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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과의 관계를 밝힌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10. 11. 18:52

윤여동설 -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과의 관계를 밝힌다 - 최초주장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

 

 

  등신불이 되어 지금도 중국 안휘성 화성사 육신보전에 모셔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장왕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과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의 관계를 드디어 필자가 밝혀내었다.

  그가 열반에 든지 거의 1300여년만이다.

 

  중국의 어느 학자는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이 신라왕자 김수충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기록과 일치하지 않고, 또 김수충이 성덕왕의 실질적인 장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는 김수충이 신라 어느 왕의 아들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에도 김수충이 성덕왕의 장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상황을 파악해보면 김수충은 성덕왕의 아들이 아니라 성덕왕의 형이었던 효소왕의 유복자가 틀림없다. 이는 필자가 최초로 밝혀낸 것이다.

 

  사람들이 김수충을 성덕왕의 장자라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13년(A.D.714) 조에,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보내어 숙위를 들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회청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는 기록과,

  성덕왕 16년(A.D.717) 조의,“가을 9월에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수충이 돌아와 문성왕(공자를 말함)과 10철 72제자의 초상화를 바치매 곧 대학에 비치하였다” 라는 기록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7년(A.D.687) 조를 보면, "봄 2월에 왕의 맏아들이 태어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태어난 신문왕의 장자가 바로 효소왕이었고, 성덕왕은 바로 이 효소왕의 동복동생으로서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따라서 성덕왕은 아무리 빨라도 688년 이후에야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그 형과 2-3년 정도의 터울이 있었다면 성덕왕은 689년생 또는 690년생일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이 왕위에 오른 때는 702년 7월이었으므로 성덕왕이 왕위에 오를 때 13-14세에 불과했고, 첫 혼인을 한 때가 재위 3년째인 704년 5월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때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첫 왕비(엄정왕후)로 삼았다고 했다.

  따라서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0세 정도의 나이에 이미 혼인을 하여 아들인 김수충을 낳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사실이기 어렵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쯤이 흐른 후인 714년에 왕자 수충을 당나라에 숙위보내며, 715년에 이르러 첫 아들인 왕자 중경을 태자로 삼는데, 이때 중경은 아무리 빨라도 705년에야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므로 태자로 봉해질 때 10세 이하로 추정이 가능한데, 714년에 수충을 당나라에 숙위보낼 수 있을 정도라면 이때 수충의 나이는 최소한 15세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716년에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보내는데, 비단 5백필, 밭2백결, 벼 1만섬, 저택 한 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집을 사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조를 읽고는, 아마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아주 어린 나이에 사고를 쳐 성정왕후와의 사이에서 수충을 낳았으나 왕비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성덕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다시 소판 김원태의 딸과 혼인을 하여 왕비로 삼아 중경을 낳아 태자로 봉하게 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성정왕후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 왕후에서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아들인 김수충도 성덕왕의 장자로서의 모든 자격을 박탈당해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속세를 떠나 구화산으로 갔고 불교에 귀의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기록이 매우 이상한 것이다.

 즉 성정왕후는 왕비로 봉해진 적이 없는데도 기록은 “성정왕후”로 기록되어 있고,  또 성정왕후가 죄를 짓고 궁에서 나가야 했다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가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죄인에게 그 많은 재물을 주어 내 보낼 리가 없고, 김수충이 성덕왕의 장자라면 714년에 당나라에 숙위를 보낼 일이 아니라 태자로 봉했어야 했는데, 성덕왕은 수충을 당나라에 숙위로 보낸 직후인 715년에 성덕왕의 장자(수충이 성덕왕의 실질적인 장자라면 중경은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야 마땅한데도 기록은 장자로 기록되어 있다)로 기록되고 있는 중경을 태자로 봉하고 716년에 재물을 잔뜩 주어 성정왕후를 출궁시킨다.

 

  그런데 717년에 이르러 태자로 봉해졌던 중경이 죽고, 당나라에 갔던 수충이 돌아왔는데도 성덕왕은 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고, 720년 3월에 다시 이찬 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소덕왕후)로 삼고, 724년에 이르러 소덕왕후 소생인 왕자 승경을 다시 태자로 봉하는데, 이는 수충이 성덕왕의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고, 결국 후일 이 승경이 성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신라 34대 효성왕이고, 효성왕이 자식이 없자 효성왕의 동복동생인 헌영이 다시 그 뒤를 잇게 되는데, 35대 경덕왕이다.    

  그리고 효성왕에 대하여도 삼국사기에는,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승경이요,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소덕왕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앞서 태자로 봉해졌다가 요절한 중경이 성덕왕의 장자라는 말이고, 승경(효성왕)이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말이다.

  성덕왕에게 수충이라는 아들은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왕자 김수충은 신라 어느 왕의 왕자인 것일까?

  김수충은 성덕왕의 형인 32대 효소왕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성덕왕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요, 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매 백성들이 이를 왕으로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효소왕이 죽었을 때 그에게 아들은 없었다는 것이다.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들이 없었다?

  그렇다면 효소왕이 죽었을 때 효소왕의 아들인 김수충이 아직 뱃속에 있었고, 성정왕후가 효소왕의 왕비였다고 생각해보면 모든 의문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했을 경우 성덕왕의 형수인 성정왕후는 효소왕의 왕후였으므로 당연히 왕후로 기록되는 것이 마땅하고 수충은 죽은 효소왕의 아들로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다. 

  김수충이 효소왕의 유복자가 확실하다면 그는 효소왕이 죽은 해인 702년 말이거나 또는 그 다음해인 703년 초에 태어났을 것이므로 그가 처음 당나라로 갔을 때의 나이는 12-13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성덕왕이 아무 욕심이 없었다면 그는 형 효소왕이 죽었을 때 효소왕의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조카인 수충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가 적당한 시기를 보아 왕위를 양위하거나 아니면 형의 유복자인 수충을 태자로 봉하여 다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정도요, 순리였다.

  그런데 성덕왕이 욕심을 부려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면?

  이랬을 경우 성덕왕에게 형의 아들인 김수충은 제거해야할 대상 제1호일 것이고, 다음은 수충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성정왕후일 것이다.

  그리하여 성덕왕은 김수충이 아닌 자신의 장자인 중경을 태자로 봉하려고 시도하게 되는데, 수충이 걸림돌이 되자 그를 당나라에 숙위로 보내버리고 나서 그 다음해 12월에 이르러 속전속결로 자신의 아들 중경을 태자로 봉해버린다.

  이때 허를 찔린 성정왕후는 크게 반발했을 것이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자 성덕왕은 형수인 성정왕후에게 비단 500필에, 밭 2백결에, 벼1만석에, 집을 사 주며, 궁 밖으로 나가 편히 여생을 보내라 하게 되고, 성정왕후는 어쩔 수 없이 궁 밖으로 나와 살게 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태자로 봉해졌던 성덕왕의 외동아들(당시에는 성덕왕의 아들로 중경 밖에 없었다) 중경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만다.

  성덕왕의 입장에서는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성정왕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인 수충으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성덕왕에게는 아들 중경이 죽었기 때문에 새로이 태자로 봉할 수 있는 사람은 수충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정왕후는 급히 당나라 장안으로 사람을 보내 수충을 귀국 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때에도 성덕왕은 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고, 720년 3월에 다시 이찬 순원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인다.

  그리고는 새로 낳은 아들 승경(성덕왕의 둘째 아들이 된다)이 네살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를 태자로 봉해버린다.

  이후 김수충에 대한 기록은 사라지게 되는데, 중국학자는 이때 김수충이 권력다툼에서 패하고  속세에 염증을 느껴 신라를 떠나 지금의 중국 안휘성 구화산으로 가서 불도에 정진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가 곧 김교각일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물론 이때 성덕왕은 죽은 형의 아들로서 자신의 장조카인 수충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이 없이 자신의 친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고, 결국 성덕왕의 뒤를 이어 성덕왕의 둘째아들인 효성왕 승경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승경이 아들 없이 죽자 그 동복동생 경덕왕 헌영이 왕위를 잇게 되고, 다시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이로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직계후손 즉, 문무왕,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 효성왕, 혜공왕으로 이어진 왕위는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이 780년에 시해당함으로써 끝나버리고 김춘추의 직계후예들은 다시는 신라의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성덕왕이 자신의 후손으로 왕위를 잇게 하려고 욕심을 부렸지만 겨우 손자 때에 이르러 왕위를 빼앗겨 버리고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만약 성덕왕이 욕심을 버리고 조카인 김수충에게 왕위를 돌려주었더라면 김춘추의 후예들은 그 왕위를 좀 더 오래 지켜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임이 확실하고, 김교각이 김수충일 것이라는 중국학자의 주장은 다음 글을 보면 잘못된 주장임이 확실한데도 지금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지장왕보살 신라왕자 김교각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가 중국학자의 잘못된 주장에 따르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일이다.

 

김교각은 김춘추의 아들 김문주(金文注)

 

구화산지(九華山志) 권1, 성적문(聖跡門) 제1,  六 응화(應化) 조를 보면,

“按神僧傳云,

신승전에 의하면,

佛滅度一千五百年 菩薩降迹於新羅國王家 姓金 號喬覺

석가모니 사후 1500년에 보살이 신라국 왕가에 탄강했는데, 성은 김씨이고 호는 교각이다.

唐高宗永徽四年 二十四歲 祝髮  白犬善聽 航海而來 至江南池州東 靑陽縣 九華山

당고종 영휘4년(A.D.653) 24세에 머리를 깎고 흰개 선청을 끌고 배를 타고 강남 지주 동쪽의 청양현 구화산으로 왔다.

端坐九子山頭 七十五載 至開元十六年 七月三十夜 成道 計年九十九歲

구자산(구화산의 옛 이름) 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튼 지 75년이 지난 개원 16년(A.D.728) 7월 30일 밤에 도를 이루었는데(열반에 들었는데) 나이 99세였다. 

時有閣老閔公 素懷善念 每齋百僧 必虛一位 請洞僧足數

당시 민공(민양화라 한다)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덕을 쌓기 위해 매번 스님들을 초대하여 설법을 듣곤 하였는데, 반드시 맨 윗자리 하나는 비워 두었다(맨 윗자리에는 김교각 스님을 모셨다). 

僧乃乞一袈裟地 公許之 衣 覆九峰 遂盡喜捨

스님이 가사가 덮을 만큼의 땅을 시주하기를 권하자 민공이 허락했는데, 옷이 구화산 아홉 봉우리를 모두 덮자 곧 구화산 전체를 시주했고,

 其子求出家 卽道明和尙 公後亦 離塵網

그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곧 도명화상이고, 민공 역시 후에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했다.

菩薩入定二十年 至至德二年 七月三十日 顯聖起塔 至今成大道場

보살이 열반한지 20년이 지난 지덕2년(A.D.757) 7월 30일에 탑을 세워 그 성스러움을 현창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도량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을 보면,

  김교각 스님이 신라 왕가에 태어난 해는 서기 630년이고, 24세 때인 653년에 구화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고, 75년간 불도를 닦고, 728년에 열반에 들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99세였고, 열반에 든지 30년쯤 지났을 때인 757년에 탑을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는 것이다.

  기록이 아주 확실하다.

  그런데 중국학자도 분명 이러한 기록을 보았을 것인데, 그는 이렇듯 정확한 기록은 무시해버리고, 비관경(費冠卿)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화성사기(化城寺記)의 "정원 10년(A.D.794) 여름에 열반했다" 는 기록과 송고승전 당 지주 구화산 화성사 지장전의 "정원 19년(A.D.803) 여름에 홀연히 열반했다"라는 기록에 따라 김교각 스님이 곧 신라의 김수충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702년경 태어났을 김수충과 630년경에 태어났다고 기록에 나타나는 김교각을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김수충을 김교각이라고 먼저 설정해 놓고 김수충의 출생연도와 비슷하게 나타나는 기록 즉 화성사기의 김교각 696년생설과 송고승전의 김교각 705년생설을 채용하여 김교각이 김수충과 동일 인물이라고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약 위 신승전의 기록에 따라 김교각의 신분을 밝혀보려 했다면 그 역시 필자와 같은 결론을 얻었을 것인데, 그는 잘못된 기록을 보고 김교각의 신분을 전혀 엉뚱한 사람으로 잘못 비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화산지에 인용된 신승전의 기록에 따라 서기 630년경에 태어났다는 김교각이 과연 누구인지 찾아보자.

  서기 630년이라면 이때는 신라 진평왕 52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신라 26대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딸인 27대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이 선덕여왕 역시 아들이 없어, 사촌 여동생인 28대 진덕여왕이 다시 왕위를 이었으나 진덕여왕 역시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가 바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으로서 서기 603년에 태어났고, 문무왕은 서기 626년에 태어났으니 문무왕은 630년에 태어난 김교각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신라왕자 김교각은 김춘추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춘추의 친아버지는 진지왕의 장자 용수이고, 친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이다.

  김춘추는 자라 보종공의 딸 보라와 첫 혼인을 하였는데, 보라는 진평왕과 보명 사이에서 태어난 딸 양명공주가 보종공(설화랑공과 미실 사이에 태어난 아들)에게 시집가 낳은 두 딸(보라, 보량) 중 장녀였다.

  보라는 김춘추와 혼인하여 고타소라는 첫 딸을 낳았고, 고타소의 동생인 또 하나의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이때 태어난 사내아이가 바로 김춘추의 잃어버린 아들 김문주일 가능성이 많다.

 

  물론 이 때 김춘추는 본부인이 있었음에도 김유신의 여동생 김문희와도 혼인을 하여 장자인 김법민(후일의 문무왕)을 626년에 낳은 상태였기 때문에 문주는 김춘추의 둘째아들이 되고, 이후에도 김춘추는 여러 명의 부인을 더 두어 많은 자식을 얻게 되는데, 642년에 백제의 침공을 받아 대야성이 함락될 때 맏딸인 고타소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고타소의 생모인 보라부인이 일찍 죽었고 고타소가 맏딸이었기 때문에 김춘추가 고타소에게 쏟은 사랑은 특별했을 것인데,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 대야성 도독 김품석에게 시집보낸 맏딸이 목이 잘려 사비로 보내졌다고 하니 그 소식을 들은 김춘추의 마음이 어떠했으랴.

  그리하여 이때부터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켜 죽은 딸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복수의 화신이 되어 고구려로, 왜국으로 청병외교를 펼치기 위해 갔었으나 실패하고, 648년에 드디어 당나라로 가서 당태종을 만나게 되어 당 태종의 승낙을 얻게 되는데, 이때 김춘추는 그의 아들들 모두를 데리고 당나라에 갔던 듯하다.

  그러자 당 태종은 김춘추에게 특진의 벼슬을 내리고, 그 아들 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의 벼슬을 준다.

  그러자 김춘추는 당 태종에게 “저에게 지금 아들 일곱이 있아온데 황제의 곁에서 숙위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게 되고, 당 태종은 그의 아들 중 “문주(文注)와 대감 OO”을 명하여 숙위하게 한다.

 김춘추에게 “문주”라는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김춘추의 부인들과 아들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부인 보라의 소생으로는 맏딸 고타소가 있었고, 보라는 고타소의 동생을 낳다가 죽었다고 하였는데, 김춘추가 태어난 해가 603년이므로 김춘추가 18-20세쯤 첫혼인을 하여 바로 첫딸을 낳았다면 고타소의 출생연도는 621-623년쯤일 것이므로 그 바로 아래 동생의 출생연도는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부인 문희의 소생으로는 후일에 문무왕(文武王)이 되는 법민(法敏)과 인문(仁問), 문왕(文王), 노단(老旦 또는 노차라고도 한다), 지경(智鏡), 개원(愷元)이 있었다.

  셋째부인 보희의 소생으로는 지원(知元), 개지문(皆知文)이 있었다.

  넷째부인 용태의 소생으로는 인태(仁泰)가 있었다.

  다섯째부인 용보의 소생으로는 거득(車得 또는 차득이라고도 읽는다), 마득(馬得)이 있었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 김춘추의 딸로는 맏딸 고타소가 있었고, 원효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있었고, 김유신에게 시집간 지조가 있었다.

 

  그런데 이후 그 형제들과는 달리 백제와의 전쟁이나 고구려와의 전쟁 기록 등에서 다른 아들들은 삼국통일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 반하여 유독 이 “문주”라는 이름 만은 사라지고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숙위 중에 죽었다는 기록도 없이 기록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따라서 653년에 구화산으로 들어간 김교각은 바로 김춘추가 당나라에 숙위로 남겨놓았던 "김문주"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648년에 당나라 장안에 가서 약 5년간 숙위하다가 24세 때인 653년에 이르러 지금의 서안을 떠나 안휘성 구화산으로 들어가 75년간 정진하다가 728년에 열반에 들었고, 등신불이 되자 지장왕보살로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가 왜 갑자기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 확실한 것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때쯤 귀국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반겨줄 어머니가 있는 것도 아니고(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는 자기를 낳다가 죽었으니......), 어머니 대신 많이 의지했을 누나 고타소 역시 642년에 이미 죽었으니 신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반겨줄 사람이 별로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때 문주는 인생이 무상하고, 권력이라는 것도 부질없는 것이고, 재물이라는 것도 부질없는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주는 신라로 돌아가는 대신 방향을 돌려 신라와는 반대방향에 위치한 지금의 안휘성 구화산으로 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잘 알고 있고, 중국 안휘성 구화산 화성사에 있는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 스님도 잘 알게 되었지만 이 두 사람 사이가 부자지간이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엉뚱하게도 김교각 스님이 삼국사기 기록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라왕자 김수충과 동일 인물이라고 하고 있었으니, 경주 불국사 무설전에 교각스님의 상이 말없이 서 있는 이유가 자신의 신분하나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못난 후손들을 보며 할 말을 잃어버린 때문은 아닐지..............   

 

 

[참고]

 

 

                                                           김교각동판(임오식본)

      

 

[지장보살 김교각 동판 명문]

                                                              

 

                                              場 十 十 髮 喬

                                          湧 閔 年 六 航 覺 年

                                      單 出 公 至 年 海 唐 下 大

                                  藏 起 無 惠 德 七 而 貞 生 道 地

                                  天 造 地 二 月 來 觀 人 場   藏

                                  神 寶 天 一 年 二 端 二 世 爲  菩

                                  所 塔 神 袈 七 十 坐 年 我 母  薩

                                  造 九 將 裟 月 夜 九 七 門 說  在

                                  之 龍 閔 不 三 成 子 月 之 法  大

                                  塔 戱 公 非 十 道 山 三 西 昇 

                                  至 珠 所 人 日 年 頭 十 新  

                                  今 之 拾 力 顯 九 七 日 羅 刹  山

                                  每 地 之 自 聖 十 十 生 國 天  西

                                  有 名 地 頂 起 九 五 永 王 佛  第

                                  光 九 一 神 塔 歲 載 徽 子 後  一

                                  明 龍 袈 通 大 入 至 四 姓 一千

                                  出 朝 裟 ○  興  定 開 年 金 五  海

                                  現 地  ○  ○  道  二 元 祝 名 百  是

 

 

김교각의 출생년도인 당 정관2년은 서기 628년이다.

김교각이 구자산(구화산)으로 간 영휘4년은 서기 653년으로서 26세 때이다.

열반에 든 개원16년은 서기 728년으로서 김교각이 생일인 730일까지 살지 못하고 720일에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99세에 입정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탑을 세운 지덕2년은 서기 757년으로서 김교각 입정 30돌 되는 해였다. 이때 당 숙종이 금인을 하사하여 그 덕을 기렸다. 따라서 입정 20년은 30년의 오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