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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위례성 - 하남위례성 - 남한성 - 한성 - 북한성의 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9. 6. 08:48

윤여동설 - 백제의 위례성 - 하남위례성 - 남한성 - 한성 - 북한성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 최초주장

 

                                                       [백제 한산 부아악 추정지]   

 

  삼국사기 기록 중 백제의 위례성, 하남위례성, 남한성, 한성, 북한성의 관계에 관한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백제의 도읍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사람마다 주장들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弥鄒忽)로 돌아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역을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는데,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고 기록함으로서 비류가 세운 나라의 도읍은 미추홀이었고, 온조십제의 최초 도읍은 하남위례성이었다고 기록했는데,

  같은 책 온조왕 재위 8년(B.C.11) 조를 보면,

  “봄2월 말갈 적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했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더니 열흘이 지나자 적들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는데 왕이 정예병을 뽑아가지고 대부현까지 쫓아가서 단번에 이기고 적병 5백명을 죽이고 사로 잡았다” 라고 도읍을 하남위례성이 아닌 위례성(慰禮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보면 결국 하남위례성이라는 말은 한수의 남쪽에 건설한 위례성 즉 위례성의 북쪽에 강(한수)이 흐르고 있었다는 의미로서 온조십제 첫 도읍의 원래 명칭은 “위례성(慰禮城)”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위례성은 그 지명 만을 표시한 것이고, 하남위례성은 그 지리적 위치와 지명을 함께 표현했다고 보면 하남위례성이나 위례성은 결국 동일한 장소를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왕력편 백제 조를 보면,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혹은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이다. 병진년(B.C.5)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매우 헷갈리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기록만을 보면, 위례성이 직산이고, 새로 옮긴 한산을 광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데, 잘못 기록된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직산이나 인주(미추홀), 광주라는 지명 때문에 한반도 천안 직산의 위례성과 아산 인주면 또는 인천, 경기도 광주에 옛 기록을 대입시켜 해석하고는 그곳을 발굴하여 백제 초기 역사를 밝혀보려 하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건국지를 한반도로 착각하여 빚어낸 해프닝일 뿐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병진년(B.C.5년)에 온조왕이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한수의 남쪽 땅으로 옮긴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매우 혼란스럽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재위 13년(B.C.6) 조를 보면,

  “여름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사태가 불안하므로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의 남쪽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구히 평안할 계책을 도모해야겠다’ 하였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라고 기록함으로써 위례성으로부터 한수의 남쪽 땅으로 도읍을 이전하려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영역을 획정하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까지요,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까지로 했다.

9월 성을 쌓고 대궐을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온조백제의 초기강역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온조백제의 초기강역]

 

                                   패하(패수)


 

 

       대해                      남한성                    주양

 

 
 

                                    웅천

 

 

☆ 중국 사서들에는 한결같이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위 14년(B.C.5) 조를 보면,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가을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그곳에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함으로써 이때 도읍을 위례성으로부터 한수 남쪽으로 옮겼음을 알게 하는데, 한성에 관한 첫 기록이다.

  따라서 이때는 위례성으로부터 새로 옮긴 도읍을 “한성(漢城)” 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많은데, 이곳이 곧 남한성으로서 후일의 광주이다. 

 

☆ 삼국사기를 보면, 열 명의 신하들이 부아악에 올랐을 때 비류와 온조에게 도읍지로서 적당하다고 추천했던 곳의 지형은 ‘북대한수(北帶漢水)로서 북쪽으로 한수가 띠를 두른 것처럼 흐르고, 동거고악(東據高岳)으로서 동쪽에는 높은 산맥이 있으며, 남망옥택(南望沃澤)으로서 남쪽에는 넓은 평야가 있고, 서조대해(西阻大海)로서 서쪽에는 큰 바다가 있다’고 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 상을 보면, “남이한강위금대(南以漢江爲襟帶)”라고 기록하여 조선의 도읍 한성은 남쪽에 한강이 띠를 두른 것처럼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 한수의 남쪽에 위치했던 백제의 초기 도읍 위례성과 한강의 북쪽에 위치했던 조선의 도읍 한성은 그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재위 17년(B.C.2) 조에는, “봄에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온조왕이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난 후에 낙랑이 침공하여 옛 도읍 위례성을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13대 근초고왕 26년(A.D.371) 조를 보면,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에는 ”신미년(A.D.371)에 도읍을 북한산(北漢山)으로 옮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는 한산으로 옮겼다고 하고, 삼국유사는 북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

 

☆ 백제가 북한산성을 처음 쌓은 때는 4대 개루왕 5년인 서기 132년이다.

 

  도대체 백제의 첫 도읍이 위례성이라는 것인지 하남위례성이라는 것인지, 온조왕이 옮긴 도읍이 한성이라는 말인지 남한성인지 명확하지 않게 기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헷갈렸던 것이다.

  그리고 근초고왕은 371년에 한산(필자주 : 북한산의 오기일 것이다)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역사에서는 이곳이 백제의 세 번째 도읍 한성(漢城), 고려의 남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백제에 "한산(漢山)"이라는 큰 산이 있었고, 온조왕이 위례성으로부터 한산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성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른 후 근초고왕이 다시 북한산으로 도읍을 옮기고 또 한성이라 불렀다면 당시 백제 사람들은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한성(漢城)을 남한성(南漢城)과 북한성(北漢城)으로 구분하여 불렀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백제 중엽(근초고왕 때를 말함) 도읍을 한산으로부터 옮겨왔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는 기록과 상충된다. 한산에서 다시 한산으로 옮겼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온조왕이 위례성으로부터 남쪽으로 옮긴 도읍이 한산남쪽의  남한성이었고, 근초고왕이 다시 남한성으로부터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의 북한성(한성)으로 옮겼다고 보면 혼란스러울 이유가 없다.

  따라서 백제에는 한산이라는 큰 산이 있었고 그 북쪽에 북한산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조의 건치연혁을 보면,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이었는데, 백제의 온조왕이 빼앗아 성을 쌓았으며, 근초고왕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5년을 지나 개로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장수왕이 와서 도성(한성,북한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필자주 :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아니라 사실은 동복동생이었다) 문주왕이 도읍을 (한성,북한성으로부터) 웅진으로 옮겼다.

  후에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정하고, 진흥왕 재위 18년에 북한산주의 군주를 설치하고, 경덕왕이 한양군이라 고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산의 남쪽을 남한산, 한산의 북쪽에 북한산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온조왕이 위례성으로부터 한수 남쪽으로 옮겼다고 기록된 도읍은 한산의 남쪽 남한성이었고, 근초고왕이 옮긴 도읍은 북한산에 위치한 한성(북한성)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광주목(廣州牧) 조의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 온조왕 13년(필자주 : 사실은 온조왕 14년 정월이었다)에 위례성으로부터 이곳(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성[한성,북한성, 호태왕 비문에 나타나는 하평양과 동일한 곳이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중국 사서들에는 고구려의 별도로서의 한성(漢城: 북한성을 말하는 것이다)이 나타난다]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어 백제의 초기도읍을 위례성으로 기록하고 있고, 온조왕이 한수 남쪽으로 옮긴 도읍이 남한성 임을 알 수 있으니 한산과 북한산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각각 백제의 도읍성이었다.

결국 근초고왕은 한산의 남쪽에 위치했던 남한성에서 북한산에 위치한 한성(북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된다.                                    

  이렇듯 여러 기록들을 검토해 본 결과 어느 기록도 완벽하지 않은 채 조금씩의 오류가 있었는데, 종합하여 정리한다면 아래와 같다.

 

  첫째, 온조십제의 초기 도읍지는 위례성(慰禮城)으로서 그 북쪽에 한수가 흘렀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온조십제의 첫 도읍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기록했던 것은 위례성이 한수(漢水)의 남쪽에 위치했었다는 의미로서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은 동일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었다.

한수는 위례성의 북쪽으로부터 위례성 동쪽을 돌아 남쪽으로 흘렀다.

 

  둘째, 온조왕이 한수남쪽(위례성보다 한수의 하류에 위치한다는 의미이지 한수를 건넌 그 남쪽이라는 의미가 아니다)으로 옮긴 도읍은 한산 남쪽의 남한성이었고, 이곳이 후일 광주(廣州)가 되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우리는 지금까지 온조왕이 위례성으로부터 한수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 때문에 원래의 위례성은 하북위례성이었고, 새로 옮긴 곳이 하남위례성으로서 한수를 기준으로 그 북쪽에 위례성이 위치하고, 한수 남쪽에 온조왕이 새로 옮긴 도읍 하남위례성이 위치했을 것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이는 기록을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 

 

  셋째,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죽이며 승리한 후 도읍을 한산 남쪽의 남한성에서 북한산에 위치한 한성(북한성)으로 옮겼는데, 이는 도읍을 고구려에 가깝게 북쪽으로 전진시켜 배치했던 것이고, 이 한성(漢城)은 후일 고려의 남경이 되었다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