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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문무왕비 자의왕후는 정말 말더듬이였을까?

윤여동 2013. 1. 20. 07:52

 

윤여동설 - 신라 문무왕비 자의왕후는 정말 말더듬이였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30대 문무왕 조를 보면,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니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라고 되어 있고,

  31대 신문왕 조를 보면,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정명이요 문무대왕의 장자이다. 어머니는 자의[慈儀, 儀를 혹은 義로도 쓴다]왕후요, 왕비는 김씨이니 소판 흠돌의 딸인데 왕이 태자가 되었을 때에 장가를 들었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고, 후에 그 아버지의 반란[김흠돌의 난]에 연좌되어 출궁당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 제30대 문무왕 조를 보면,

  “비는 자의(慈義)이니 눌왕후(訥王后)라고도 하는데 선품해간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왕력 제31대 신문왕조에는 “신문왕의 아버지는 문호왕(문무왕), 어머니는 자눌왕후(慈訥王后)” 라고 기록되어 있어, 문무왕의 왕비가 자의(慈儀 혹은 慈義]왕후였음은 확실하고, 또 눌왕후 혹은 자눌왕후라고도 불렀음을 알게 한다.

 

☆ 삼국유사 왕력 제30대 문무왕 조와 왕력 제31대 신문왕 조에는 같은 책인데도 눌왕후(訥王后)와 자눌왕후(慈訥王后)”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 자의왕후를 “눌왕후(訥王后)” 또는 “자눌왕후(慈訥王后)”라고도 했다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눌(訥)”이라는 것은 “말이 어눌하다” “말을 더듬는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문무왕비 자의왕후가 실제로 말을 더듬더듬했었는지, 아니면 말을 잘 하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었는지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왜 역사는 자의왕후를 “눌왕후(말더듬이왕후) 또는 자눌왕후(자애롭고 과묵한왕후)”라고도 불렀다는 기록을 남긴 것일까?

 

  앞서 김유신의 조카인 김흠돌이 자의를 보고 그 미색에 반하여 자의를 첩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 후에 법민(문무왕)이 자의를 태자비로 삼게 되자 김흠돌은 자의가 태자비로서 부적당하니 폐하고 김유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야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만약 자의가 진짜로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면 태자비로서 부적당하다는 김흠돌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심각할 정도로 말을 더듬지 않았다면 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말을 약간 더듬는다는 것만을 약점으로 잡아 인신공격을 한다는 것은 심한 처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의는 29대 태종무열왕이 죽고 30대 문무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신라의 왕비가 되었고, 그녀의 큰 아들인 왕자 정명(후일의 31대 신문왕)이 태자로 봉해지자 김흠돌은 옛날 자신이 한 행동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딸을 태자인 정명과 혼인시켜 태자비로 만들게 되지만, 정작 태자인 정명은 김흠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녀는 허울만 태자비였을 뿐 독수공방을 해야 했을 것이고, 아들을 잉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정명이 할머니인 문명태후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김흠돌의 딸과 혼례를 치루기는 했으나 옛날에 자신의 어머니 자의왕후와 김흠돌간에 있었던 일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흠돌의 딸을 멀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아들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하여 그렇게도 험담을 해대던 사람의 딸과 혼인을 하고 싶었을까?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30대 문무왕이 죽고 31대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김흠돌의 딸은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정작 남편인 신문왕은 여전히 그녀를 찾지 않는다.

  그러자 소판 김흠돌이 파진찬 흥원과 대아찬 진공 등과 함께 모반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잡혀 죽게 되고, 김흠돌의 딸인 신문왕의 첫 왕비 역시 역적의 딸이라 하여 궁중에서 폐출되고 마는 것이다.

  문무왕비 자의왕후와 김흠돌 간의 악연 때문에 그 2세들인 신문왕과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에게까지도 악연이 이어졌고, 결국은 실패한 모반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이를 무어라 해야 할까?

  그렇지만 자의왕후가 비록 말을 조금 더듬었거나 혹은 너무 말이 없는 과묵한 성품이었다고 하더라도 미모는 아주 빼어났던 듯하고, 마음씨 또한 자애롭고 몸가짐도 반듯했던 듯하다.

  이는 그녀가 죽자 신라의 대신들이 그녀의 시호를 자애롭고 위엄과 절도가 있었다는 의미인 “자의(慈儀)” 또는 “자의(慈義)”라고 정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는 이렇듯 말없고 묵묵한 자의왕후의 내조가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