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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가 왜국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윤여동 2011. 12. 30. 22:54

 

윤여동설 - 신라가 왜국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해동역사 권제41 교빙지9 통일본시말 응신천황 22년 조를 보면,

  “신라병이 일본 깊숙이 침공하여 명석포에 이르렀는데 대판에서 1백리 떨어진 곳이다. 일본인이 화친을 청하고 백마를 잡아 맹세하였다. 적관의 동쪽인데 지금까지도 백마총이 있다(新羅兵攻日本深入明石浦 距大坂百里 日本人請和刑白馬盟 于赤關之東至今尙有白馬塚)”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사실은 항복했다는 말이고, 예로부터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뿌리며 맹세를 하는 것은 항복의 증표로서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지신명에게 약속하는 의식이었다.

 

☆ 해동역사 외에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경직의 부상록,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김세렴의 해사록 등에도 일본연대기의 기록을 인용한 신라의 일본정벌기록이 들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성이사금 11년(A.D.412) 경에 신라가 왜국을 깊숙히 침공하여 들어가 응신천황으로부터 항복을 받았고, 그 약속의 표시로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땅에 묻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일 수 있는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일본서기 응신천황의 재위년도가 약120년 상향 기록되어 있으므로 응신천황 22년은 서기 412년 경이 되어 신라 18대 실성이사금 11년 경에 해당한다.

 

  신라 18대 실성이사금은 내물왕 37년(A.D.392)에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내물왕 말년에 내물왕이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이 되자 401년 7월에 신라로 돌아왔고, 402년 2월에 내물왕이 죽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에 힘입어 내물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18대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왕위에 오르자 동남쪽에 위치한 왜국과도 통호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는데, 재위 4년(A.D.405)에 이르러서는 신라와 왜국 간에 갈등이 생겨 두 나라간의 우호에 금이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

  다만 호태왕비문 영락 14년(A.D.404) 조를 보면, 이 해에 왜와 백제(백잔)가 연합하여 대방을 치다가 광개토왕에게 처절하게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보면 이때 왜국과 백제가 연합하여 대방을 침공하면서 신라에게도 연합할 것을 요청했으나 신라가 그 요청을 거부하고 거꾸로 고구려를 지원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405년 4월에 이르자 왜군이 신라를 침공하여 명활성을 공격하고, 407년 봄에 다시 왜국이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공하고 또 같은 해 6월에도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범하는 것이다.

  또한 408년에 이르러서는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비축하여 신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실성왕이 정예병을 선발하여 먼저 대마도를 치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는데, 412년에 이르러 실성왕은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때 신라가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한층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데, 바로 이해에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여 왜국의 항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많은 기록들은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여 항복을 받은 해를 신해년(辛亥年)이라고 하는데, 신해년은 서기 411년으로서 실성왕 10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보면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때 신라의 실성왕은 고구려에 복호를 볼모로 보내 놓은 후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왜국을 침공하여 항복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러다가 18대 실성왕이 417년에 죽고 19대 눌지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눌지왕 2년(A.D.418)에 왕의 아우 복호가 고구려로부터 제상나마와 함께 돌아왔고, 왜국에 볼모로 보내졌던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으로부터 도망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에서 복호를 돌려보낸 것과 왜국에서 미사흔이 도망해 온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인데, 이때 신라와의 관계가 좋았던 고구려에서는 눌지왕의 동생 복호를 돌려보내 주었다는 말이 되고,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왜국에서는 미사흔을 인질로 잡고 돌려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눌지왕은 박제상에게 왜국으로 가서 인질로 잡혀 있는 왕의 아우를 탈출시켜 데리고 오라는 밀명을 내렸고 그 명을 받은 박제상은 신라에서 죄를 짓고 정치적 망명을 하는 척하며 왜국으로 가서 왕의 아우인 미사흔은 탈출시켜 신라로 보내고, 자신은 왜국에 잡혀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 삼국유사 기이 제1 내물왕과 김(박?)제상 조에 이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실제로 신라가 왜국을 정벌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실성왕 때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여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해동역사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 : 일본연대기) 등에 그러한 기록이 들어 있고, 그 역사의 현장인 백마총도 있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