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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나영 - 고구려 유리왕의 일생(2)

윤여동 2008. 12. 9. 00:06

윤나영 - 고구려 유리왕의 일생(2)

 

  첫사랑 은영이 목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유리는 하늘이 무너진 듯 밤새도록 엉엉 울었다.
  처음으로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며 아버지를 원망도 했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 세상이 지옥처럼 여겨졌다.
  그러한 유리를 바라보는 할머니 유화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화와 예씨는 유리가 스스로 이겨내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유리는 방안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유리는 다시는 사랑 같은 것은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가 죽고 없는 동부여가 한없이 싫어졌다.
  그리하여 이 지옥 같은 동부여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동부여 군사들의 감시는 매우 심했다.
  혼자라면 당장이라도 도망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늙으신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도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만 도망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계획을 상의한다면 할머니 유화와 어머니 예씨는 유리 혼자만이라도 이곳을 탈출하여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가라고 하겠지만, 유리는 늙으신 할머니와 어머니를 그곳에 남겨두고 혼자만 그곳을 탈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유리는 언젠가는 그곳을 반드시 탈출하리라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그리고 사랑 같은 것은 평생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혼인 역시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유리의 나이 35세쯤에 이르러 할머니인 유화가 죽게 되었다. 
  유화가 죽자 동부여의 금와왕은 유화를 태후의 예에 따라 그곳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워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금와왕이 죽은 유화의 시신까지도 계속 인질로 잡고 있겠다는 의미일 뿐 유화를 정말로 태후로 대우해 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고, 유리와 어머니인 예씨는 아직도 여전히 인질일 뿐이었다. 
  유리는 자나깨나 탈출만을 생각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할머니인 유화가 죽고 5년이 흐른 기원전 19년 봄에야 그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궁중에 초상이 나서 자기를 감시하던 군사들이 두 명만 남고 모두 궁중 수비를 위하여 궁궐로 들어갔던 것이다. 
  유리는 막걸리를 받아다 병사들에게 주고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는 척 하고 술을 권했다. 출출했던지 막걸리를 벌컥벌컥 잘도 마셨다.
  밤이 깊어지고 풀벌레소리만 들리자 술을 마시고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초소 한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유리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소리 없이 집을 나와, 친구 세 명과 함께 어둠을 틈타 졸본을 향하여 출발했다.
  아버지인 주몽이 탈출했던 길을 그대로 따라 밤새도록 말을 달려 강을 건너 졸본에 도착해서 고구려 왕궁을 찾아갔다.
  궁궐 문에 이르러,
  "나는 동부여에서 온 왕의 친아들 유리이다. 왕을 만나러 왔다"라고 말하자 수문장이 뛰어나와 신분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가 왕과 함께 다시 나왔다.
   주몽도 수문장의 보고를 받고는 깜짝 놀라 손수 대궐 문 앞까지 단걸음에 달려 나왔던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얼굴에 주름살이 많아지고 머리칼은 하얗게 되었지만 예씨와 주몽은 서로 한눈에 알아보고,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주몽이 말했다. "어서 오시오. 오랜 세월 너무도 고생이 많았소. 그 곱던 얼굴이 많이도 변했구려. 동부여를 떠나온 후 40년간 당신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소. 이 아이가 내가 동부여를 떠나올 때 뱃속에 있던 내 아들 유리요?"
  유리는 땅바닥에 엎드려 왕에게 절을 올렸다.
  아니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처음 만나는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린 것이다.
  "소자 유리, 아버지께 인사 올립니다. 그 동안 아버지를 너무도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늦게야 찾아온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어서 오너라, 내 아들 유리야.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이 애비를 많이도 원망했겠구나. 너를 일찍 데려오지 못해 미안하다. 자, 안으로 들어가서 지나온 얘기 좀 들어보자."
  주몽은 예씨와 유리를 데리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 지난 세월 못 다한 얘기를 밤새도록 나누었다.
  주몽은 어머니 유화가 평생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쓸쓸히 눈 감으셨다는 예씨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내어 통곡했다. 
  다음날 주몽은 대신들을 불러모아 자기의 친아들 유리를 소개하고, 태자로 봉하는 의식과 예씨를 왕비로 봉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온 나라에 잔치를 베풀어 백성들이 함께 즐거워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백성들은 유리태자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주몽은 유리의 친구들도 관직을 주어 태자인 유리를 옆에서 보좌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유리는 태자로 봉해지고 나서도 혼인할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그 아버지인 주몽이 죽기 전에 유리를 불러 앉히고는,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왕실이 번성해야 한다.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혼인을 하도록 하라"고 혼인 할 것을 강권했었다.
  또 다물후 송양을 불러 "나는 경을 내 형제와 같이 생각했었소. 내가 죽더라도 태자를 잘 도와주시오. 지난번 연회 때 보니 경에게 예쁘게 생긴 딸이 있던데 태자와 혼인을 시킨다면 나는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이요"했었다.
  그리하여 유리는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 다음해 즉 기원전 18년 7월 41세의 나이에 송화와 첫 혼인을 하게 된다.
  첫 왕비인 송화왕비는 주몽에게 비류국을 들어 바치고 다물후로 봉해졌던 송양의 큰딸이었다.
  유리왕이 대호족인 다물후 송양의 큰딸을 배필로 맞아들인 것은 아버지인 주몽이 죽기 전에 다물후 송양에게 태자인 유리를 잘 도와주기를 부탁하면서 송양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맞아들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아버지인 주몽이 죽고 없는 지금 기반이 약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면 대호족인 송양의 딸과 혼인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정략적인 면도 계산되었다.
  한편 송양의 입장에서도 왕위에 오른 유리왕에게 자기의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영광이었고, 또 외척으로서의 권력도 강화할 수 있었으므로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온 백성의 축복 속에 41살 노총각 유리왕과 송화는 혼인을 했다.
  혼인하자마자 송화왕비가 바로 임신을 하게 되어 유리왕은 이때 더 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 왕비 송씨는 명이 짧았던지 혼인한 다음해에 아들인 도절을 낳고는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첫왕비인 송화왕비가 죽자 대신들은 유리왕에게 다시 장가들기를 권했는데 골천호족의 딸인 화희였다. 그런데 그녀는 예쁘지도 않았고, 애교도 없었으며 무뚝뚝했다.
  그런데 얼마 후 유리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다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옛날 은영과 똑 같이 생긴 여인을 보게 되었는데 이름은 치희였다.
  유리왕이 처음에 치희를 보았을 때 은영이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똑 같았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치희를 무조건 마차에 태워 궁중으로 데리고 와서 계비로 삼았는데, 그녀는 신분이 낮은 한(漢)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그리하여 궁중에서는 유리왕이 미천한 신분의 여자를 계비로 삼은 것에 대하여 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유리왕은 사람들의 숙덕거림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첫사랑 은영을 꼭 빼 닮은 치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녀는 모습도 은영을 닮았을 뿐더러 웃는 모습, 걸음걸이까지도 꼭 은영이었다.
  유리왕은 치희를 볼 때마다 자기를 죽도록 사랑한 은영을 떠 올렸으며, 은영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 살자고 했을 때, 함께 도망하지 못하여 결국 은영을 죽게 했다고 생각되어 그 미안한 마음이 치희를 더욱 사랑하게 했다.
  한편 이러한 유리왕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대호족의 딸이었던 화희는 비천한 집안 출신인 치희를 무척이나 무시했고, 틈만 나면 둘은 싸움질을 하였는데, 대개 화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두 여자를 떼어놓기 위하여 아예 궁 두 개를 따로 지어 서로 떨어져 살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리왕이 사냥을 하러 궁을 나간 사이 둘은 또 다투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화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화희가 치희에게 출신도 비천한 것이 왕의 총애를 믿고 왜 이리 건방지게 구느냐고 치희의 약점인 출신을 문제삼자 분에 못이긴 치희는 보따리를 싸들고 자기의 친정 집으로 돌아 가버렸다.
  사냥에서 돌아온 유리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곧 바로 말을 달려 치희를 쫓아갔으나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왕은 할 수 없이 외로히 혼자 돌아오다가 나무 그늘에 주저앉아 은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리왕은 첫사랑 은영을 생각하며 은영과 또 한번의 이별을 한 듯 괴로워했다.
 그런데 노오란 황조 두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더니 또 곁가지로 날아가기도 하며 서로 희롱하며 놀고 있었다. 
  유리왕은 외로운 마음에 "훨훨 나르는 황조도 자웅이 서로 의지하는데, 홀로된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갈 꺼나" 라고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유리왕은 화희가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유리왕은 화희에게 한마디 질책도 할 수 없었다.
  화희는 대단한 세력을 가진 골천호족의 딸이었기 때문이었고, 화희는 그 후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해명이었다.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태자인 큰아들 도절의 나이가 열 두 살이고 둘째인 해명이 일곱 살 되던 해에 동부여의 대소왕이 볼모교환을 제의해 왔다.
  그러자 골천호족 측에서는 "동부여가 매우 강성하니 비중 있는 태자를 볼모로 보내야합니다"라고 했고, 다물호족은 "다음 왕위를 이어야할 태자를 적국에 볼모로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꼭 왕자를 보내야 한다면 둘째인 해명왕자를 보내야 합니다" 라고 서로의 주장이 팽팽했다.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리하여 유리왕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두 호족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골천호족은 태자인 도절을 볼모로 보내버려야 자기들의 외손자인 해명을 왕위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물호족은 해명을 보내버려야 도절이 왕위를 이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유리왕은 아무도 볼모로 보낼 수 없었다.
  그러자 동부여의 대소왕은 화를 내었고, 급기야 고구려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때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내려 대소왕은 아무 소득 없이 군사를 철수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 후 태자인 도절이 갑자기 죽어버린다.
  도절이 병으로 죽었는지 독살을 당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어쨌든 그는 열 여덟 젊은 나이로 죽는다.
  태자였던 도절이 죽자 골천호족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좋아라 했고, 다물호족은 대책을 강구해야했다.
  이때 유리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로 옮기고자 했다.
  이는 나라의 강역이 동쪽으로 넓어져 도읍인 졸본이 강역의 서쪽에 치우치게 되었기 때문에 국토의 가운데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도 골천호족은 도읍이전을 반대했고, 다물호족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유리왕은 골천호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로 옮겨버린다. 그리고는 해명을 태자로 봉해 골천호족의 불만을 무마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서기 4년 즉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로 옮긴 다음해에 해명을 태자로 봉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골천호족은 유리왕의 이 같은 조치에도 수긍하지 않고, 해명 역시 도읍을 옮기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고 졸본에서 국내로 오지도 않는다.
  해명이 새로이 옮긴 도읍인 국내로 오지도 않은 것은 그의 외가인 골천호족이 도읍이전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는데, 태자인 해명 역시 골천호족의 편에 서서 도읍이전에 대하여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리왕은 골천호족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졸본부근에 위치했던 황룡국왕에게 해명태자를 죽여달라고 비밀리에 부탁한다.

 

☆ 삼국사기에는 해명이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잡아당겨 부러뜨렸다 하여 죽여달라고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해명과 골천호족이 도읍이전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유리왕이 자기의 아들이며 태자인 해명을 죽여달라고까지 한 것을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하지만,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도읍을 옮긴 것을 끝까지 반대하는 골천호족을 유리왕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리왕은 해명이 자기의 친아들이기는 하지만 골천호족의 구심점에 태자인 해명이 있었기 때문에 해명을 죽여 없애 버림으로써 골천호족을 제거하려 한 것이었다.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유리왕은 분명 비정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황룡국왕도 처음에는 유리왕의 부탁을 받아들여 해명을 죽이려고 그를 초청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괜히 이웃 나라 태자를 죽여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웬지 께름찍했다.
  그래서 황룡왕은 해명을 죽이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다.  
  그러자 유리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도읍이전을 끝까지 반대하고 있는 골천호족을 공격하여 모두 죽여 버린다.
  또한 자신의 명령을 받들지 않고 골천호족의 편에 섰던 태자의 행동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지 골천호족을 쳐 없앤 다음 해명에게 스스로 자살하여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왕의 명령을 받은 해명은 스므살 젊은 나이에 비류수 강가에 창을 땅에 꽂아놓고 스스로 말을 타고 달려와 그 창에 꽂혀서 죽는다.
  또한 골천호족의 딸인 화희왕비 역시 왕비에서 폐위되어 궁중에서 내 쫓겨 골천호족은 고구려 권력의 중심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골천호족은 유리왕의 원대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그마한 자기들 호족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다시 첫 왕비 송화의 동생인 송령과 혼인을 한다.
  다물후 송양은 두 명의 딸을 유리왕에게 시집보냈던 것이다.
  죽은 첫 왕비 송씨의 동생인 작은 송씨와 유리왕이 혼인을 할 때 유리왕은 약 60세쯤이었고, 작은 송씨는 20세쯤이었는데, 키는 작으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며 바지런하고, 이름이 송령이라서 사람들은 솔방울왕비라고 부르기도 했다.
  골천호족과 태자인 해명이 도읍이전을 반대하자 유리왕은 다시 다물후 송양의 딸을 맞아들여 왕후로 봉했고, 후에 골천호족과 해명은 제거되었던 것이다.
  아마 골천호족을 제거하는 데에 다물호족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작은 송씨는 비록 나이 많은 유리왕에게 시집왔지만 세 아들을 낳았다. 장자인 무휼, 차자 해색주 그리고 셋째 여진이었다.
   요즈음 연속극 "바람의 나라"에서는 무휼과 여진이 배다른 형제로 그려지고있으나 이는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무휼은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대무신왕이고, 해색주는 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민중왕이며, 막내인 여진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었다.
  귀염둥이 막내아들 여진이 죽고 난 후 유리왕이 나라를 순행하다가 모둔곡이라는 곳에서 죽은 막내아들 여진 또래의 고아 세 명을 만났다.
  유리왕은 죽은 막내아들 생각도 나고 또 자기가 동부여에 있을 때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사람들로부터 천대받던 어린 시절이 생각 나 그 아이들을 데려와 돌보아 주었는데, 뒤에 재사(再思)라는 아이는 양자로 삼아 궁중에서 길렀다.

 

☆ 그런데 후일 고구려의 왕위는 이때 유리왕이 양자로 들인 바로 이 재사의 후손으로 이어지게 되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불우했던 환경을 견디고, 고구려의 왕위에 올라 강역을 넓히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고구려를 강국으로 만들어 놓은 유리왕도 세월은 이길 수 없었던지 재위 37년째인 서기 18년 7월에 이르러 깊은 병에 걸려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이 없자 정사를 15세인 태자 무휼(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후일의 대무신왕)에게 맡기고 국내를 떠나 두곡의 이궁으로 가서 병마와 싸우다가 3개월 후인 10월에 죽어 국내서쪽 두곡동쪽 벌판에 묻히게 된다.
  그리고 작은 송씨 즉 송령왕후가 아들인 대무신왕 무휼이 왕위에 오른 뒤 태후가 되어 몇 년 간이나 더 살다가 죽었는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유리왕과 상당히 많은 연령 차이가 났기 때문에 유리왕이 죽은 후에도 꽤나 오랜 기간 더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