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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선덕여왕은 왕이 아니라 최초의 여황제였다

윤여동 2009. 2. 1. 16:48

윤여동설 - 선덕여왕은 왕이 아니라 최초의 여황제였다

 

 

  여자로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왕위에 오른 신라 27대 선덕여왕.
  우리는 지금 그녀를 별 생각없이 "선덕여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선덕여왕은 "왕(王)"이 아니라 "황제(皇帝)"였다.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으로 불러오다가 22대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야 "왕(王)"이라 부르게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A.D.503) 조를 보면,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고 하고, 혹은 사로(斯盧)라고도 하였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불렀습니다.
  신들의 생각에 "新(신)"자는 '좋은 일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羅(라)"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 이로서 국호를 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를 모두 "帝(제)"나 "王(왕)"으로 불렀는데,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다만 방언으로 왕호를 일컬었을 뿐 아직도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지금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新羅國王(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지증마립간은 "왕(王)"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는 법흥왕 때인 536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반포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23년(A.D.536) 처음으로 연호를 반포했는데,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연호는 황제만이 반포할 수 있었고, 제후국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신라의 왕이 연호를 반포하는 것이다. 
  이는 신라의 왕들이 이때부터 황제를 칭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시기적으로는 신라가 금관가야를 통합한 얼마 후의 일로서 법흥왕은 금관가야를 복속시켜 나라가 커지자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진흥왕은 재위 12년(A.D.551)에 이르러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치고, 29년(A.D.568)에 다시 대창(大昌)으로, 33년(A.D.572)에 또 다시 홍제(鴻濟)로 고치게 되는데, 이를 보면 진흥왕 역시 황제를 칭했음을 알 수 있고, 
  진평왕은 재위6년(A.D.584)에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고쳤고,

  선덕여왕은 재위3년(A.D.634)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쳤으며,

  진덕여왕은 즉위년인 647년에 연호를 태화(太和)로 고쳤으나 재위 4년(A.D.650)에 이르러서는 태화라는 연호를 포기하고 당나라 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시행하게 되어 이때부터 신라의 왕들은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고 만다.
  따라서 신라의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은 왕이 아닌 황제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선덕여왕은 여왕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였던 것이다. 
 善德女皇帝(선덕여황제).

 
  그런데 이 선덕여왕을 짝사랑했던 한 시골청년 이야기가 수이전(殊異傳)에 기록되어 전해졌다. 
  옛날 신라 선덕여왕 때 활리역이라고 하는 시골에 지귀라는 한 청년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선덕여왕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그만 상사병에 걸려 나날이 몸이 야위어 갔다.
  어느 날 여왕이 불공을 드리러 절에 행차했을 때 그 소식을 듣고는 지귀를 불러오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여왕의 부름을 받고는 절 입구에 와서 여왕이 불공을 마치고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여왕이 불공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자신을 짝사랑 하고 있다는 지귀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끼고 있던 팔찌를 빼어 그의 가슴 위에 놓아주고 궁으로 돌아갔다.
  지귀가 잠을 깨어 보니 여왕은 이미 돌아갔고, 그의 가슴 위에는 여왕의 팔찌만이 놓여 있었는데, 여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지귀의 가슴속에서 불이 일어나 온 몸이 불타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선덕여왕의 인자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다만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때는 50세가 다된 나이였으므로 이 지귀설화는 아마 선덕여왕이 젊었던 공주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 잘못 전해졌을 것이다.
  지귀는 아리따운 신라의 덕만공주(선덕여왕의 공주시절 이름)를 짝사랑하다가 그 뜨거운 사랑의 불꽃이 그만 자신의 몸을 불태워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