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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논쟁 - 이성계는 고려 왕씨들을 정말로 바다에 빠뜨려 죽였을까?

윤여동 2009. 8. 31. 06:55

윤여동설논쟁 - 이성계는 고려 왕씨들을 정말로 바다에 빠뜨려 죽였을까?

 

 

  대동기문을 보면,

  “왕씨는 고려 태조의 자손이다.

  우리 태조(이성계)가 즉위한 후에 왕씨들이 난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그들을 모두 한 섬 속에 가서 살도록 유인하자 여러 왕씨들은 다투어 배에 먼저 올랐다.

  배가 중간쯤 이르렀을 때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서 물속에 숨어들게 하여 그 배 밑바닥을 뚫어 물이 스며들게 하여 모두 빠져 죽게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세간에 전해지기를 이후 왕씨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왕(王)자를 변형시켜 옥(玉), 전(全), 전(田)씨 등으로 성씨를 바꾸었다는 말도 있어 사람들은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옛날에 한 왕조가 멸망하고 새 왕조가 서게 되면 전왕조의 일부 핵심 인물을 제거하거나 그 왕조에 충성하는 일부 사람들을 견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특히 전왕조의 왕족들은 특별관리 대상으로 삼아 반란 등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은 신왕조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성계는 고려가 멸망하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며 절개를 강조했던 사람들도 어떻게든 회유하고 설득하여 조선왕조에 참여시켜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조선왕조에 동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계가 왕씨라고 하여 무조건 모두 죽여버릴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 전해진 것이라 생각되는데, 왜 이러한 이상한 말이 전해지게 되었던 것일까?

  필자는 이것이 조선이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 와전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고려의 도읍이 황해도 개성이었고, 그곳에 정몽주가 죽을 때 흘린 피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선죽교도 있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삼한은 78개 소국으로 이루어진 사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고 하고, 위만조선도 72개 소국으로 이루어진 사방 수천리에 이르는 넓은 나라였다고 하기 때문인데, 한반도는 그렇게 큰 땅이 아니다.

  따라서 삼한이나 위만조선은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이 아니라 넓은 대륙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삼한이나 위만조선은 지금 북경 부근의 대륙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삼한 땅과 위만조선의 땅을 그대로 물려받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도 역시 북경 부근이 중심 강역이었으며, 고려 역시 그 땅에서 건국되고 멸망했다.

 

★ 중국 사서들에는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은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반도에는 장성의 흔적이 없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만리장성은 중국 하북성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에서 시작되었다.  

  신라는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중심으로, 가야는 요녕성 흥성(興城)을 중심으로, 백제는 진황도의 도산(都山) 남쪽을 중심으로, 고구려는 하북성 장가구시, 승덕시, 내몽골을 중심으로 존속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서 건국된 이성계의 조선 역시 대륙의 바로 그 고려 땅 개경에서 건국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한반도의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500년 왕조를 이었으니, 조선이 대륙의 개경에서 건국된 후 한반도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조선 태조 이성계가 대륙의 개경(하북성 관성현)에서 한양(한반도 서울)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1394년 10월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를 한반도 황해도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했었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대륙의 개경(하북성 승덕시 관성현 부근)에서 한반도의 서울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도읍을 대륙에서 한반도로 옮기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해 와야 한다. 배를 타고 왔거나 육지로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려의 왕씨들 중에도 대륙을 떠나 배를 타고 한반도로 이사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인데, 우연하게도 그들이 탄 배가 풍랑에 떠밀려 배의 밑창에 구멍이 나 바다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고려 왕씨들 사이에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성계가 왕씨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

  “이성계가 왕씨들을 배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가 침몰시켜 몰살 시켜버린다”는 괴소문이.............

  그러자 왕씨들은 매우 불안하고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는 겁먹고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들어 갔을 것이고, 또 일부는 왕씨 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는 언젠가 잡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스스로 성씨를 옥씨로 바꾸기도 하고, 전씨로 바꾸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로서는 전 왕조인 고려 왕족들을 회유하고 대우하여 줌으로써 자신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 유리했지 그들을 잡아 죽이고 적대시함으로써 민심이 동요하는 것이 결코 유리하지 않았으며, 일부 왕씨들의 반란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성계는 모든 병권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고, 모든 관리들도 이미 이성계의 편에 서 있었으며, 민심 역시 멸망한 나라 고려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계가 전왕조인 고려의 왕족들이나 왕씨들을 무리하게 잡아 죽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동기문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은 괴소문을 기록하여 전했던 것이고, 이러한 잘못된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짐으로써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게 되어 아마 지금까지도 이성계의 후손들과 왕건의 후손들 사이가 서먹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왕씨들의 씨를 말리려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므로 그러한 앙금은 이제는 털어내야 한다.

  그리고 전라도 사람들이 옛날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를 배신했다고 하면서 경상도 사람들을 배신자라 하고, 경상도 사람들은 왕건이 훈요십조 제8조에서 차현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면서 전라도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며 서로들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필자는 씁쓸하다.

  진흥왕이 살던 신라는 한반도의 경상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왕건이 말한 차현도 하북성 당산 북쪽을 말하는 것인데, 왜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경상도, 전라도 사람들이 그 기록을 근거로 삼아 감정싸움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우리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한민족이 지금 북경 부근까지에 이르는 광활한 대륙의 우리 옛 땅을 잃어버린 것만도 속이 상하는데, 좁은 한반도에서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분열되어 있으니 필자는 마음이 아프다.

  이제는 역사를 똑바로 알고 그러한 헛된 감정을 털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참고] 

 대동기문(大東奇聞)은 1926년에 강효석이 조선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역대 인물들에 얽힌 전기·일화 등을 엮은 책으로서 4권 1책이다.

  본문 716항과 부록으로 고려말수절제신(高麗末守節諸臣) 편에 정몽주 등 98항이 첨가되어 모두 814항이 실려 있으며 항목마다 인명과 사건을 요약하여 한문 제목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