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말갈 동쪽의 바다(대해)는 동해가 아니다 - 최초주장
[대흥안령 동쪽의 바다(대해) 흔적 : 지금은 수없이 많은 내륙의 호수들만 남아있다]
우선 말갈(숙신, 읍루, 물길)의 위치에 관한 사서들의 기록을 보면,
“읍루는 옛 숙신국이다. 부여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大海)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후한서 읍루전]”
“읍루는 부여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다.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는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삼국지 읍루전]”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도 하는데 불함산 북쪽에 있다. 부여에서 60일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과 접해 있으며, 북쪽 끝은 약수에까지 이른다[진서(晉書) 숙신씨전]”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북사 물길전]”
“말갈은 대개 숙신의 땅으로서 후위 때의 소위 물길이다. 경사에서 동북으로 6천여리(필자주 : 옛 10리는 지금의 2.3km에 해당 따라서 6,000리는 1,380km)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과 접하며 남쪽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와 인접해 있다[구당서 말갈전]”
“흑수말갈은 숙신 땅에서 사는데 또한 읍루라고도 한다. 원위 때는 물길이라고도 했다. 직선으로 경사에서 동북쪽으로 6천리에 있는데,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돌궐에 닿으며, 남쪽은 고구려, 북쪽은 실위와 접했다. 수십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추장들이 각각 자치적으로 다스린다. 잘 알려진 것이 속말부로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태백산에 이른다. 도태산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에 접했다[신당서 흑수말갈전]”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다. 그 땅이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니하(泥河)를 국경으로 삼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거란까지이다[신당서 발해전]”
“흑수말갈은 본래 물길이라 불렀는데 후위 때에 이르러 중국에 나타난다. 그 나라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하고 서쪽으로는 돌궐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실위와 이웃하고 있는데, 대개 숙신씨의 땅이다[신오대사 흑수말갈전]”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의 모든 기록이 말갈의 동쪽에 “바다(大海)”가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은 위 사서들의 기록을 보고는 말갈이 지금의 연변, 길림성, 흑룡강성, 한반도 함경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였고, 말갈 동쪽의 바다(대해)는 지금의 동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사실 말갈은 한반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대흥안령 동쪽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였다. 그리하여 말갈은 남쪽 고구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고, 대흥안령 서쪽에 위치했던 부여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말갈이 백제와 신라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위 지도참조]
그러다가 고구려 멸망 후 말갈족과 고구려 유민이 합세하여 발해(대진국)를 세워 서쪽으로 대흥안령을 넘어 부여와 거란을 통치하기도 하였고, 남쪽의 신라와 니하를 국경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고, 후일에는 다시 금나라를 세워 중국쪽으로 진출하여 중국 북부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며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것이며, 다시 청나라를 세워 온 중국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옛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갈 동쪽의 바다(大海)는 위 지도에서 대해라고 표시한 곳으로서 지금도 그 지역은 발해만큼 넓은 지역이 저지대 분지로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호수가 형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이 부근 지역이 내륙에 형성된 아주 넓은 바다였음이 틀림없고, 그곳을 옛 사람들이 말갈(숙신읍루물길) 동쪽의 바다(대해)라고 기록했던 것이지 지금의 한반도 동쪽 동해바다를 말하는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