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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광개토태왕과 아신왕 천하를 다투다

윤여동 2009. 2. 24. 21:24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과 아신왕  동이의 맹주자리를 놓고 다투다
                                    


  광개토대왕(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성씨는 고씨요, 이름은 담덕이다.
  (중국 사서에는 고안이라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은 그 아버지 고국양왕이 병들어 정사를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왕위를 선위 받아 왕위에 올랐던 듯 하다.
  호태왕 비문을 보면, 고국양왕이 살아 있던 서기 391년을 광개토대왕의 연호인 영락(永樂) 1년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 삼국사기에는 고국양왕이 서기 392년 5월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호태왕 비문에는 그 전해인 391년을 영락 1년이라고 하기 때문에 필자는 광개토대왕이 왕위를 선위 받은 시점을 서기 390년 9월부터 391년 정월 초하루 사이로 보고 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은 왕위에 올라 국사전반을 점검하고 전쟁준비를 한 후 392년 7월이 되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쳐 석현성 등 10개성을 함락시킴으로써 한수 북쪽 지역을 많이 빼앗고, 다시 10월에 이르러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의 관미성을 쳐 함락시킨다. 
  이때 백제는 진사왕 때로서 도읍은 한성(북한산, 한산)이었다.
  앞서 백제는 13대 근초고왕 26년인 서기 371년 겨울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며 전쟁에 승리한 후 남한산(남한성)에서 한산(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20여 년이 흐른 이때에 이르자 진사왕은 정치를 등한시한 채 궁실을 중수하고, 연못을 파 그 안에 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나 기르고 기화요초를 심는 등 향락에 빠져 있었다.

 

☆ 이때 백제의 도읍 한성이 위치했을 북한산(北漢山)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고, 삼국사기에는 한산(漢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백제군은 제대로 항전 한번 해보지 못하고 한수 이북 지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러자 아신왕(혹은 아방이라고도 하고, 일본서기에는 아화라 했다)이 숙부인 진사왕을 제거해 버리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아신왕은 그 아버지인 침류왕이 죽은 서기 385년 11월에 이미 왕위에 올랐어야 했으나 나이가 어렸던 탓에 숙부인 진사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만 7년이 지난 392년 11월에 진사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아신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약 20세쯤 되었을 것이고, 이때 광개토대왕 역시 약 20세쯤의 나이였다.
  그리하여 두 젊은 왕은 동이의 맹주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되는데, 아신왕이 393년 8월에 이르러 전 해에 잃었던 관미성과 석현성 등 10개 성을 탈환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이때 아신왕은 "관미성은 우리나라(백제) 북쪽 변경의 요충인데, 그것이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다. 이를 과인이 통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다" 하면서 군사 1만을 주어 출진 시킨다.
  그런데 이때 백제군은 석현성 등 5개성은 탈환하고 진군하여 관미성을 포위했으나 군량 수송 등이 여의치 않자 군사를 회군시킨다.
  그러자 그 다음해인 394년 7월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다시 백제를 침공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수곡성 아래에서 싸웠으나 백제가 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백제의 아신왕은 그 다음 해인 395년 8월에 다시 고구려를 치게 된다.
  그런데 이때 광개토대왕이 친히 7천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패수가에 진을 치고 백제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는데, 백제군은 이 전투에서 군사 8천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신왕은 그 보복을 하기 위하여 11월에 다시 친히 군사 8천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까지 진군했으나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이 많이 얼어죽자 한산성으로 회군하게 된다.
  그러자 그 다음해인 396년에 또 광개토대왕이 친히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백제를 침공하여 57개 성을 함락시키고, 도읍인 한성이 포위되자 아신왕은 어쩔 수 없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때 백제가 고구려에게 빼앗긴 58개성과 700개 촌은 서기 44년 후한의 광무제가 살수 이남 땅에 설치했던 옛 후한낙랑군 땅이었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승리하여 빼앗았던 곳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이다.
  그런데 이때 이르러 고국원왕의 손자였던 광개토대왕이 다시 그 땅을 백제로부터 탈환했던 것이다.
  흥륭은 3백년 가까이 후한낙랑군의 치소였으니 낙랑 유물이 출토되지 않을 리 없을 것인데도 지금 흥륭에 사는 일반 사람들은 흥륭이 옛 후한낙랑군의 치소였던 것은 모르고 있었다.
  출토유물을 철저히 숨기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곳이 후한낙랑군이었다는 인식자체가 없으므로 설령 흥륭에서 낙랑유물이 출토된다 해도 어쩌다 흘러 들어온 낙랑유물이 출토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지...........
  흥륭은 산으로 빙 둘러싸인 산골도시로서 사람들이 순박하고 매우 친절했으며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혹시 싶어 물어보니 그곳에도 한국식당이 있다고 해서 찾아 가보니 종업원들이 한복을 입고 근무하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와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는 것을 보니 중국에서도 한국음식이 꽤 인기 있는 듯 했다. 필자도 중국 식당에서 나는 특유의 향채 냄새 때문에 식사를 거의 거르다시피 한 후라 삼겹살에 한국소주를 주문해 배부르게 먹고 나니 정말 살 것 같았다.
  중국의 대도시도 아닌 산골도시 흥륭의 한국식당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맛도 괜찮았다. 
    
   
  그리하여 아신왕은 남녀 1천명, 세포 1천 필을 바치며, 광개토대왕에게 무릎꿇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어 따르겠습니다" 라고  맹세하고, 58개성과 7백개 촌, 내신좌평인 왕의 동생 홍을 볼모로 바치게 된다.
  주도권 다툼에서 일단 광개토대왕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아신왕은 비록 상황이 불리하여 무릎꿇고 항복을 해야 했지만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치욕을 갚으려 397년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낸다. 이는 왜국의 군사력을 빌어서라도 잃었던 땅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아신왕은 398년 8월에 이르러 다시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한산 북쪽 목책까지 갔으나 그 날 밤 유성이 병영으로 떨어지자 좋지 않은 징조라 하여 다시 회군하게 된다.
  하늘이 아신왕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신왕은 그 다음 해인 399년에 또 다시 고구려를 치려고 병마를 크게 징발한다.
  그러자 전쟁에 신물이 난 백제 백성들이 많이 신라로 도망치게 되어 호구수가 줄어들 정도가 되자 아신왕의 고구려 침공계획은 잠깐 멈칫하게 되지만 그래도 아신왕의 의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404년에 이르자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어 왜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대방을 침공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백제와 왜 연합군을 죽이게 되어 백제가 또 패전하게 된다.
  그렇게 아신왕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평생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 다음 해인 405년 9월에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동이의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툰 두 영웅 즉 전술의 귀재 광개토대왕과 의지의 화신 아신왕의 주도권 다툼은 이렇게 광개토대왕의 최종 승리로 끝나고 말았는데, 이후에도 광개토대왕은 후연을 치고, 동부여를 치는 등 정복활동을 계속하다가 413년 10월에 이르러 약 40세의 나이로 죽고 마니 안타까운 일이다.
  광개토대왕이 20년 만 더 살았더라면 동양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역사를 잘못 해석해 광개토대왕과 아신왕이 좁은 한반도에서 동이의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고 인식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잃어버린 대륙의 우리 옛 땅을 되찾을 수 없다.
  우리의 역사인식을 반도사관에서 빨리 대륙사관으로 바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