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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황산벌전투와 계백장군

윤여동 2011. 7. 20. 20:48

윤여동설 - 황산벌전투와 계백장군  

 

 [한반도 충남 논산시 부적면에 조성되어 있는 가짜 백제 계백장군묘]

 

  백제장군 계백에 대하여 전해진 기록은 삼국사기 계백열전(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의,

『계백은 백제 사람인데, 벼슬이 달솔(백제 16관품 중 2품)에 이르렀다. 당 현경5년 경신년(A.D.660)에 (당) 고종이 소정방으로 신구도대총관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를 쳤다.

  이때에 계백이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명을 뽑아서 이를 방어하게 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한 개 나라로서 당나라, 신라의 대병과 마주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가늠할 수 없다. 나의 처자가 사로잡혀 노비가 될까 염려되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결연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는 드디어 자기의 처자를 다 죽여버리고, 황산들(黃山之野)에 이르러 세 개의 진을 치고 있다가 신라군사를 만나 그들과 싸우려 할 때에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월왕)은 5천명의 군사로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들 각자가 용기를 내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하였다. 곧 전투에 돌입하였는데 일당 천의 각오로 임했으므로 신라군사가 퇴각하였다. 이렇게 진퇴를 네 번이나 하였으나 결국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다』라는 기록과,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와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조의 황산벌 전투 상황 기록 그리고 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춘추공 조의 황산전투에 관한 기록 중에 계백장군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기록을 보면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이 신라를 출발하여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사비 남쪽 기벌포에서 합류하기 위하여 서기 660년 7월 9일 황산벌판(黃山之原)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계백장군이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요해지를 차지하고 세 군데에 군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5천의 백제군과 5만의 신라군이 황산벌판에서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 네 번의 전투에서 숫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이 패하게 된다.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항전하는 백제군을 신라군이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신라장군 김흠순의 아들 반굴과 김품일의 아들 관장(관창이라고도 한다)의 희생을 본 신라군사들이 용기를 내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서 백제의 5천결사대와 함께 계백장군도 전사하고 만다. 

  그렇게 하여 신라군은 황산벌을 통과하여 당나라군과 사비성의 남쪽 기벌포에서 합류할 수 있었고, 두 나라 군사가 연합작전을 펼쳐 백제의 도읍 사비성을 함락 시키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백제는 678년 동안 존속했던 그 왕조의 문을 닫게 된다.

 

  계백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했던 백제의 마지막 장군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멸망 당한 나라의 장수였던 관계로 삼국사기는 계백장군의 성씨가 무엇인지, 출신지가 어디인지 등 그의 신상이나 성장배경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기록하여 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공주목 부여현 인물 조를 보면, 성충, 흥수, 복신, 흑치상지, 지수신 등과 함께 계백장군이 이 지방 출신이라고 적고 있어, 계백장군이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사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신증문헌비고의 기록을 보면, 계백(階伯)에 대하여, "이름은 승(升), 백제와 동성(同姓)"이라 되어 있어 "부여씨(扶餘氏)" 임을 알게 하고, 그의 성명이 "부여승(扶餘升)"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조상, 가족관계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한반도 충남 논산시 부적면에 가면 계백장군의 묘라고 하는 곳도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계백장군은 군인의 표상으로서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충남 논산 연무대에 육군훈련소가 있는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조선시대 안정복은 계백장군에 대하여그의 저서 동사강목 제4상 의자왕 조의 주에서,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영을 설치한 것은 지(智)요, 전투에 임해서 맹세한 것은 신(信)이요, 네 번 싸워 이긴 것은 용(勇)이요, 관창을 잡았다가도 죽이지 않은 것은 인(仁)이며, 두 번째 잡았을 때 그 시신을 돌려보낸 것은 의(義)요, 중과부적으로 죽은 것은 충(忠)이다. 삼국시대에 충신과 의사가 많았지만 마땅히 계백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가을에는 가족과 함께 충남 논산시에 가서 계룡산을 바라보며 포실포실한 상월 명품고구마를 맛보고, 노성의 명재 윤증 고택을 구경하고 명문가에서 비전된 기술로 만들어진 교동간장, 교동된장을 사고, 연산으로 가서 대추를 산 후 연산순대국밥으로 점심을 먹고, 계백장군묘, 군사박물관을 구경하고 탑정호(매우 넓고 주변에 민물매운탕, 붕어찜을 파는 식당들이 많아 민물생선을 좋아한다면 점심을 이곳에서 먹어도 좋다)를 돌아 나오며 관촉사 미륵불 앞에서 소원을 빌고, 강경에 들러 천주교성지와 옥녀봉에 올라 옛 강경포구를 조망하고 내려와 유명한 강경젓갈을 사서 차에 실어 놓고, 저녁에는 황산벌전투재현 행사를 구경하고 맛 좋은 논산배를 한 박스 사서 돌아온다면 하루 해가 짧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