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남옥저(南沃沮)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17. 7. 2. 22:33

윤여동설 - 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남옥저(南沃沮)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이규보의 제왕운기 하권 위만조선기를 보면, “진번과 임둔은 남북에 자리하고, 낙랑과 현토는 동서에 치우쳤네(眞番臨屯在南北 樂浪玄菟東西偏)”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규보는 무엇을 보고 이러한 글을 지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위 그림처럼 낙랑과 임둔이 동서로 배치되었고, 진번과 현토가 남북으로 치우쳐 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은데......]

 

  후한서 동옥저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땅이 방 천리의 절반쯤(방 약5백리정도) 된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있어 오곡이 잘 자라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후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작아 큰 나라의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고구려가 다시 대인을 사자로 삼아 읍락을 감독하고 다스리게 하였으며, 조세로서 담비, , 생선, 소금, 해산물을 징수하고, 미녀를 뽑아 비첩으로 삼았다. [필자 주 : 발해 때 남해의 다시마가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남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이다)은 읍루와 접했다

 

# 위 노란색부분 중 북옥저의 남쪽에 읍루가 위치했다는 것은 오기임이 확실한데, 이는 후한서 읍루전, 삼국지 읍루전에 "읍루는 옛 숙신국이다. 부여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에 닿았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옥저가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초기현토군에 속했다가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고, 결국에는 고구려에 병합되고 말았으며, 남옥저의 북쪽방향 800여리에 북옥저가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옥저의 위치가 실제 어디였는지, 초기 현토군의 치소가 실제 어디였는지는 솔직히 아직 아무도 정확히 밝힌 이가 없었는데, 필자가 찾고 보니 옥저는 바로 지금의 내몽골 적봉(赤峰), 옹우특기(翁牛特旗)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옥저는 추모왕 10(A.D.28) 겨울 11월 조에,

  “부위염으로 하여금 북옥저(北沃沮)를 쳐서 없애고, 그 지역을 고을로 만들었다 하면서 북옥저가 언급되고,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북옥저에 대하여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모두 동일하며 읍루와 접해 있다. 읍루(말갈)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어름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내려와 촌락에서 생활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앞에서 옥저가 지금의 내몽골 적봉(赤峰), 옹우특기(翁牛特旗) 일원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북옥저는 남옥저에서 북쪽으로 800여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고 또한 북쪽으로 읍루(말갈)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도 했으므로 결국 북옥저는 남옥저였던 지금의 내몽골 적봉 객라심기의 북쪽방향 800리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지금의 서랍목륜하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동옥저 역시 옥저 땅의 동부 일부에 위치했을 것인데, 옹우특기 일원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북옥저를 치구루(置溝婁)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溝婁(구루)()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남옥저와 북옥저의 위치를 정확히 찾으면, 정시6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환도성을 함락당하여 동천왕이 패하고 쫓겨 남옥저를 경유하여 북옥저까지 도망친 경로를 찾을 수 있고, 또 동천왕을 뒤쫓던 장군 왕기가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공적을 바위에 새겼다는 장소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숙신 남쪽 왕기 마애각석 추정지]

 

    

                                           [옹우특기의 상징물 옥룡]

 

[신기하게도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의 산과 강의 형상이 마치 나이든(늙은) 소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그곳은 원래는 북옥저의 도읍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후 언젠가 "오단(烏丹)"으로 불리우다가 근래에  옹우특기(翁牛特旗)로 지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옹우특기라 불리우게 되었는지 매우 의아했었는데, 찾고 보니 "옹우(翁牛)"라는 의미가 "나이든 소 또는 늙은 소" 라는 의미임을 볼 때 누군가가 그곳의 지형이 소머리처럼 생긴 것을 알고 난 후 옹우특기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