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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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비류백제의 도읍 미추홀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10. 5. 3. 01:53

윤여동설 - 비류백제의 도읍 미추홀(弥鄒忽)을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이리하여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하니 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띠었고, 동쪽에는 높은 산맥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렇듯 천험의 지리적 잇점을 갖춘 곳은 얻기 어려운 지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를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니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

  비류의 미추(미추홀)는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土濕水鹹), 편히 살수가 없었다. (비류가) 돌아와 위례(위례성)를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고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 본문 중에 “비류가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沸流不聽 分其民歸弥鄒忽以居之)” 라고 기록되어 있는 걸로 보아 비류와 온조는 졸본에서 남하한 후 원래 미추홀에서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비류는 열 신하들이 추천하는 장소가 먼저 원래 살던 미추홀 보다 못하다고 판단하고 미추홀로 돌아갔기 때문에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류는 결과적으로 오판했고, 국가로서 성장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것인데 결국은 죽고 말았다. 비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울화병이 생겨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온조는 신하들이 도읍으로서 적당하다고 추천했던 장소인 위례성에 도읍했고, 비류는 그를 마다하고 바닷가로 가서 도읍했던 곳이 미추홀 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인데, 지금 우리는 이 미추홀이나 위례성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금을 통하여 우리 역사를 연구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 백제의 미추홀과 위례성의 위치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아직까지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하고 설왕설래만 거듭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권 제35 잡지 제4 지리2 율진군 조를 보면,

  “율진군은 원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과주(菓州)이다. 영현이 셋이다.

  곡양현은 본래의 고구려 잉벌노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검주이며,

  공암현은 본래 고구려의 재차파의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르며,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인주이다[경원이라고도 하고 매소라고도 하며 미추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고려 때의 인주(仁州)가 곧 옛 백제 때의 미추홀이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인천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다[또는 미추홀이라 한다].

  신라 경덕왕이 소성으로 고쳐 율진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수주에 붙였고, 숙종 때에 인예왕후 이씨의 본관이므로 경원군으로 승격시켰고, 인종이 또 순덕왕후 이씨의 본관이므로 지인주사로 고치고, 공양왕 2년에 경원부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로 만들었고,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인천)으로 고쳐 예에 의하여 군으로 만들었고, 세조 6년에 소헌왕후의 외가 고을이므로 승격하여 도호부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백제 미추홀의 연혁을 자세히 알 수 있게 하고,

  또 산천 조를 보면,

  “소래산은 부 동쪽 24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산이다.

  남산은 부에서 2리 되는 곳에 있다. 주안산은 부 북쪽 11리 되는 곳에 있다.............동방천은 부 동쪽 4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이 소래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 중 주안산(朱雁山)의 “주안(朱雁)”은 “붉은 기러기”라는 의미로서 산의 형상이 붉은 색 기러기 형상과 닮았다는 말이므로 인천 북쪽에서 붉은 기러기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을 찾으면 그 산이 바로 주안산일 것이고, 그 남쪽 11리에서 미추홀의 위치를 찾을 수 있고, 미추홀 부근의 산천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인천을 미추홀이라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의 인천에서는 백제 초기 유물은 단 한 점도 출토된 적이 없고, 비류가 도읍했던 왕성의 확실한 흔적도 역시 찾지 못하고 있으며, 인천 주안을 아무리 뒤져봐도 기러기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인천이 곧 백제의 미추홀이었다고 인식하고는 그곳에서 백제의 흔적을 찾으려 하고 있고, 미추홀에 대한 역사기록을 한반도 인천에 적용하여 해석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 짚은 것이다.

  대륙에 있는 미추홀을 한반도에서 찾고 있는 거니까.............

  위 사진이 바로 필자가 찾아낸 인천 북쪽 11리에 있었다는 주안산의 모습이다.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주안산(朱雁山)”이라 이름 붙일 만 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한반도 인천 주안에 이름 만이 아닌 실제 붉은 기러기 비스므레한 형상이라도 나타나는 산이 있는가?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비류백제의 도읍 미추홀(인천) 북쪽 11리에 있는 주안산을 처음으로 구경한 것입니다.

  감상이 어떠신가요?

  기러기 머리 모양으로 보이기는 하나요?

  부리도 보이고, 눈도 보이고, 머리도 보이는데.......... 

  그런데 위 기러기 머리형상의 산은  부아악으로 비정되는 곳의 서쪽 방향에서 찾아낸 산의 형상입니다.

  필자가 엉터리 구글사진을 대륙 어느 구석에서 찾아내 블로그에 올려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것이 우리 역사의 진실인 것 같나요? 

  착시현상이고 우연일 뿐 필자가 필자 입맛에 꿰맞추기 위해 기러기 머리모양으로 보이지도 않는 산을 억지로 기러기 머리형상이라고 우기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 또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필자는 부아악을 먼저 찾은 후 서쪽 방향으 로 가서  미추홀을 비정하게 되었고, 미추홀의 지세가 과연 기록을 충족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미추홀의 북쪽에서 붉은색 기러기 머리 형상의 산을 찾았는데, 그것이 단순한 우연일 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