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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윤여동 2008. 9. 12. 05:19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그 이후 - 민중왕과 모본왕

 

 

  대무신왕이 서기 44년 10월에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자 고구려에서는 다음 왕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대신들의 고민이 깊어지게 된다. 
  원칙적으로는 대무신왕의 태자로 봉해져 있는 해우(해애루)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겠으나 나이가 10여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후한의 광무제에게 살수이남 땅을 다시 빼앗긴 비상시국이었기 때문에 호족들은 결국 12-13세 짜리 어린 왕으로서는 현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죽은 대무신왕의 동생인 해색주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바로 4대 민중왕이다.
  그런데 민중왕은 특별한 업적은 남기지 못한 채 재위 5년째인 서기 48년에 젊은 나이로 죽고 마는데, 죽을 때의 나이는 대무신왕과 비슷한 40여세 정도였을 것이다.
  이를 보면 대무신왕이나 그 동생 민중왕 모두 명이 짧아 죽었다고 보여질 뿐 외부적인 요인으로 죽은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민중왕이 죽고 난 이때에 이르러서야 대무신왕의 남은 유일한 아들이었으며 태자로 봉해졌던 해우가 고구려의 5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바로 모본왕이다.   
 

  고구려 5대 모본왕의 성씨는 해씨요, 이름은 우(또는 애루라고도 한다)였다.
  아버지는 3대 대무신왕이고, 어머니는 모본호족의 딸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려 그 숙부인 민중왕 해색주가 왕위에 올랐다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얼마 후 정신이상 증세가 있어 신하들이 그를 제거하고 태조대왕 궁을 추대함으로써 주몽의 혈손으로 이어지던 해씨고구려는 종말을 고하고, 재사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고씨고구려가 시작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조를 세밀히 검토해 그 숨겨진 역사를 밝혀보자.

  

원년 무신(A.D.48) 모본왕(慕本王)의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라고도 한다]이니 대무신왕의 원자이다. 민중왕이 죽어 그 뒤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의 사람됨이 횡포하고 어질지 못하며 국사를 살피지 않으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가을8월 홍수가 크게 나서 20여 개소의 산이 무너졌다.
겨울10월 왕의 아들 익(翊)을 태자로 삼았다.

 

  모본왕의 어머니는 대무신왕의 맏왕비이다.
  역사 기록에는 맏왕비의 출신지나 성씨가 명확하게 기록되고 있지 않으나, 호동왕자를 참소하여 죽게 만든 대무신왕의 맏왕비는 모본호족의 딸일 가능성이 많다. 
  이는 모본왕이 시종인 모본출신의 두로(杜魯)에게 시해당하여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고, 그가 죽자 모본벌판(慕本原)에 장사지내기 때문에 모본왕이 모본지역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필자주 : 모본(慕本)은 근본을 그리워하다는 의미로서, 모본왕은 해씨의 뿌리, 고향, 선조 등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왕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해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해 10월에 자기 아들인 익(翊)을 태자로 봉하고 있다.
  서기 32년경에 해우가 출생하였다면 그가 왕위에 오른 서기 48년에 모본왕 해우의 나이는 17세 정도가 된다.
  해우가 15세에 혼인을 하여 바로 첫 아들을 낳았다고 해도 서기 48년에 그 아들은 3세를 넘지 못한다. 모본왕은 이때 세 살도 안된 어린아이를 태자로 봉했다는 말이 되는데, 모본왕 해우는 왜 이렇게 서둘러 자기아들 익을 태자로 봉했을까?
  이는 자기가 어렸을 때 호동왕자 때문에 태자로 봉해지지 못할 뻔했던 기억이 있어서 태자 책봉 문제로 인한 호족들간의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당시까지 모본왕 해우는 현명한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2년 기유(A.D.49) 봄에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습격하였더니 요동태수 채용이 은혜와 신의로서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을 하였다.
3월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4월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8월 관리들로 하여금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토록 하였다.

 

  왕실을 가다듬은 모본왕은 드디어 원정에 나서게 된다.
  이 기록 속의 북평(중국 사서에는 우북평이라 기록되어 있다), 어양, 상곡, 태원(太原)의 위치에 대하여 주장들이 분분한데 지금 중국 산서성에는 성도인 태원(太原)이 있고 옛날 당나라 이전부터 그 지명을 사용했고, 당 태종의 아버지가 바로 이 태원유수였다.
  따라서 기록 속의 태원은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해 진다.
  그렇다면 모본왕 때 고구려가 매우 강성하여 지금의 북경 서쪽 산서성 분하(汾河)상류까지 뻗어 내려갔었다는 말이 된다.
  대명일통지 순천부 탁주(涿州) 조를 보면,
  "순천부의 서남쪽 140리에 있다. 춘추전국 때와 연나라에서는 모두 탁읍이라 했고, 진나라의 상곡군 땅이다. 한나라에서 탁군을 설치했고, 조위 때는 범양군으로 고쳤다(在府西南 一百 四十里 春秋戰國皆燕之涿邑 秦爲上谷郡地 漢置涿郡 曹魏改爲范陽郡)" 라는 기록도 보이는데, 탁주시는 북경 서남쪽에 위치하고 지금도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곳이 진나라 때의 상곡군이라 하고 있고, 태원(太原)은 지금 산서성의 성도로서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어양군과 우북평군에 대하여, 후한서에는 어양군은 낙양 동북2000리에, 우북평군은 낙양동북 2300리애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고구려는 하북성 석가장 부근까지를 까지를 습격했고,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까지 진출하여 그곳을 습격했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고구려가 그 부근 가까이에 위치하지 않고는 이러한 기습 작전을 펼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때 고구려는 지금의 요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요하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북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 진서(晉書)에는 북평군의 통현에 서무(徐無)·토은(土垠)·준미(俊靡)·무종無終)이 있고, 상곡군은 진나라 때 설치했는데, 계곡의 맨 위에 위치하여 상곡이라 했다고 하며, 통현으로 저양(沮陽)·거용(居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모본왕은 당시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 즉 북경 서북쪽 연경(延慶) 영녕현 부근에서 군사들을 출발시켜 지금의 태행산맥을 넘어 지금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 부근까지 진출했고, 또 다른 군사들은 지금의 산서성 태원까지도 진출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 고구려 세력에게 포위당한 형국이 되어버린 요동태수가 화친을 제의해 왔고, 모본왕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군사들을 북쪽으로 철수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 후한서 고구려 전에는, "건무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채용이 은의와 신의로써 대하니 모두 요새 밖으로 철수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4년 신해(A.D.51) 왕이 날이 갈수록 더욱 포악하여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이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아 죽였다.

 

  이는 정신이상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므로 이때 모본왕이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6년 계축(A.D.53) 겨울11월 두로(杜魯)가 왕을 죽었다.
  두로는 원래 모본(慕本)사람인데 왕의 시종으로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우니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하여 우는가? 옛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죽이려 하면 원수라고 하였다. 이제 임금이 포학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가 왕을 죽여라" 하였다.
  두로가 칼을 품고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이 그에게 앉으라고 하였다.
  이때에 두로가 칼을 빼어 왕을 죽였다.
  모본벌판(慕本原)에 장사하고 시호를 모본왕(慕本王)이라 하였다.

 

  모본왕은 즉위 초에는 정치를 잘한 것으로 생각되나, 이때쯤은 아마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왕의 시종으로 있던 두로 역시 정신병자인 왕이 언제 마음이 변해 자기를 죽일지 예측할 수 없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모본왕의 폭정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두로에게 왕을 죽여버리라고 은근히 부추기게 되고, 결국 모본왕은 시종인 두로에게 시해당했고, 모본벌판에 묻히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의 왕통은 후일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한 사람들에 의해 모본왕의 아들 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혈통이 다른 유리왕의 양자였던 재사의 아들 궁(宮)으로 이어지게 되어 역성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 재사가 유리왕의 양자라는 것은 혈통이 다르다는 말이다.   재사는 유리왕 말기 유리왕의 막내아들인 여진이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자 유리왕이 죽은 막내아들 여진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재사를 양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록에 재사가 유리왕의 아들이라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므로 삼국사기에 주몽이 모둔곡에서 재사를 만났다는 것은 오기라 할 수 있다.

 

  이 때 고구려의 왕통이 해모수와 해주몽(주몽은 해씨이지 고씨가 아니다)의 후손인 해씨에서 다른 성씨로 넘어갔다는 것은 은연 중에 역성혁명이 일어났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해모수의 혈통을 이어받은 고구려의 해씨(解氏) 왕통은 주몽으로부터 모본왕까지로서 끊어지게 되고, 6대 태조대왕 궁으로부터 28대 보장왕까지 고구려의 왕위는 모두 이 재사의 후손으로서 이어지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고씨(高氏) 성을 사용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볼 때,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시조인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바로 해씨 성을 버리고 고씨로 성을 삼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세 역성 혁명이 이루어지던 시점 즉 태조대왕 궁으로부터 고구려 왕실의 성씨가 해씨에서 고씨로 성씨가 바뀌었던 것을 잘못 이해하고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주몽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해(解)씨였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28대 보장왕까지는 고(高)씨로서 고구려 왕실은 한 성씨로 왕위계승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두 성씨로 이어졌다는 말이 되는데,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대무신왕의 장자였던 호동왕자가 모함을 받아 죽지 않고, 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그가 왕위에 올랐다면 고구려의 해씨 왕통이 모본왕으로 끝나지 않고 쭉 이어져 갔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대무신왕이 그 맏왕비의 참소 만을 믿고 자신의 맏아들인 호동을 죽게 만들었으니 자업자득일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