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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산순수비는 신라 진흥왕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비석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8. 7. 20. 23:01

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산순수비는 신라 진흥왕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비석이다 - 최초주장

 

 

 

           [북한산순수비의 원래모습 : 비신에 위와 같은 갓이 씌워져 있었다]

 

 

 

 

                   [북한산순수비의 수난 : 비신은 깨어지고 갓은 없어지고.................] 

 

 

 

 

                                      [북한산순수비]

 

                                                   

 

  [북한산순수비 명문 속 眞興太王(?), 新羅太王(?), 南川軍主로 판독하고 있는 글자인데, 이 글자가 정말로 그러한 지는 의문이다]

 

 

  신라 24대 진흥왕은 걸출한 정복군주로서 신라를 중흥시킨 왕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6(A.D.555) 조의 겨울10월 왕이 북한산(北漢山)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하였다. 11월에 왕이 북한산으로부터 돌아와 교서를 내려 거쳐 온 주와 군의 1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해당 지방의 죄수들로서 2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해 주었다 라는 기록을 근거로 이때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수하고 그 기념으로 순수비를 세웠을 것이라고 하며, 지금 한반도 서울의 북한산에 있는 비석이 바로 그때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라고 한다.

  그러나 어느 기록에도 진흥왕이 이때 북한산을 순수하고 비를 세웠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다만 지나온 주와 군의 1년분 세금을 면제하고, 중죄인을 제외하고는 사면해 주었다는 기록뿐이다.

  그리고 사실 백제의 북한산(北漢山)은 한반도 서울의 북한산이 아니라 하북성 진황도에 있는 도산(都山)을 말하는 것이다.

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하북성의 도산부근이었다.

  또한 이 비석을 진흥왕순수비라고 명명한 사람은 조선 말기 사람인 추사 김정희로서 그는 그 비문에 흥태왕(興太王)”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고 하여 진흥왕순수비라고 명명했다고 하고 지금 학자들도 대체로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추사선생 초상]

 

  ☆ 북한산비를 진흥왕순수비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가 아니라 유득공의 아들인 유본학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 비문에는 연호가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비석이 실제 언제 세워진 것인지 알 수 없고,

  또 추사는 비문 속의 흥태왕(興太王)”을 진흥태왕(眞興太王)으로 추정하고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재위 29(A.D.568) 조의 겨울10월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는 기록과 신라에 군주(軍主)”라는 계급이 있었음을 연관시켜 그 옛 비석이 진흥왕북한산순수비임에 틀림없다고 심정했다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興太王(흥태왕)” 중 마모된 글자가 ()”이라고 하는 것은 추사의 추정일 뿐 사실 그 글자가 진짜 무슨 글자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太王(태왕)”이라는 명칭을 쓴 예가 없어 진흥왕이 과연 스스로 태왕(太王)”이라는 명칭을 칭했을까 의문스럽고, 또 추사의 결정적인 오류라고 생각되는 것은 삼국사기를 보면 진흥왕 재위 37년인 576년 가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했다고 하였으니 진흥왕 생전에 세운 비석에 眞興太王(진흥태왕)”이라고 비문을 새겼을 리도 없는 것이다.

  또한 남천(南川)이라는 곳은 세상에 많을 수 있고,

  신라 계급의 군주(軍主)”라는 명칭도 오직 신라에서만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도 너무 단순한 발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명칭이 좋을 경우 주변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명칭을 차용하여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고, 역으로 신라가 그 군주라는 명칭을 어딘가로부터 차용해서 사용했는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웠다면 실제로 순수했을 당시의 북한산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의 도산(都山)에 세웠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한반도 서울의 북한산에서 발견된 북한산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은 사실 신라 진흥왕과는 아무 관련도 없고, 당시 한반도에 존재했던 잃어버린 왕국의 태왕(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왕국의 왕이 흥태왕이었을 것이다)이 지금의 서울지역을 순수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운령순수비에 태창(太昌)”이라는 연호가 나타나고, “흥태왕(興太王)”이라는 왕호가 또 나타나는데, 사람들은 그 역시 신라 진흥왕 때의 연호였던 대창(大昌)”과 동일 연호로 보아 흥태왕(興太王)을 진흥왕과 동일 인물이라 하면서 그 비석 역시 진흥왕 때 세운 순수비라 생각하는 것인데, 태창(太昌)과 대창(大昌)이 서로 다른 시기의 연호라면 그 연도는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진흥왕은 재위 12(A.D.551)에 이르러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하였고, 재위 29(A.D.568)에 대창(大昌)이라 했다가 재위 33(A.D.572)에 다시 홍제(鴻濟)로 고쳤다. 이때 신라 진흥왕이 연호를 제정하고 반포했다는 것은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는 의미이긴 하다.

 

 

  고대 한반도에도 여러 왕국이 존재했을 것이고, 왕국들끼리 정복 전쟁도 있었을 것이며, 또 뛰어난 군주가 나타나 자기 나라의 강역을 넓히고 순수비를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시대 말의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의 이름 모를 옛 비석을 억지로 진흥왕과 관련지어 해석했던 것이라 판단되고, 지금은 반도식민사관에 따라 그를 답습하고 있는 것 뿐이리라.

  그리고 황초령순수비라는 것이나 마운령순수비, 그리고 창녕순수비라는 것 역시 같은 성격의 비석으로 본다.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표석건립기념 소화13년(1938) 11월 26일]

 

  필자는 북한산순수비의 명문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연구하여, 한반도에 존재했을 잃어버린 왕국의 비밀을 밝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필자의 추측으로는, 어느 때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의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이름 모를 왕국의 태왕(흥태왕)이라 불리운 왕이 왕위에 올라 평생 주변국을 정복하여 점점 강역을 넓혀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태왕은 새로운 정복지를 순수하였을 것이고, 또 중요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나라 안 곳곳을 다녔으며 그 기념비를 세웠을 것이다지금의 창녕순수비, 단양적성비, 영일냉수리비 등이 이에 해당한 기념비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태왕은 만년에 이르자 연호를 태창(太昌)”이라 하고, 그 원년에 이르러 자신이 평생 개척해 놓은 국경을 직접 순수하고는 순수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비와 동일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일 형태의 감악산비]

 

  북한산에 올라 순수비를 세우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약 두, 세 지점(감악산?과 또 한, 두 지점?) 정도에 순수비를 더 세웠을 것이나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고, 태왕은 더 북쪽으로 올라가 황초령을 순수하고 순수비를 세우고, 다시 더 북쪽으로 올라가 마운령을 순수하고 순수비를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는 북청이나 함흥에서 배를 타고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했거나, 또는 육로를 이용하여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귀환했을 것이다.

  이때 태왕은 자신이 개척해 놓은 왕국의 국경지역을 한 바퀴 돌며, 중요 위치에 순수비를 세웠을 것인데, 지금 발견된 그 비석들 중 일부는 깨어져 일부의 명문만 판독이 가능하고 또 어떤 비석은 세월이 오래 흘러 마모되어 확실한 내용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확실한 근거도 없이 그 비석들을 신라 진흥왕과 연관시킴으로써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이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 금성(金城)임을 인식한다면, 한반도 북한산비를 진흥왕순수비라는 해석을 절대 할 수 없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반도사관론자들이다.

  그들의 반도사관으로는 신라가 한반도 경주에서 건국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니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필자처럼 해석을 할 수 없어 진흥왕순수비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산순수비나 황초령순수비 그리고 마운령순수비는 진흥왕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비석이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잃어버린 왕국의 태왕이 국경 지역을 순행한 기념으로 세운 순수비일 것이다.

  인식을 바꾸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연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