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미실 - 난잡한 신라왕실의 sex 파티
미실의 혈통
삼국사기 신라본기 21대 소지마립간 22년(A.D.500) 조를 보면, "가을 9월 왕이 날이군에 갔는데, 이 고을 사람 파로에게 딸이 있었다.
이름은 벽화이고, 나이는 16세인데, 일국의 미인이었다.
☆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벽화의 아버지는 섬신공이고, 어머니는 벽아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분이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 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 보자기를 씌워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인가 생각하고 열어보니 얌전한 소녀이므로 괴이하다 하여 받지 않았다.
왕이 대궐에 돌아와서도 그 여자 생각이 자꾸만 나서 두 세차례 미행으로 그 집에 가서 그 여자와 관계했다" 라는 기록 속의 벽화는 소지왕이 죽은 후 법흥왕과의 사이에서 삼엽궁주를 낳게 되고, 삼엽궁주가 자라 눌지왕의 동생 복호의 증손자인 아시공과 혼인하여 미진부를 낳는다.
따라서 미진부는 벽화의 외손자가 된다.
한편 벽화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위화랑이었다.
화랑세기에는 위화랑의 풍모에 대하여, "공은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를 바른 듯 하며,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 말을 하면 바람이 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화랑은 묘심과 소지왕비 선혜가 사통하여 태어난 오도와 혼인하여 옥진을 낳았고, 옥진이 자라 지증왕비 연제부인의 친정 아버지인 등혼공의 증손자인 영실과 혼인하여 묘도를 낳았다. 따라서 묘도는 위화랑의 외손녀가 되는데, 이 두 사람 즉 미진부와 묘도가 곧 미실의 부모가 된다.
섬신공 = 벽아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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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흥왕 = 벽화 위화랑 = 오도
↓ ↓
아시공 = 삼엽궁주 영실 = 옥진궁주
↓ ↓
미진부 = 묘도 ←.................묘도
↓
미실
화랑세기에는 미실이 입태될 때의 상황에 대하여, "옥진궁주가 꿈에 칠색조가 자기의 가슴속에서 날아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 이상하게 여겨 묘도의 침실에 가 보았더니 그때 묘도와 미진부공이 함께 사랑을 나누는 중이었다. 옥진궁주는 이에 기뻐서 알려주며, '너희 부부는 이제 귀한 딸을 낳을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미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미실의 모습에 대하여,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으며,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아서 백가지 꽃의 요염함을 합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왕실의 색공집안이었던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이 미실을 보고는 "나의 도를 부흥시킬 만하다" 하고는 옆에 두고 방중술과 가무를 가르치게 된다.
미실의 색공
옥진으로부터 각종 방중술을 전수받은 미실은 그때부터 신라왕실의 뭇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게 된다.
지금의 윤리 도덕으로 본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당연한 일인 양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색공을 전문으로 하는 가문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고, 색공이란 신라 왕실 남자들의 성노리개 노릇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자식을 낳아주기도 하는 일종의 씨받이 여인 역할도 했던 듯 하다.
미실의 첫 남편은 세종전군이었는데, 세종은 법흥왕의 딸이며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가 태종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따라서 진흥왕과 세종은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모 형제 사이였다.
☆ 법흥왕의 딸 지소는 자라서 숙부인 입종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고, 다시 영실을 계부로 맞아들여 황화공주를 낳았고, 다시 아진종과 보옥공주의 아들인 태종과의 사이에서 세종을 낳게된다.
그런데 이 세종은 정력이 강하지 못했던지 비실비실하자 미실은 사다함과 사통하게 되고, 세종의 어머니인 지소는 세종의 건강이 상하게 될까 염려하여 미실을 떼어놓으려 하게 된다.
그렇지만 세종이 미실을 잊지 못하여 상사병이 나자 할 수 없이 미실을 다시 불러들이게 되고, 둘 사이에서 하종이란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런데 미실이 하종을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 이모인 진흥왕비 사도부인의 명으로 미실은 태자인 동륜과 성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또 진흥왕이 은근히 미실을 좋아하는 것을 눈치챈 사도부인(미실의 이모이다)이 조카인 미실을 적극 추천하게 되어 진흥왕이 잠자리를 같이 해보니 끝내주자 미실을 자신의 곁에 두고는 전주라 하며 정치에도 참여시키게 되어 모든 권력을 미실이 휘두르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미실이 애송공주를 낳게 되는데, 사실은 동륜태자의 딸이었으나 진흥왕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다시 미실은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반야, 난야, 수종전군을 낳게 된다.
그런데 이때 신라왕실에 동륜태자가 개에 물려 죽는 사고가 나게 된다.
이때 보명궁주는 진흥왕의 후궁이었는데, 태자인 동륜이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 보명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게 된다.
이때 진흥왕은 미실에게 푹 빠져 있었으므로 보명궁주는 스스로 자신이 미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여기고 태자와 정을 통하게 되어 태자가 매일 밤 보명궁을 들락거리다가 그만 큰 개에게 물려죽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흥왕은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게 하는데, 조사해 보니 미실과 미실의 남동생인 미생의 사람들이 많이 연루되어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미실은 울며 궁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후 사도왕비의 주선으로 진흥왕은 미실을 용서하게 되지만 미실은 왕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편인 세종과 해궁에 머물게 된다.
이때 미실이 두 아들인 하종과 수종을 함께 데리고 있었는데, 진흥왕이 자신의 아들인 수종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여러 번 불렀으나 미실은 오지 않는다.
그러자 진흥왕이 직접 해궁으로 거둥하여 미실을 데리고 왕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또 미실이 세종의 아이를 임신했으므로 해산 후에 입궁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진흥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실은 만삭인 몸으로 왕궁으로 들어왔고, 얼마 후 세종의 둘째 아들인 옥종을 낳게 되고, 다시 진흥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진흥왕이 풍질(중풍)에 걸려 내외 정사를 보지 못하고 사도, 미실, 보명, 옥리, 월화 다섯 궁주와 함께 더불어 즐거움에 탐닉하게 되자 정사는 모두 사도와 미실이 처리하게 되어 미실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때 미실은 진흥왕이 몸이 불편하여 사도왕후가 외로워하자 세종에게 사도왕후와의 잠자리를 권하기도 하는데, 세종이 애써 거절하였으나 결국에는 사도와 정을 통하게 된다.
미실은 외로운 이모를 위로해 주기 위해 남편인 세종을 이모에게 빌려 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외에도 미실은 옥진궁주의 여동생 금진낭주와 설성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설원랑과도 정을 통하고, 심지어 자신의 남동생인 미생과도 정을 통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화랑세기 필사본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때의 신라는 도무지 정조관념이라는 것은 없던 나라였다.
미실 왕후를 꿈꾸다
서기 576년 8월에 이르러 진흥왕이 죽게 되었는데, 사도태후와 미실, 미생, 세종은 그 사실을 숨기고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던 금륜으로부터 왕위에 올려주면 미실을 왕후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금륜을 왕위에 올려주는데 이가 곧 25대 진지왕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이때의 상황을,
"진지대왕은 미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가 걱정을 하다가 이에 미실과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태후의 오빠이다.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도모하려 할 때 문노의 무리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 개의 무리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 문노를 아선,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 우봉사화랑, 미생을 전방봉사화랑으로 삼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진지왕을 폐했음을 알 수 있고,
또 "제(진흥왕)가 죽고 금태자(금륜태자)가 즉위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실을 받아들였는데, 세상 사람들의 여론 때문에 황후로 봉하지 못하였다. 진지왕이 다른 여인에게 빠져 미실을 심히 총애하지는 않았다.
미실은 (진지왕이)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하여 노하여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하고 동태자(동륜태자를 말하는 것으로서 진지왕의 형이었는데 보명궁에서 개에게 물려 죽었다)의 아들 백정공을 즉위시키니 이가 진평대제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의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때의 미실은 왕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는 미실의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만 그렇게 염원했던 왕후는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미실은 나이 어린 진평왕과의 사이에서도 딸을 낳았다고 하니 도대체 이해되지 않고, 신라 왕실의 "신국(神國)의 도(道)"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 화랑세기 필사본이 소설인 것일까?
미실의 죽음
미실은 만년에 이르러서는 영흥사에 가서 살았던 듯 하다.
그런데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자 설원랑(설화랑이라고도 한다)이 병간호를 하였다.
밤마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정말로 서기 606년 7월에 이르러 설원랑이 죽게되고, 미실은 조금 나아지게 된다.
그리하여 미실은 설원랑의 무덤에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지내며, "나도 또한 머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 미실도 죽게된다. 그때 미실의 나이 58세였다.
미실이 무슨 병에 걸려 죽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그 시절에도 성병은 있었을 테니 난잡한 성관계로 인하여 성병에 걸려 죽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일세를 풍미했던 미실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권세도, 미모도 일장춘몽일 뿐일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