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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민중왕의 능이 조성된 석굴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9. 26. 23:58

윤여동설 - 고구려 민중왕의 능이 조성된 석굴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하북성 적성현 양전향에 있는 백운산 구련동]

 

[북경 서북쪽 연경 고애거]

 

 

  민중왕은 고구려 제4대 왕이다.

  3대 대무신왕이 서기 44년 10월에 41세의 나이로 죽고, 대무신왕의 아들로서 태자로 봉해져 있던 해우[해애루라고도 한다. 5대 모본왕]가 너무 어려 정사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태자의 숙부였던 해색주가 대신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민중왕이다.

  그 형인 대무신왕이 41세에 죽었으므로 민중왕이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는 약 35-40세 쯤이 되었을 것인데, 재위 5년인 서기 48년에 죽었다.

  대무신왕이나 민중왕 모두 40대 초반에 죽었으니 형제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민중왕은 죽은 후 고구려 역사상 유일하게 능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고, 민중원이라는 곳에 있던 석굴에 장사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 조를 보면,

 “4년(A.D.47) 여름4월 왕이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7월에 또 사냥을 하다가 석굴을 보고 측근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기에 장사지낼 것이며 따로 능묘를 만들지 말라’ 하였다”

  “5년(A.D.48) 왕이 죽었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호를 민중왕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민중왕의 능이 민중원에 있는 석굴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민중원(閔中原)”이라는 곳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민중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였는데, 왕이 자주 사냥을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민중원이라는 곳은 도읍인 국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다. 

  지금 학자들은 고구려의 국내성이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집안이라 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인식대로라면 민중왕의 능은 집안 부근에 조성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북쪽 연경 영녕진(永寧鎭)이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초기 왕들의 능과 민중왕의 능도 당시 도읍인 국내 즉 지금의 연경 영녕진(永寧鎭)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연경에는 선사인들이 석굴을 파고 살았다는 고애거라는 석굴도 있고, 적성 양전향에도 석굴이 있는 것이다.

  이곳이 정말로 고구려 민중왕석굴릉이라면, 우리의 역사강역은 요하, 대릉하, 난하, 조하, 백하(조백하)를 건너 북경 부근까지로 매우 넓어지게 되고, 고구려의 역사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 사진을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