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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阿尸村)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15. 12. 12. 19:07

윤여동설 -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阿尸村)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22대 지증왕 15(A.D.514) 조를 보면,

  “봄 정월에 소경을 아시촌(阿尸村)에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지방 사람들로 그곳을 채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신라 최초로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을 강역의 북쪽에 설치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 아시촌소경에 관한 기록은 이후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후대에 5소경(중원소경, 북원소경, 금관소경, 서원소경, 남원소경)을 설치할 때에도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시촌소경이 구체적으로 신라 땅 어디에 설치되었고, 언제까지 존속되었으며, 무슨 이유로 그 이후의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함안군 조의 건치연혁을 보면,“本阿尸良國 一云 阿那伽倻 新羅法興王滅之其地爲郡 景德王改今名(본래 아시량국인데 일운 아나가야라고도 한다. 신라 법흥왕이 멸하고 그 땅으로 군을 만들었고,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부 사람들은 아시촌(阿尸村)과 아시량국(阿尸良國)아시(阿尸)”가 같다고 하여 이곳이 아시촌소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시량국은 법흥왕 때에 이르러서야 신라 땅이 되었다고 했으므로 그 이전인 지증왕 때 신라에서 이곳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아시촌소경의 위치는 당시 신라의 상황을 감안하여 추정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시촌소경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설치했던 것일까?

 

첫째, 요녕성 객라심좌익(객좌) 부근 : 지도상의 A 지점

 

 

 

  우하량 선사유적지가 가까이 있고 대릉하가 발원하는 지금의 요녕성 능원(凌源)부근으로 비정되는데 그 부근은 후일 우수주(牛首州 , 우두주라고도 한다)가 되기도 하는 곳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7대 일성이사금 5(A.D.138)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북방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5대 기림이사금 3(A.D.300) 조를 보면, “3월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이후에도 신라의 왕들이 우두주(우수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계속된다.

 

 

속말말갈의 남쪽국경지역에 태백산이 위치했다. 지금의 칠로도산산맥 중 최고봉인 대광정자산(2,067m)이다. 

 

 

  이는 태백산이 우두주(우수주)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또 신라가 일찍부터 서라벌(금성)의 북서쪽 태백산(太白山)”부근까지 진출했다는 증거일 것인데, 당시의 태백산은 지금  칠로도산산맥 중 대광장자산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때 신라의 왕들이 태백산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은 그 태백산의 줄기에 제사를 지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첫 소경을 설치했다면 옛 환인, 환웅들이 죽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신성한 장소였을 능원 우하량 부근에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곧 지금의 객라심좌익 부근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신라의 북원경으로 비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아주 오래된 옛 청동기들도 많이 출토된다.

  옛날 고조선에서 단군들을 제사지낼 때 쓰던 제기일 수도 있고, 그 지방 사람들이 신성한 산인 태백산에 제사지낼 때 쓰던 청동기일 가능성도 있으며, 또 신라의 왕들이 태백산에서 제사지낼 때 쓰던 청동기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둘째, 요녕성 조양(朝陽) 부근 : 지도상의 B 지점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로 비정되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錦州)의 북서쪽에 위치한 조양(朝陽) 부근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는 조양이 맥과의 접경지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신라에서 이곳에 소경을 설치함으로써 북쪽, 북서쪽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활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셋째, 요녕성 부신(阜新) 부근: 지도상의 C 지점

 

  지금의 요녕성 부신은 신라의 실직주(悉直州)로 비정되는 곳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를 보면,

  497년에 신라 방어의 요충에 위치했던 니하의 우산성을 고구려가 빼앗았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6(A.D.505)조를 보면, 이때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하였다고 하였고,

  또 13(A.D.512) 조를 보면, 이사부의 우산국(울릉도) 정벌 기사로 이어지는데,

  이는 이때 신라가 서라벌(금성)의 동북쪽 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인 15(A.D.514)조에 아시촌소경 설치기록이 나타나고, 서라벌(금성) 부근의 6부 사람들과 나라의 남쪽지방 사람들을 옮겨 아시촌소경을 채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때 신라는 아시촌소경을 서라벌(금성)의 북쪽 방향 실직주 부근에 설치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지금의 요녕성 부신(阜新) 부근에 아시촌 소경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