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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압록강 건너 집안(集安)은 탈해의 고향 다파나국(多婆那國)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7. 12. 11. 11:26

윤여동설 - 압록강 건너 집안(集安)은 탈해의 고향 다파나국(多婆那國)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 최초주장

 

 

 

 

 

    많은 사람들은 지금 압록강 너머 길림성 집안을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國內城)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아마 그곳에 고구려 19대왕이었던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즉 광개토왕의 묘비가 서 있고,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그곳이 고구려의 도읍이 틀림없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의 태왕릉이라는 곳을 광개토왕의 능일 것이라고 하게 되었고, 장군총이라는 곳을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능일 것이라고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고구려 건국시조 추모왕은 졸본에 도읍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고,

  2대 유리왕 때 졸본으로부터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겨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 6대 태조대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 9대 고국천왕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 죽었으며,

 

시조 추모왕의 능은 졸본 부근에 조성되었고, 2대 유리왕으로부터 9대 고국천왕까지의 능은 국내성 부근에 조성되었는데, 졸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으로 비정되고, 국내성은 북경시 서북쪽 연경현 영녕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10대 산상왕 때 환도성으로 옮겼으나 11대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을 함락 당하자 급히 옛 왕검성이었던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겨, 12대 중천왕, 13대 서천왕, 14대 봉상왕, 15대 미천왕까지 그곳에서 살다 죽었다.

 

10대 산상왕의 능은 환도성 부근에 조성되었고, 11대 동천왕부터 15대 미천왕까지의 능은 평양성 부근에 조성되었는데, 환도성은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16대 고국원왕 때 다시 환도성으로 옮겨 갔으나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다시 환도성을 함락 당하자 평양 동쪽의 황성(移居平壤東黃城)으로 옮겨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19대 광개토왕까지 그곳에서 살다 죽었다.

 

16대 고국원왕으로부터 19대 광개토왕까지의 능은 평양 부근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20대 장수왕 때 이르러 다시 옛 도읍인 평양성으로 옮겨 21대 문자왕, 22대 안장왕, 23대 안원왕, 24대 양원왕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 죽었고,

 

 

20대 장수왕으로부터 24대 양원왕까지의 능도 평양성 부근에 조성되었다.

 

  25대 평원왕 때 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그 후에는 도읍 이전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25대 평원왕, 26대 영양왕, 27대 영류왕의 능도 평양성(장안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부근에 조성되었고,

 마지막왕인 보장왕의 능은 당나라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평양성, 황성, 장안성은 모두 평양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졸본은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을 말하는 것이고,

  국내성은 북경 서북쪽 연경현 영녕진을 말하는 것이며,

  환도성은 북경 북쪽 발해진을 말하는 것이며,

  평양성, 황성, 장안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압록강 북쪽 길림성 집안은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황성일 수 없다.

  집안은 우리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고대 역사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가까이인 지금의 요동반도에 고대의 왜국이 위치하고 있었고,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조를 보면,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의 요동반도에 고대의 왜국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으므로 다파나국은 그 동북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지금의 요동반도 보란점 부근에서부터 길림성 집안까지의 거리를 재어보면 실제로 약 1천여리쯤이 된다.

  이는 지금의 길림성 집안은 고구려의 국내성이 아니라 다파나국의 도읍이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 되고,

  추정해보면 원래 탈해가 다파나국을 떠나올 때 지금의 압록강을 타고 내려와 요동반도를 돌아 발해에 진입한 후 발해를 가로질러 건너 금관국(가야) 해변에 닿았다가 진한(신라)의 아진포에 도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집안다파나국설은 우리 역사상 필자가 최초로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집안 부근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고대의 적석총들도 고구려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이 아니라,

  사실은 다파나국의 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찾으려면 혁명 수준의 변화가 필요한데,

  반도식민사관에 찌들어 있는 역사교수들이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같은 부류의 역사선생들이 중, 고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왜곡에 왜곡을 더하는 꼴이다.

  어느 때쯤이 되어야 우리 고대 역사를 정확히 찾을 수 있을런지.............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한 숨만이 쉬어진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전 국민의 40% 정도만이 우리 역사가 잘못 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나,

  앞으로 전 국민의 60% 이상이 우리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때가 되면 그때 우리 역사는 바뀌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