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여진(말갈) 동쪽의 대해(大海) 찾기 - 최초주장
[여진(말갈) 동쪽 대해 흔적]
고려의 윤관장군이 여진(숙신,읍루,물길,말갈)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아홉 개의 성을 쌓았는데, 우리는 지금 그를 "고려 동북9성"이라 한다.
그리고 이때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정계비를 세웠는데, 그 비석에 "高麗之境(고려지경)"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사를 보면 이때 윤관장군이 여진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고, 서북방으로는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와 정주 두 고을에 닿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을 황해도 개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고려의 동북쪽을 두만강 방향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여진이 연해주쯤에 위치했었다고 생각했으므로 동북9성을 두만강 북쪽에서 찾으려 했으며, 그 동쪽에 위치했다는 대해(大海)는 지금의 연해주 동쪽 바다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찾고 보니 우리의 고려는 한반도에 위치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관성에 도읍하고 그 부근의 하북성 일부, 요녕성 일부, 내몽골 일부를 차지했던 나라였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고려의 동북쪽에 위치했다는 여진(말갈)은 한반도 동북쪽의 연해주가 아니라 지금의 대흥안령 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그런데 지금 대흥안령 동쪽에 큰 바다는 없다.
그렇다면 왜 고려사에는 여진의 동쪽에 대해가 있었으며, 서북쪽에는 개마산이 있었다고 기록했던 것일까?
☆ 구당서 말갈전을 보면, “말갈은 대개 숙신의 땅으로서 후위 때의 소위 물길이다. 경사에서 동북쪽으로 6천여리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과 접하며, 남쪽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와 인접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그 땅이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니하를 국경으로 삼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거란까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결같이 말갈(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의 동쪽에 바다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 때 여진 땅을 빼앗아 설치했던 동북9성의 동쪽에도 대해(바다)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 역시 이 비밀을 풀기 위해 꽤나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 했다.
필자의 주장대로 여진(말갈)이나 고려의 동북9성이 대흥안령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그 동쪽에 대해가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곳에는 지금 호수들만 즐비하게 있었고,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필자는 혹시 옛 사람들이 수많은 호수들을 대해라고 기록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서북방의 개마산은 대흥안령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대흥안령과 소흥안령 사이의 광활한 벌판의 물이 빠져 나갈 수 있는 곳이 오직 한 곳, 지금의 송화강 밖에 없다는 것이 눈에 띄었고, 대흥안령과 소흥안령 사이의 지형이 거대한 분지지형임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거대한 분지는 동북평원(東北平原)이라 명명되어 있으나 필자는 그곳을“흥안대분지(興安大盆地)라 다시 바꾸어 명명하겠다.
흥안대분지는 흑룡강성 하얼빈 동쪽 목란현 부근만 막혀 있으면 전체의 물이 빠져 나갈 곳이 없어 내륙에 발해보다도 더 크게 호수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분지지형이다.
아마 옛날에는 목란현 부근이 막혀 있어 물이 빠져나갈 수 없어 흥안대분지에 바다처럼 거대한 내륙호수가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옛 사람들은 그곳을 대해(大海)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 삼국지 동옥저전을 보면, “왕기가 별도로 군사를 보내 궁(위궁 : 고구려 동천왕)을 추격하여 동쪽 경계의 끝까지 갔을 때 그곳의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사람이 살지 않는가?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수 십일을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가서 한 섬에 도착하였는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그들의 풍속은 해마다 7월에 동녀(童女)를 구하여 바다에 던진다고 했고, 또 그 나라가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모두 여자뿐이고 남자가 없다고 했고, 또 말하기를 ’어느 사람이 바다 가운데에 떠 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입은 옷이 마치 중국 사람의 옷과 같았고, 양 소매의 길이가 3장이었다. 또 난파되어 해안으로 떠밀려온 배 한 척이 있었는데, 그 배에 있는 사람의 목 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 살아 있었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고 하였고,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대해 가운데에 있다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 속 바다(대해)가 바로 흥안대분지(동북평원)가 대해(바다)였을 때 발생했던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고대의 여국(여인국)은 아마 지금의 하얼빈 부근에 위치했던 듯하다.
윗 그림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 중에 흥안대분지의 물이 지금의 요하를 따라 발해로 흘러들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지형의 고도로 보면 서요하. 동요하, 대요하의 물은 발해로 흘러들지만 그 북쪽 흥안대분지의 모든 물은 모두 송화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흑룡강 하류인 아무르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그런데 언젠가(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고려 말 조선 초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흑룡강성 목란현(木蘭縣) 부근이 무너져 대흥안령 동쪽 대해의 물이 급격히 빠지며 송화강이 만들어졌고, 물이 빠진 여진(말갈) 동쪽의 대해(바다)는 흥안대분지가 되었을 것이다.
☆ 흥안대분지(동북평원)가 옛날에는 바다였음을 인식해야 말갈(여진)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고, 동옥저와 예(동예), 맥을 찾을 수 있으며, 발해의 특산물 중에 남경남해부의 건포(다시마) 산지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대륙고려를 찾을 수 있고, 동북9성도 정확히 찾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사라진 이 바다를 찾아야 우리의 고대 역사를 무리없이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명일통지로부터 사서의 기록들이 이상해지는 것도 바로 이렇듯 여진 동쪽의 대해(바다)가 물이 빠지며 평원화(흥안대분지)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싶고, 이때쯤 조선은 지금의 북경 동쪽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이주했던 듯하고, 일본 역시 지금의 요동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 이때 조선과 일본이 선조로부터 대대로 살아온 옛 땅을 버리고 한반도로, 일본열도로 이주해야만 했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