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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거란(요)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는 지금의 내몽골 상도(商都) - 최초주장

윤여동 2015. 7. 4. 22:36

윤여동설 - 거란()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는 지금의 내몽골 상도(商都) - 최초주장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대진국)에 대하여,

  “(발해의) 국토는 51562주이다.

  숙신의 옛 땅으로 상경을 삼으니 용천부(龍泉府)이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3개 주를 다스린다....................

  “부여의 옛 땅에 둔 부여부(扶餘府)에는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는데, 부주(扶州), 선주(仙州)2개 주를 다스린다

  “용원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에 가는 길이고, 남해는 신라로 가는 길이며, 압록은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길이고, 장령은 영주로 갈 때 이용하는 길이고, 부여는 거란에 갈 때 이용하는 길이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찾고 보니 발해의 중경은 지금의 내몽골 파림우기, 상경은 지금의 파림좌기이었으며, 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에서는 부여 즉 지금의 정람기 부근에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거란의 침공에 대비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때 거란족은 지금의 어디쯤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거란족이 원래 자리 잡고 살던 곳이 정람기의 서남쪽 지금의 내몽골 상도현(商都縣) 부근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이곳 상도현과 이웃한 화덕현에서 무려 14,000여년전에 만들어진 흑피옥이라는 아주 오래된 옥제품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몽골 상도 부근이 옛날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었을 것이고, 아주 유서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상도(商都)라고 표기하지만, 이는 언젠가부터 상도(上都)”를 상도(商都)로 바꾸어 표기했기 때문일 것이며, 내몽골 상도(商都) 부근이 요사(遼史)에 기록되어 있는,

  “상경임황부는 본래 한()나라 때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 땅이다.(?)

  신나라의 왕망은 북안평(北安平)이라 하였다

  태조(야율아보기)가 천제(天梯), 몽국(蒙國), 별로(別魯) 등 세 산의 형세를 취하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서 위전을 정하고 그곳을 용미궁(龍眉宮)이라 하였다.

  태조 신책(神冊) 3(A.D.918)에 그곳에 성을 쌓고 이름을 황도(皇都)라 하였다가, 태종 천현(天顯) 13(A.D.938)에 다시 이름을 상경(上京)이라 고치고 부()는 임황(臨潢)이라 불렀다.

  내류하(淶流河)는 서북으로부터 남류하여 도성의 삼면을 감싸듯 휘어져 흘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안출하가 되고, 또한 어하(御河), 사하(沙河), 흑하(黑河), 황하(潢河:황수), 압자하(鴨子河), 타로하(他魯河), 낭하(狼河), 창이하(蒼耳河), 망자하(輞子河), 여구하(臚朐河), 음량하(陰涼河), 저하(豬河), 원앙호(鴛鴦湖), 흥국혜민호(興國惠民湖), 광제호(廣濟湖), 염락(鹽濼), 백구락(百狗濼), 대신정(大神淀), 마우산(馬盂山), 토아산(兔兒山), 야작산(野鵲山), 염산(鹽山), 착산(鑿山), 송산(松山), 평지송림(平地松林), 대부산(大斧山), 열산(列山), 굴렬산(屈劣山), 늑득산(勒得山)이 있다.

  [늑득산(勒得山)] 당나라가 대하씨(大賀氏)를 늑득왕(勒得王)으로 봉한 곳이며 [늑득왕의] 묘가 이곳에 있다.

  호수는 36,500호이고 관장하는 군(), (), (), ()25개이며 거느린 현()10개이다.”

  라는 요나라 상경임황부의 지리, 지형에 대한 설명이 바로 이곳 상도 부근에 대한 기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량정(涼淀) 추정지 : 요사지리지에는 임황(臨潢) 서북 2백여리에 양정(涼淀)이라 부르는 호수가 만두산(饅頭山) 남쪽에 있으며 피서지이다. 풍초가 많고 키 높이 정도의 깊이로서 얼음이 단단하게 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