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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동명왕(東明王)은 주몽이 아니라, 백제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를 말한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1. 16. 18:50

윤여동설 - 동명왕(東明王)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로서 백제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이다 - 최초주장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부여(扶餘)에는 북부여와 졸본부여 그리고 동부여가 있었다.

  부여(扶餘)는 원래 단군왕검의 막내아들 부여(扶餘)에게 봉해진 나라였다.

  따라서 그 후예들은 국호를 부여(扶餘)라 했고, 성씨도 부여(扶餘)씨로 자처하게 된다.

  그런데 2천여년 후 부여는 성씨가 다른 해씨 즉 해모수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해모수가 부여왕실과 무슨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解)씨를 성씨로 삼은 것을 보면 부여의 직계혈손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필자주 : 외손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이때 부여에 역성혁명이 일어나 부여씨에서 해씨로 왕실의 성씨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부여라는 국호는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위만이 조선의 준왕을 공격하여 왕검성을 빼앗아 왕위에 올랐으나 "조선(고조선)"이라는 국호는 그대로 사용한 것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다가 “동명(東明)”이라는 사람이 부여 땅 졸본부근을 차지하고 또 하나의 부여를 세우자 사람들은 해모수의 부여를 북쪽에 위치한다 하여 “북부여(北扶餘)”라 부르게 되었고, 동명왕이 졸본에 건국한 나라를 “졸본부여(卒本扶餘)”라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게 되자 북부여의 왕족인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으로 옮겨가 다시 부여를 재건하게 되는데, 역사적으로는 이를 동부여(東扶餘)라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의 원래 성씨는 “해(解)”씨로 나타나고, 호태왕 비문을 보면 북부여 천제의 자손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반해, 백제 온조왕의 성씨는 “부여(扶餘)”씨로 나타나는데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맨 먼저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세운다.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고 동명왕의 사당을 맨 먼저 세웠다는 것은 동명왕이 그의 자랑스런 조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동명왕이 세운 나라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를 보면 주몽은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혈손이고, 온조왕은 졸본부여 동명왕의 혈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따라서 졸본부여 동명왕의 성씨는 부여(扶餘)씨이고 옛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이었던 부여의 직계혈손으로서 해모수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동명이 졸본에 부여를 다시 세우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졸본부여와 백제가 옛 부여의 적통인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의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후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주몽을 동명성왕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중국 사서에는 동명을 부여의 건국시조로 기록하고 있어 우리의 역사 상식과는 확연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부여국 전을 보면,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의 땅이었다.

  옛날 북이 색리국(탁리국이라고도 한다) 왕이 출행을 하였는데, 그 시녀가 이미 임신되어 있음을 알았다.

  왕이 환궁한 후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로부터 큰 계란 만한 기가 나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임신이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

  왕이 시녀를 옥에 가두어 두었는데 그 후 곧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명을 내려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다시 마굿간으로 옮겼더니 말 역시 같았다.

  왕이 신의 뜻임을 알아차리고 그 어미의 청을 들어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려 다시 죽이려고 하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에 이르러 활을 물에다 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물위로 떠올랐다. 동명이 그를 타고 강을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부여는) 동이 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데, 토질은 오곡이 잘 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명이라는 사람이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아니라 분명하게 부여(필자 주 : 졸본부여를 말하는 것이다)의 건국시조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위 후한서 부여국전의 기록 중에 지리에 관한 것은 동부여에 관한 것이고, 동명설화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에 관한 기록이므로 중국 사가들도 매우 헷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라는 잘못된 기록을 보고는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이 곧 동명성왕이고, 후한서 부여국 조 기록 속의 동명도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과 동일인이라고 이해하게 되었고,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라는 잘못된 기록에 따라 주몽이 온조왕의 친아버지라고 이해함으로써 온조왕 원년 조의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라는 기록 역시 온조왕이 그 죽은 아버지인 주몽의 사당을 세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필자주 : 졸본부여 동명왕의 오기이다)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우태에게로 시집을 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 홀로 살았는데, 그 후 주몽이 부여(동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를 들어 왕비를 삼았다” 라고 기록함으로써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주몽은 처음에 동부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 졸본부여로 도망쳐 와서 아들없이 딸만 셋 있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했었고, 얼마 후 왕이 죽으면서 그 왕위를 주몽에게 물려주어 북부여 해모수의 혈손이 동명왕이 세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르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후 아들 둘 딸린 과부였던 소서노와도 재혼을 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주몽이 그 왕위를 동명왕의 후예인 비류나 온조가 아닌 자신의 친 아들 유리에게 물려주려 하자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을 떠나 진번 땅으로 옮겨와서 살게 된다.

  그러다가 주몽이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그 왕위를 해모수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신의 친아들 유리에게 물려주자, 온조는 졸본이 아닌 진번 땅에 동명왕의 졸본부여의 맥을 잇는 백제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온조왕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 그 어머니 소서노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주몽과 재혼을 했었기 때문에 잠깐 동안 양부와 양자 사이가 되기는 했지만 주몽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고,

  동명왕 또는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