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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마한의 월지(금마저)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豊潤) - 최초주장

윤여동 2014. 8. 24. 09:16

 

윤여동설 - 마한의 월지(금마저)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豊潤) - 최초주장

 

 

 

 

 

 

 

 

  마한의 도읍 “월지(月支)”는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월지”라는 곳은 우리 고대 역사에서 유서깊고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는 곳 중 하나이다.

  월지는 옛날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급히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쳐 와서 마한의 월지국(月支國)에 다시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한(韓 : 마한이라 했다고도 한다)이라 했다는 곳이다.

  그러다가 200여년이 지난 서기 8년에 백제 온조왕에게 도읍이었던 월지(月支)를 빼앗기게 되는데, 온조왕은 그곳 월지(月支)의 지명을 새로이 금마저(金馬渚)라 명명하게 됨으로써 “금마저(金馬渚)”가 역사서에 기록되기 시작하고 마한은 그 다음해에 멸망하게 되고, 그 땅은 백제 땅이 되었다가, 다시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 땅이 된다.

  그랬다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귀족 안승이 신라로 귀순해 오자 신라 문무왕은 그를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고는 그를 봉하여 고구려왕으로 삼았다가 4년 뒤 보덕왕(報德王)으로 바꾸어 봉한다. 이때 신라 문무왕은 멸망한 고구려의 망명정부를 옛 백제 땅 금마저에 세우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문왕 때에 이르자 보덕왕 안승을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금성으로 불러들이자, 안승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이 반역을 도모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광경을 목격한 금마저의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난을 평정한 신문왕은 그곳 고구려 유민들을 나라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는 금마저를 금마군(金馬郡)으로 바꾸게 되고, 고려 충혜왕 때는 익주(益州)로 승격된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 한(韓) 전을 보면,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는 바다로서 한계를 삼고 남쪽으로는 왜와 접했다. 강역이 4천리이다.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馬韓)이고, 둘째는 진한(辰韓)이며,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 진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진한(辰韓) 조에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한(韓) 전을 보면,

  “한은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고,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12국인데 그 남쪽으로 역시 왜와 접했다. 무릇 78국으로서 백제(伯濟)는 그 중 하나의 나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의 위치와 그 주변국에 대하여 대강은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益山郡)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후조선왕 기준은 기자의 41대손인데, 위만의 난을 피해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병합한 후 금마저(金馬渚)라 불렀고, 신라 신문왕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바꾸었고, 고려 때는 전주(全州)에 속했다. 충혜왕 후5년에 원 순제황후 기씨의 외가였으므로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산천 조를 보면,

  “용화산(龍華山) :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일명 미륵산이라고도 한다”

  “마룡지(馬龍池) : 오금사 남쪽 100여보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던 곳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불우(佛宇) 조를 보면,

  “미륵사(彌勒寺) : 용화산에 있다”

  “오금사(五金寺) : 보덕성 남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적 조를 보면,

  “기준성(箕準城) :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속전에는 기준이 쌓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다 한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9백척이오 높이가 8척인데, 계곡이 있고, 샘이 있다”

  “보덕성(報德城) : 군의 서쪽 1리에 유지가 있다”라고 되어 있어 그 대강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전북 익산 금마(金馬)에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나,

사실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긴 준왕이 간 곳은 한반도의 전북 금마가 아니라 패수(난하)를 타고 내려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 북쪽 풍윤(豊潤)으로 가서 그곳에 치소를 정하고 국호를 한(韓) 또는 마한(馬韓)이라 하였다가 백제 온조왕에게 그 땅을 빼앗긴 것이다.

 

☆ 마한은 기원전 194년부터 서기 9년까지 203년 만에 멸망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년(A.D.6) 조를 보면, 온조왕이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내가 (마한의) 동북방 1백리 되는 땅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고 말하고 있고,

  온조왕 26년(A.D.8) 조와 27년(A.D.9) 조를 보면,

  “26년(A.D.8) 겨울10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키면서 사냥을 하러간다고 거짓으로 말하고 마한(馬韓)을 습격하여 그 국토를 병합해 버렸는데, 다만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만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27년(A.D.9) 여름4월 두 성(원산성과 금현성)이 항복하매 그곳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기 9년에 이르러 마한이 온조왕이 이끄는 백제군의 침공을 받고 결국에는 소멸하게 되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 한(韓 : 마한) 조를 보면,

“한(마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모두 합하여 50여국이오......... 총 10여만 호이며 진왕의 치소는 월지국(月支國)이다...............환·령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에서 제어할 수 없자 많은 백성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마한의 북쪽에 대방군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정리해 보면,

  백제는 처음에 마한의 동북쪽 사방 1백리 땅을 차지하고 건국되었다.

  그랬다가 서기 8-9년에 이르러 백제가 마한을 습격하여 병합하였고, 후한 환제(A.D.146-167)와 영제(A.D.168-189) 말에 이르자 한[필자주 : 백제를 한으로 표기한 듯하다]이 매우 강성해져[이때 백제는 5대 초고왕 때였다] 후한에서 통제가 불가능했었는데, 헌제 때인 건안(A.D.196-220) 중에 이르자 요동의 강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게 되고, 그 남쪽에 금마저(마한 : 백제)가 위치하게 되는데,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이다.

 

☆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69년(A.D.121) 조와 70년(A.D.122) 조를 보면, “69년 12월 왕이 마한과 예, 맥의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했더니 부여왕이 아들인 위구태로 하여금 군사2만을 거느리고 한(후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항거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70년 왕이 마한, 예, 맥과 함께 요동을 침공하였더니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한(후한)을 구원하여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마한이 백제 온조왕 27년(A.D.9)에 멸망하였는데, 이제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행동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혹시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일까?]” 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 찬자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이때는 백제 3대 기루왕 때였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 기록 속의 마한은 백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방군이 설치되기 훨씬 이전인 이때부터 이미 고구려와 백제, 예, 맥이 연합하여 중국세력들에 대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마한의 왕위계승 

시조 애왕 준(哀王 準) 재위 B.C.194-194(1년) 고조선의 마지막단군으로서 이 준왕을 무강왕이라 하기도 하고,

2대 강왕 탁(康王 卓)  재위 B.C.193-190(4년) 이를 무강왕이라 하기도 한다

3대 안왕 감(安王 龕)  재위 B.C.189-158(32년)

4대 혜왕 식(惠王 寔)  재위 B.C.157-145(13년)

5대 명왕 무(明王 武)  재위 B.C.144-114(31년)

6대 효왕 형(孝王 亨)  재위 B.C.113-74(40년)

7대 양왕 섭(襄王 燮)  재위 B.C.73-59(15년)

8대 원왕 훈(元王 勳)  재위 B.C.58-33(26년) 이름을 근(勤)이라고도 한다

9대 계왕 정(稽王 貞)  재위 B.C.32-11(22년)

10대 왕 학(王 學)      재위 B.C.10-A.D.9(19년) 백제 시조 온조왕에게 마한멸망. 그리하여 시호가 없다.

                              합계 2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