 머지 않아 성이 함락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 을두지가 말하기를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지대에 있어 샘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란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연못 속의 잉어를 잡아 수초로 포장하고 약간의 술과 함께 한나라 진영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자 그를 받아들였다.
  한나라 진영에서는 고구려에서 수초에 싼 잉어를 보내오자 "성내에 물이 있으므로 가까운 시일 내에 함락시키기는 불가하다" 생각하고는 철수해 갔고, 대무신왕은 다시 서기 30년에 낙랑동부도위를 쳐서 병합시킴으로써 이제 남은 낙랑국만 병합시키면 장성 북쪽의 옛 고조선 땅이 전부 고구려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상황이 된다.
  그리하여 대무신왕은 최리의 낙랑국을 병합시킬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이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닯은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대무신왕의 혼인시기는 기록에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서기 18년 10월 왕위에 오른 후 모본호족의 딸을 첫 왕비로 맞아들였던 듯 하고, 22년경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였을 것인데, 대무신왕은 이 갈사왕의 손녀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을 낳아 이름을 호동이라 했고, 얼굴이 아름다워 대무신왕이 매우 귀여워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첫 왕비인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10여년 후에야 아들인 해우(해애루라고도 한다)를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호동이 태어나 자랄 때까지도 맏왕비의 처지로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으니 마음 고생은 심했을 것이지만 후일 이 맏왕비는 자신의 아들 해우로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 호동을 모함하게 된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호동왕자의 나이 14세쯤이 된 서기 36년 4월 봄날에 호동왕자가 옥저에 놀러갔다가 낙랑왕 최리를 만나게 되었고, 최리는 자기의 딸 낙랑공주를 호동왕자에게 주어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한다.
  낙랑왕 최리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사돈관계를 맺어 그 후원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지만 이때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낙랑국을 병합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글을 보내 적군이 침공하면 저절로 소리를 내어 위급을 알려주는 북과 나팔을 부수라 하게 되고,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이 먼 낙랑공주는 나라를 지켜주는 보배인 북과 나팔을 부수고는 그 사실을 고구려 호동왕자에게 알려 준다.
  이때를 틈타 고구려군은 침공해 낙랑국의 왕성 아래까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고,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른 후에야 자기의 딸이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순 것을 알게 된 낙랑왕 최리는 자기의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함으로써 최리의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이르러 멸망하고 그 땅은 고구려의 소유가 된다.
  그런데 호동왕자 역시 자신의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할 욕심으로 가득 찬 첫 왕비가 호동왕자가 왕비인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참소하게 되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칼을 입에 물고 죽어야 했다.
  그리하여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7년 후인 서기 44년 9월에 이르러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살수 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후한낙랑군)을 부활시키게 되고, 10월에 이르러서는 대무신왕이 41세의 나이로 죽게된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그를 대수촌 벌판에 장사지내고, 무력을 귀신처럼 사용하여 강역을 크게 넓힌 왕이라 하여 시호를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하였는데 혹은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했다.
  그 아들 해우(해애루)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대무신왕의 동생인 해색주가 고구려 제 4대 왕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