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한민족의 성산 고대의 태백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8. 9. 21. 08:49

윤여동설 - 한민족의 성산 고대의 태백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우리 상고시대, 고대역사를 찾는 핵심 화두 중 하나는 고대 태백산(太白山)의 위치를 찾는 일이다.

  고대 우리 한민족의 성산 태백산(太白山) 지금 한반도 북쪽의 백두산(白頭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이다.

  환웅천왕이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도읍지 신시(神市)를 찾은 산이 바로 이 대광정자산이었고, 단군왕검의 첫 도읍지 아사달도 바로 이 산 부근이었다.

  대광정자산은 칠로도산(七老圖山) 산맥 중 최고봉으로서 해발 2,067m에 달하는 산인데, 그 정상부분은  멀리서 보면 마치 눈이 내려 쌓인 것처럼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은 그 산을 태백산(太白山)이라 하였고, 후일 고려시대에 이르면 백두산(白頭山)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그리고 칠로도산(七老圖山)이라는 의미는 일곱노인이 그림처럼 노니는 산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우리 환국 일곱분의 환인천제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그 부근에는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산맥도 있는데,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의미는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뜻으로서 이는 마치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어 보려고 하다가 곰은 사람이 되었고,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우리의 환웅설화를 연상하게 하는데, 사서들에는 바로 그 부근을 우리의 상고, 고대의 역사강역으로 기록하고 있고, 그 부근의 적봉일원과 능원 우하량 선사유적 등에서는 아주 수준 높은 수천년 전 선사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학자들은 그를 홍산문화라 이름 지었고, 요즈음에는 요하문명이라고도 하는데, 시기적으로 우리 환인시대, 환웅시대, 왕검조선시대와 일치한다.

  어느 면으로 보나 그 부근이 우리 상고사의 역사강역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리하여 출토되는 유물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해 보고자 한다.

 

  상고시대 환인천제의 환국(桓國)은 지금의 영성, 능원 부근을 중심으로 적봉이남 지역이 중심강역으로 보이고, 중심종족은 맥족(貊族)으로서 이들이 후일 맥국(貊國)이 된다. 맥국의 도읍은 우수홀(요녕성 능원)로 추정되고, 이 맥국이 바로 옛 환인천제의 후예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 부근 지역에서는 옥웅룡이라 부르는 옥조각품이 많이 출토되는데, 곰의 형상을 닮은 옥조각품은 환인천제의 후예라는 부족표시로 볼 수 있다.

 

 

 

 

환인 환국의 강역이 "흑수(黑水)와 백산(白山) 사이"라고 하여, 흑수를 북쪽의 흑룡강 상류, 백산을 태백산인 대광정자산으로 보아 그 사이의 드넓은 지역을 환국의 강역으로 볼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 설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환웅천황 때에 이르면 북쪽으로 철령을 넘어 내몽골 적봉 방향으로 진출하여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박달나무 아래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동쪽인 지금의 내몽골 적봉 부근에 도읍하고 신시(神市)라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강역이 넓어지게 되는데, 이곳은 후일 옥저가 된다. 옥저가 바로 옛 환웅천왕 신시의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그곳 적봉 일대에서도 선사시대의 옥룡 조각품이 많이 출토되는데, 그 역시 환웅천왕의 후예라는 부족표시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단군왕검 때에 이르면, 왕검조선을 건국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아사달(阿斯達,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 대명진토성 )에 도읍을 정했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었는지 10여년 만에 다시 왕검성(王儉城, 평양성, 하북성 승덕시)으로 도읍을 이전함으로써  중국 방향으로의 진출을 동시에 도모하게 되고, 강역이 넓어지자 다시 백악산아사달(북경 동북쪽 무령산 부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그렇게 왕검조선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의 왕검성과 무령산 부근의 백악산아사달을 중심으로 천년왕조를 이어오다가 그 땅을 잃게되자(필자주 : 기자에게 빼앗겼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왕검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는 일단 장당경(당장경)으로 피신했다가 옛 도읍 아사달(阿斯達)로 돌아가 선조의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내몽골 영성(寧城) 부근이 왕검조선의 첫도읍 아사달과 당장경(장당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백두산이 한반도의 백두산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동북쪽 칠로도산 산맥 중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잠곡 김육 선생이다.

 

[잠곡 김육선생 초상]

 

[김육선생묘표 : 조선국 영의정 문정공 김육지묘]

 

  그가 쓴 조경일록(朝京日錄)을 보면 그가 북경에 사신으로 가면서 산해관 쯤을 지날 때 북경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 중에 계주(薊州)의 경충산(景忠山)은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뻗어 나온 산이다. 백두산은 사류하(沙流河)의 정북쪽에 있는 산으로 돌산이 눈처럼 희기 때문에 백두산이라고 한다. 이 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공동산(空同山)과 경충산(景忠山)이 되고,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반산(盤山)이 되고, 남쪽으로 돌아 옥천산(玉泉山)이 되어 북경의 서쪽을 빙 둘러싸고 있다라고 기록했는데, 잠곡 선생은 어떻게 지금 하북성 당산시 천서현의 경충산이 북쪽의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이라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 대광정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이 바로 칠로도산산맥인데, 경충산은 그 산맥 중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서 잠곡 선생의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 조선 중기에도 백두산이 한반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 않고 경충산의 정북쪽에 위치했음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니............놀라운 일이다.

 

  이를 보면, 결국 고대 우리 민족은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부터 동쪽으로 요하까지, 북쪽으로 내몽골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주변 세력들과 다투면서 1만년 역사를 이어오다가 조선 초에 그 땅을 잃고 한반도로 옮겨 오게 되어 그때부터 지금의 백두산이 옛 태백산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대륙의 우리 옛 땅이 어디인지를 잃어버렸고, 필자 같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우리 옛 땅의 위치를 찾아 알려줘도 그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알려주는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역사는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대륙역사였고, 이성계의 조선부터가 한반도의 역사이다.

 

경주, 김해부근의 고대유적들은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예인 투후 김성 일파가 왕망의 신나라 멸망 후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다시 왕국을 세웠던 흔적이고(그리하여 경주, 김해에서 흉노문화유적, 유물이 출토되는 것이다), 익산, 공주, 부여의 백제 유적들은 대륙의 백제에서 무광왕(계왕의 아들)이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다시 세운 반도백제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