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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차지한 시기는? -최초주장

윤여동 2012. 1. 20. 12:18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차지한 시기는? - 최초주장

 

 

 

  지금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후연으로부터 완전히 빼앗아 차지한 시기를 놓고 영락5년(A.D.395) 이전이다 이후다 하면서 논쟁들을 하고 있는데, 기록들을 꼼꼼하게 검토해 보면 그 정확한 시기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2년(A.D.385) 조를 보면,

  "여름6월에 왕이 군사 4만명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앞서 연나라왕 수(모용수)가 대방왕 좌로 하여금 용성을 진무하게 하였는데, 좌는 우리 군사가 요동을 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 학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이들을 쳐부수고 드디어 요동과 현토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11월 연나라 모용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군과 현토군 두 군을 회복하였다.

앞서 유주, 기주 유민들이 다수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 방연을 요동태수로 임명하고 그들을 끌어들여 안무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양서 권54열전 제48제이 고구려 조를 보면, “孝武 太元十年 句驪攻遼東玄菟郡 後燕慕容垂遣弟農伐句驪 復二郡 垂死 子寶立 以句驪王安爲平州牧 封遼東帶方二國王 安始置長史司馬參軍官 後略有遼東郡(효무제 태원 10년(A.D.385)에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침공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아우 모용농을 보내 두 군을 회복하였다.

모용수가 죽고 그 아들 모용보가 왕위에 올랐다.

구려왕 안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 대방 2국왕으로 봉했다. 안이 비로소 장사, 사마, 참군의 관직을 설치한 후 요동군을 경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와 전연 사이에 요동군과 현토군을 놓고 뺐고 빼앗기는 각축전을 펼쳤음을 알게 하는데, 역사적으로 모용수는 396년에 죽었고, 모용보가 그 뒤를 이어 396년부터 398년까지 후연의 왕위에 재위했다.

한편 이 무렵 고구려도 고국양왕이 죽고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연나라와 고구려는 북방의 패자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양서의 기록을 해석할 때,

  “孝武 太元十年 句驪攻遼東玄菟郡 後燕慕容垂遣弟農伐句驪 復二郡(효무제 태원10년 구려가 요동군과 현토군을 침공해 왔다. 후연의 모용수가 그 동생 모용농을 보내 구려를 정벌하여 두 군을 회복했다)” 라는 조문은 태원 10년이라는 연호가 명기되어 있으므로 서기 385년의 일이고,

  “垂死 子寶立(모용수가 죽고 그 아들 모용보가 왕우에 올랐다)” 라는 조문은 모용수가 396년에 죽고 그 아들 모용보가 왕위를 이었으므로 서기 396년의 일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의 기록인,

  “以句驪王安爲平州牧 封遼東帶方二國王 安始置長史司馬參軍官 後略有遼東郡(구려왕 안으로써 평주목을 삼고 요동, 대방 2국왕으로 봉했다. 안은 비로소 장사, 사마, 참군의 관직을 설치하고 이후 요동군을 경략하였다)라는 기록이다.

  바로 직전기록이 “垂死 子寶立 즉 모용수가 죽고 그의 아들 모용보가 왕위에 올랐다” 라는 기록이므로 바로 직전기록에 연결시켜 해석할 경우 구려왕 안에게 작위를 준 사람이 모용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광개토태왕에게 “평주목 요동대방2국왕”이라는 작위를 준 사람이 모용보였고, 시기는 그가 후연의 왕위에 오른 서기 396년경이었을 것으로 역사를 해석했었다.

  그러나 호태왕비문 영락 5년(A.D.395) 조 비려정벌기사를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에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세 개 부(部)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하였다. 양평(襄平) 길을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力城), 북풍(北豐)을 거쳐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보면 395년에 이미 고구려가 양평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고, 양평은 요동군에 소속된 한 개의 현으로 나타나는데, 호태왕 비문을 보면 이때 양평이 고구려의 국경지역에 해당하는 곳이었다고 했다.

  이때 고구려는 요동군 전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일부인 양평현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이때 요동군 양평현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광개토태왕이 양평을 지나 사냥도 하고, 국경도 구경하면서 역성, 북풍을 경유하여 황성(평양성부근)으로 개선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395년 비려정벌 이전에 이미 요동군의 1개현인 양평은 후연으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이 요동군과 대방군을 완전히 차지한 때는 언제였을까?

  고구려와 후연은 385년 이후 한동안 전쟁 기록이 보이지는 않으나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그러다가 400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후연에 사신을 보냈으나, 국서의 내용이 거만하다하여 2월에 이르러 후연왕 모용성이 스스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신성, 남소 두 성을 함락시키고 7백여리의 땅을 빼앗은 후 수비군을 두고 철군하게 되고, 그러자 광개토태왕이 402년에 후연의 수비군을 치게되고, 수비군이었던 평주자사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도망치게 되어 고구려가 그 땅을 다시 회복하게 되고,

  404년 겨울 11월에 이르러 광개토태왕이 다시 후연을 공격한다.

  그러자 405년 봄 정월에 후연의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 시키지 못하고 돌아갔고,

   406년 겨울12월에 후연왕 모용희가 거란을 침공했다가 거란의 군사가 많을 것을 보고는 목표를 바꾸어 고구려의 목저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한다.

  이를 보면 이때까지도 고구려와 후연은 여전히 적대적인 관계였음을 확인해 볼 수 있고, 405년에 모용희가 요동성을 침공했다는 것은 이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성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요동군을 후연으로부터 완전하게 빼앗은 시기는 404년 11월 광개토태왕이 후연을 침공했을 때일 것이다.

  그리하여 후연의 모용희가 두 달 뒤인 405년 정월에 빼앗긴 요동군을 탈환하기 위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여 요동성을 공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장악한 시기는 404년 11월로 확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이 대방군을 완전하게 장악한 때는 또 언제였을까?

  이는 호태왕 비문 영락 14년(A.D.404) 갑진년 조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호태왕 비문 영락 14년(A.D.404) 조를 보면, 이 해에 왜가 대방 경계를 넘어 백잔(백제)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자 광개토태왕이 몸소 출전하여 그를 물리쳐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필자는 이때 광개토태왕이 대방군을 완전하게 장악한 후 그 여세를 몰아 11월에 요동군도 장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대방군은 404년 봄 또는 여름에 장악했을 것이고, 요동군은 404년 11월에 장악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후연은 408년에 모용희가 풍발에 의해 제거되고 모용운(고운)이 후연의 왕위에 추대되는데, 이때 광개토태왕은 후연에 모용운(고운)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 화해의 손짓을 하게 되고,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서 후연의 왕위에 올랐던 모용운(고운)도 그에 대한 화답으로 시어사 이발을 답례사신으로 고구려에 파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때 모용운(고운)이 광개토태왕에게 평주목, 요동대방2국왕이라는 작위를 보내왔을 것으로 본다.

  작위라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땅에 대한 통치권을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문안이 매우 중요한데, 이때 모용운(고운)이 광개토태왕에게 “평주목, 요동대방2국왕”이라는 작위를 보냈다는 것은 평주와 요동군, 대방군을 고구려의 땅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재위기간이 396-398년으로서 이미 죽은 후연의 모용보가 다시 살아나 404년에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차지한 요동군과 대방군을 인정하고 작위를 보내왔을 리는 없는 것이고, 또 모용보, 모용성, 모용희까지 고구려와 후연은 매우 적대적인 때였으므로 이러한 때에 후연에서 적대국인 고구려왕에게 요동군과 대방군 등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작위를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에게 “평주목, 요동대방2국왕의 작위를 주었다”는 기록은 모용보 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사실은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고구려와 화친했던 시기였던 후연의 모용운(고운)이 광개토태왕에게 작위를 보냈던 기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