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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왕들의 시호와 의미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10. 22. 07:59

윤여동설 - 고구려왕들의 시호와 의미 - 최초공개

 

 

    

 시조 추모왕(鄒牟王)

  "추(鄒)"는 산동반도 부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추 나라라고 하는 국가를 나타내는 추자이고, "모(牟)"는 탐하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글자인데, 주몽은 북부여의 후예로서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된 사람이다.
  남의 나라를 빼앗아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가 시호에 담겨진 것이 아닌가 싶다. 

  사고전서 경부 사서석지3 속권 하에는 "맹자는 추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때 주나라였고, 주나라에 동이의 풍속이 섞여있으니 맹자가 이(夷)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의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의 시호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졸본부여의 건국시조가 동명왕(東明王)이고, 주몽은 동명왕이 멸망시킨 나라인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의 고손자로서 동명왕과 주몽은 혈통이 엄연히 다르고 원수지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후예로서 동부여에서 살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자 도망쳐 졸본부여로 가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2대왕의 둘째 사위가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이어받아(빼앗아?) 졸본부여의 3대 왕위에 올랐다가 후일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어 북부여의 맥을 이은 나라인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이다. 따라서 주몽의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찬자들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과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혼동했던 듯 하다. 그의 능은 졸본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대 유리왕(琉璃王)


  맑고 밝은 정치를 펼친 현명한 왕이었다는 의미이다.

 

※ 삼국사기에는 유리명왕(琉璃明王) 또는 유리명왕(瑠璃明王)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유리왕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곳에서 죽었다. 지금의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므로 유리왕의 능은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무력을 신과 같이 휘두른 위대한 왕이라는 의미이다.

 

※ 대무신왕은 왕위에 올라 동부여를 침공하여 대소왕을 죽임으로써 동부여를 혼란에 빠뜨려 동부여의 왕조가 해씨에서 다른 성씨로 바뀌는 결과를 낳았던 듯 하고, 서기 30년에 한나라가 설치했던 낙랑동부도위를 빼앗아 고구려에 편입시켰고, 서기 37년에는 옛 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칭왕을 하던 최리의 낙랑국 마저 고구려에 편입시켜버림으로서 옛 고조선의 왕검성을 차지했다. 그러다가 서기 44년에 후한 광무제에게 살수이남 땅을 다시 빼앗기게 되었고, 후한은 그곳에 다시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이 후한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으로 비정된다. 

     

 

 4대 민중왕(閔中王)


  민중벌판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민중왕은 민중벌판에 있는 석굴에 장사지냈다고 하여 시호를 민중왕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죽은 왕의 시호를 왕릉을 조성한 지명을 따서 정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어찌되었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많은 고구려왕들의 시호를 그렇게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민중왕의 석굴능은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대 모본왕(慕本王)


  모본 벌판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삼국사기에는 모본 벌판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모본왕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졸본이나 국내위나암(국내성) 부근에 그의 능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고씨 고구려의 시조왕이라는 의미로서 나라를 개국한 왕에게만 태조라는 시호를 붙일 수 있다.

 

※ 태조(太祖) 라는 시호는 고구려의 태조대왕 이후 나라를 건국한 왕에게만 붙이는 시호가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 조선 태조 이성계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구려는 6대왕을 "태조" 라고 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그 이유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으나, 이는 태조대왕이 유리왕의 양자였던 재사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추모왕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였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는 고씨이다. 따라서 태조대왕은 고씨고구려의 건국시조나 다름없기 때문에 태조대왕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7대 차대왕(次大王)


  고씨 고구려의 두 번째 왕이라는 의미이다.

※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동복동생이라 하는데, 사실인지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태조대왕은 서기 47년생이고, 차대왕은 71년생으로서 무려 24년의 나이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아버지 재사가 늦둥이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기록을 믿을 수밖에 없으나, 혹시 태조대왕의 동복동생의 아들로서 태조대왕의 조카일 가능성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차대왕이 그 동복형인 태조대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7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왕위를 찬탈했던 것으로 보인다.

 

 
 8대 신대왕(新大王)


  정치를 새롭게 펼친 왕이라는 의미이다.

※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반정에 성공한 후 좌보 어지류 등이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후 백고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태조대왕은 서기 47년생, 그 동복동생이라는 차대왕은 서기 71년생,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이라는 신대왕은 서기 89년생이다. 따라서 태조대왕과 신대왕과의 출생년도가 무려 42년이나 차이가 나고 있는데, 이러한 연령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이 맞다면 그 아버지인 재사가 늦은 나이에 젊은 여인을 얻어 신대왕을 낳았다고 해야 하므로 이들은 이복형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이 틀렸다고 본다면 신대왕 백고는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의 손자로서 태조대왕의 손자 뻘로 볼 수도 있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고국천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삼국사기에는 왕이 죽자 고국천 벌판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고국천왕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시호를 국양왕(國襄王)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왕릉을 조성한 지명을 따서 시호를 정했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 듯 싶다. 아마 고구려 사람들이 왕릉을 쉽게 구별하기 위하여 별도로 그 위치를 기록해 놓은 것을 보고 그 왕의 시호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고국천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을 말하는 듯 하다.

  

      

10대 산상왕(山上王)


  환도산 능선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산상왕은 국내위나암으로부터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곳에서 죽었으므로 산상왕의 능은 환도성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인데, 환도성은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 산상릉(山上陵은 山上稜의 오기인듯)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산상왕이라 불렀다고 했으니, 산상왕의 능은 벌판이 아닌 산의 능선에 장사지냈을 것이다.  다만 후일 연나라의 모용황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능을 파 그 유골을 가져갔다가 돌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은 환도성 부근에 조성되어 있던 산상왕의 유골을 가져갔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1대 동천왕(東川王)


  동천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동천왕은 환도성을 위나라의 관구검에게 함락 당해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겼다. 따라서 동천왕의 능은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시원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여 왕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근신들 중에는 왕을 따라 죽으려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새로운 왕(중천왕)이 이것은 예절이 아니라 하여 금하였으나 장례식날 왕의 무덤에 와서 자살한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풀을 베어다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덮었으므로 그곳을 시원이라 하였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천왕이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고,  또 시원이라는 곳이 동천 부근에 위치했던 듯 하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12대 중천왕(中川王)

  중천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중양왕(中壤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13대 서천왕(西川王)


  서천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서양왕(西壤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14대 봉상왕(烽上王)


  봉산 벌판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능 부근에 꿩이 많고 칡이 많다는 의미일까?

 

15대 미천왕(美川王)


  미천 벌판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미천왕은 어렸을 때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망쳐 오랫동안 신분을 숨기고 남의 머슴살이로부터 소금장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며 살아야 했던 왕인데,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이 탁월해 고구려의 강역을 매우 많이 넓힌 왕이다. 후한낙랑군 땅과 대방군 땅을 고구려에 편입시켰고, 이때 요서까지도 진출했던 듯 하다.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호양이라는 의미가 땅을 매우 좋아한다는 의미이니 미천왕의 생전의 업적과 상통한다 하겠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고국 벌판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고국원왕 때 고구려는 다시 환도성으로 임시로 도읍을 옮겼다가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다시 평양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371년에 백제 근초고왕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게 되고, 평양성 방어를 위해 전투를 지휘하던 고국원왕이 백제군이 쏜 화살을 맞고 10월 23일에 죽고 만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패전함으로써 이때 요서 진평현 지역을 백제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이고, 고국원왕은 죽은 후 평양성 부근에 묻혔을 것이다.  따라서 고국원이라는 곳은 도읍인 평양 동쪽 황성 부근에 위치했던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고국원, 고국양, 고국천 등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을 말하는 듯도 하다.      
  그리고 수서 고구려전에는 소열제(昭列帝)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시호를 국원왕(國原王)이라 기록하고 있다.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소수림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소수림왕 때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 동쪽 황성이었다. 따라서 그의 능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3대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이라고도 불렀는데, 왜 수백 년이 지났고, 성씨도 다른 소수림왕을 소해주류왕이라고도 불렀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았다. 혹시 소수림왕의 모습이 대무신왕의 모습을 많이 닮았던 것일까?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


  고국양에 묻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의 동생으로서 이 왕 때 고구려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공인했던 듯 하다.
왜냐하면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때는 소수림왕 때인 372년이었고,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어 순도와 아도를 머물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고국양왕 9년인 392년 3월에 이르러 "교서를 내려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받게 하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서야 일반백성들도 불교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시호를 국양왕이라 기록되어 있다.

 

19대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나라의 강역을 넓게 개척한 왕이라는 의미이다.

 

※ 호태왕 비문에는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했는데, 역시 나라의 강역을 넓게 개척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기한 태왕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광개토대왕이 지금의 요하 동쪽 땅 만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이때 광개토대왕은 대흥안령을 넘어 최소한 바이칼까지는 진출했고, 몽골과 내몽골을 거의 차지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 때까지 고구려의 도읍은 황성이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능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조성되었어야 마땅한데, 호태왕비가 집안에 세워져 있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비석을 옮긴 것일까?  

 

 

20대 장수왕(長壽王)


  오래 살았던 왕이라는 의미이다.

 

※ 장수왕은 98세까지 살았다고 하고, 장수왕은 평양 동쪽 황성에서 다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곳에서 죽었으므로 그의 능은 평양성이었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후의 왕릉들은 평양성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하북성 승덕시에서 서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인 흥륭현 응수영자광 부근에 수왕분(壽王墳)이라는 곳이 있는데, 혹시 이곳이 고구려 장수왕의 능을 조성했던 곳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1대 문자왕(文咨王)


  문(文)을 중시했던 왕 또는 문을 중시하고 밝은 정치를 펼친 왕이라는 의미이다.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문자명왕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가 밝은 정치를 했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22대 안장왕(安臧王)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왕이라는 의미이다. 

 

※ 안장왕은 태자 시절의 첫사랑인 백제 개백현의 한씨(이름이 한주라고도 한다) 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태자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을 하지 않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혼인을 하지 않고 오직 한씨 미녀를 데려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결국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듯 하다. 그리하여 그의 시호를 안장왕이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23대 안원왕(安原王)


  나라를 편안하게 만든 왕이라는 의미이다.
 

24대 양원왕(陽原王)


  나라의 남쪽으로 강역을 넓힌 왕이라는 의미이다.

 

※ 양(陽)이란 양지바른 남쪽을 나타내는 글자임을 염두에 두고, 원(原)을 벌판 즉 나라의 강역으로 본다면 양원왕이란 나라의 강역을 남쪽으로 넓힌 왕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 의미가 필자의 주장과 일치한다.

 

25대 평원왕(平原王)

 
  넓은 땅을 평정한 왕이라는 의미이다.

 

※ 삼국사기에는 시호를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원왕은 도읍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죽었는데, 평양성과 장안성은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26대 영양왕(영陽王)


  남쪽 강역을 잘 지킨 왕이라는 의미이다.

 

※ 영양왕은 왕위에 오르자 장안성에서 다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듯하고, 수나라와 천하의 패자자리를 놓고 다투어 결국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만든 왕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27대 영류왕(榮留王)


  영화롭게 살았던 왕이라는 의미이다.

 

※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시해 당한 왕인데, 서슬퍼런 연개소문이 그의 시호를 영화롭게 살다 죽은 왕이라고 정했다는 것은 의외이다. 조롱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28대 보장왕(寶臧王)


  시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