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웅진 동쪽 지라성(支羅城) 윤성(尹城) 대산책(大山柵) 사정책(沙井柵)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용삭2년(A.D.662) 조를 보면,[구당서 권199상 열전 제149상 동이 백제 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7월 인원(유인원), 인궤(유인궤) 등이 웅진(熊津)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 책(柵)들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그곳에 군사들을 배치하여 진압하고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이 진현성(眞峴城)은 강을 끼고 있으며 높고 험해서 요충이라 생각하여 군사를 보충하여 지키고 있었는데 인궤(유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벽 아래 바짝 붙어 있다가 날이 밝을 무렵 성안으로 들어가서 8백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신라로부터의 군량수송로가 통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 속에서 우리는 지라성, 윤성, 대산, 사정책 등이 웅진의 동쪽 방향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곳이 차단되면 신라에서 웅진으로 가는 통행로가 막힐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웅진과 신라 금성의 위치를 찾으면 된다.
많은 사람들은 신라의 금성(金城)이 한반도의 경북 경주이고, 백제의 웅진(熊津)이 충남 공주라고 생각하여 경북 경주에서 충남 공주로 가는 길목인 대전 부근에서 이들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금성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호로도시 금주(錦州) 부근이고,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盧龍)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의 노룡고성은 옛 웅진성의 흔적이다.
따라서 지라성, 윤성, 대산, 사정책 등은 진황도 노룡 동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지금 노룡 동쪽 방향에는 갈석산, 토이산, 조산 등이 위치하고 있고, 요녕성 금주에서 하북성 노룡으로 갈 때 호로도와 흥성 그리고 수중을 지나 산해관을 넘고 진황도와 무녕을 지나 지금의 토이산 북쪽을 넘어 노룡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의 금성(요녕성 금주부근)에서 백제의 웅진(진황도 노룡)으로 갈 때에도 바로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인데, 복신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이곳을 차지하고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보급로가 차단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나라군으로서는 반드시 이 식량보급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웅진 동쪽에 위치했었다는 지라성, 윤성, 대산, 사정책은 지금의 진황도 조산(祖山)과 토이산(兎耳山) 사이 즉 지금의 진황도 무녕현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 토이산 북쪽은 탄현(炭峴)으로 비정되는 곳이기도 한데,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해 올 때 신라군이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당나라군은 백강(지금의 난하)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했던 백제의 군사적 요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