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유리를 말함)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남쪽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살만한 곳을 살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에는,
“고전기(古典記)에 이르기를, ”동명왕의 세째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에 도읍을 한산(漢山:지금의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 때인 함안 원년에 고구려의 남평양성을 빼앗은 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지금의 양주)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이 즉위하던 원희3년 을묘년에는 도읍을 웅천(지금의 공주)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대 성왕 때에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여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전기라는 책을 인용하여 백제의 역사를 간략하게 약술하고 있는데 지금 고전기라는 책은 전해지지 않았다.
☆ 비류와 온조를 주몽왕의 아들이라거나 온조가 동명왕의 셋째 아들 또는 비류는 우태의 아들이고 온조는 주몽왕의 아들이라 하는 것 그리고 주몽을 동명왕이라 하는 것 등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주에,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우태에게로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 홀로 살았는데,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건소2년 봄 2월에 남쪽지방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를 들어 왕비를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하게 대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여겼었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류가 와서 태자로 봉해지고 그 후 주몽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을 때에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서 나라의 위업을 성취하도록 도와 주었으니 어머니의 성력과 공로가 많았었다. 그런데 대왕께서 세상을 버리신 후 나라가 유류에게 귀속되니 우리들이 공연히 여기에서 몸에 군더더기 살처럼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지방으로 가서 땅을 마련하여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하고는 드디어 그 아우와 함께 무리들을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즉 비류와 온조는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로서 우태가 죽고난 후 그 어머니인 소서노가 주몽왕과 재혼함으로서 주몽과 한때 양부와 양자 사이가 된 적이 있었으나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졸본을 떠나면서 이들의 인연은 끝났던 것이다. 다만 이 기록 중에서도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인 우태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는 기록은 또 잘못된 것으로서 우태는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손자였고, 비류와 온조는 동명왕의 증손자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왕실의 성씨를 고구려 왕실의 성씨인 해(解)씨나 고(高)씨라 하지 않고 부여(扶餘)씨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