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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단군왕검의 황후 하백녀(河伯女)의 고향 비서갑(斐西岬)은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윤여동 2019. 3. 29. 11:28

윤여동설 - 단군왕검의 황후 하백녀(河伯女)의 고향 비서갑(斐西岬)은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왕검은 비서갑(斐西岬)에 사는 하백(河伯)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즉 고조선(왕검조선)의 초대 황후가 곧 하백의 딸이었다는 말이다.

  [단군왕검의 왕후가 되었던 비서갑 하백녀의 모습일까?]

 

  이암(李嵒)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면,

  “무진년 제요도당(요 임금) 때에 왕검이 단국(檀國 : 환웅국)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 : 아사달 부근의 태백산의 오기일 것이다)의 단목지허(檀木之墟 : 신단수터 즉 단목이 있던 터)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삼게 되었다.....

비서갑(斐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아 양잠을 관장하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를 확인해 볼 수 있고,

 

환국(桓國)은 환인국을 말하고, 단국(檀國)은 환웅국을 말하는 것인데, 단국은 환웅이 신단수(神壇樹)인 단목(檀木) 아래에서 천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고, 단군(檀君) 역시 단목지허(檀木之墟)에서 군장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며,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도 옛 환국(桓國)과 단국(檀國)에 관한 옛기록이라는 의미이다.

 

환웅은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고 하였고, 단군왕검은 단목지허에 이르렀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환웅 때는 신단수(神壇樹, 神檀樹)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세월이 많이 지난 단군왕검 때는 그 신단수가 늙어 죽고 그 그루터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단목지허(檀木之墟)라고 기록했던 듯하다.

 

 

  태백산(太白山)에 대해서는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4를 보면, “태백산(太白山)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고 높게 비서갑(斐西岬)의 경계에 우뚝 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안고 있는데, 크고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고대 태백산(太白山)이 지금의 어느 산을 말하는지, 비서갑(斐西岬)이 지금의 어디인지, 하백(河伯)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밝힌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필자가 앞서 우리 고대 역사에 언급되는 태백산(太白山)이 지금의 북경 동북쪽 칠로도산산맥 중 최고봉인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임을 밝혀냈었다.

  그렇다면 비서갑(斐西岬)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밝혀보기 위하여, 하백(河伯)이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말할 때 我是河伯之女 名柳花(나는 하백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입니다)”라고 말하여 하백이 언급되고,

  또 호태왕비문에도, “출자는 북부여 천제의 자손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河伯女郞)이다.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내려와 태어나시니 성덕이 있고.......... 하늘의 명을 받아 남쪽으로 순행하여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날 때 왕이 나루에 다 달아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자손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로 엮은 거북이여 떠오르라소리치니 갈대로 엮은 거북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졸본) 서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라고 하백이 또 언급된다.

  그리고 북위서 고구려전을 보면, “주몽이 오인, 오위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동부여)를 떠나 동남쪽(필자주 :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큰 강을 하나 만났는데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고, 부여 사람들은 아주 가까이 추격해 오고 있었다. 주몽이 물에 대고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자이다. 오늘 도망을 하고 있는데 군사들이 바짝 뒤쫓고 있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였더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졌으므로 추격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역시 하백이 언급되는데, 앞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귀양살이를 했다는 우발수(優渤水)가 지금의 내몽골 다륜(多倫) 부근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주몽 역시 지금의 내몽골 다륜 부근에 위치했던 동부여에서 도망쳐 서남쪽에 위치한 졸본 즉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을 향하여 도망치던 중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하백(河伯)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이는 어부(漁夫, 漁父)의 존칭이다.

  즉 하백(河伯)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를 일컫는 말이고, 거북이나 자라는 배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몽은 동부여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남쪽의 졸본부여로 도망칠 때 강에 다 달아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강에서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에게 소리쳐 도움을 청했던 것이고, 이때 주몽은 자신의 외할아버지도 어부임을 덧붙이자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이 주몽 일행을 배에 태워 강을 건네주었다는 말인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 단군왕검의 왕후인 하백녀(河伯女) 역시 어부의 딸을 말하는 것으로서 단군왕검은 왕위에 오른 후 비서갑에 살던 어부(하백)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였던 것이다.

  필자가 추측하기로는 단군왕검 당시의 하백은 비서갑 지방의 토호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하여 단군왕검이 그 하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斐西岬(비서갑)은 태백산에서 가까운 지방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단군왕검의 왕후인 하백녀의 고향 비서갑(斐西岬)은 지금의 대광정자산 서쪽 가까이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

 

[참고]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 본기에

  『고구려는 그 선조가 해모수(解慕潄)로부터인데 해모수 어머니의 고향 또한 그곳이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熊心山)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사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夫餘 : 북부여)의 시조라 한다.

  오우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5백여 명이었는데 아침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니 명령 없이도 관경이 저절로 교화되었다. 산에는 산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하였다. 나라가 무사 하였고 백성들 또한 무사 하였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내려와 나라를 세운 해는 임술년 48일로서 곧 진시황 정()8(B.C.239)이다.

  고리군(槀離郡)의 왕 고진(高辰, 필자주 : 해진의 오기이다)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沃沮侯) 불리지는 고진(해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衛滿)을 토벌함에 있어 공을 세워 봉해졌던 것이다.

  불리지는 일찍이 압록강변 서쪽을 지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취하여 고주몽(高朱蒙, 필자주 : 해주몽이다)을 낳게 하였는데 이때가 임인 55일이다. 한나라 불릉(弗陵)의 원봉(元封) 2(B.C.79)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 되었다.

  얼마 후 관가의 미움을 받아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卒本)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필자주 : 부여무서왕이라 한다)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